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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하신다

LNCK 2012. 2. 1. 11:21

◈없음(무)에서 있음(유)를 창조하신다                 롬4:1~2                  출처

 

 

하나님은, 사라가 경수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비로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없음(무) 상태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성숙한 크리스천 제자가 되는 조건,

진정한 크리스천 사역의 기본 바탕은.. 여기서 부터 출발합니다.

- '자기 없음'이요, 철저한 회개요, 자기 부인이요, 깨어짐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난 “없는 자” 이에요.

이런 상태를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가 “나”를 예수 안에서도 “있는 자”로 둔갑을 시킨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난 없는 자”가 아니고 “있는 자”로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죄가 왕 노릇하라고 내 주체(主體)를 살린단 말입니다.

내 주체(主體)가 살아나면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해요.


그러니 하는 일마다 내가 자랑이 되어진단 말입니다.

인간의 몸은 이걸 못 버려요.

내가 부인되고 부정당하는 꼴을 못 보아요.


이렇게 되면 결국 예수는 내 영광을 챙기고자 하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우상(偶像)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우상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성은 예수를 믿어도 사라지지 않아요.

예수를 이용해서 내가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는, 내가 살기 위해서 믿어주는 이용 대상이 됩니다.


이걸 이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과 이 싸움을 하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알다시피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어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그를 사용하고자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도리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계속하여서 충돌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앞세워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꾸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겠다고 하여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도

자기 영역을 넓혀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헷갈릴 수 있는 말을 하니까, 잘 생각하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일해 가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세상방식으로서 자기를 세상에서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없음에서” ~ “있음으로” 창조의 일을 하고자 하는데!

아브라함은 “있음에서” ~ “더 있음으로” 나아간단 말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기존에 아브라함에게서 있는 것이 나오면 안 되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없는 것이 나와야 하잖아요.

그래야 “없음에서”~ “있음이” 되지요.

이게 ‘창조의 역사’이거든요.


하나님은 창조하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십니다. (무에서 유로 창조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모습이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는 일을 하시지요.

어둠은 죽음이고 타락을 상징해요.

그리고 빛은 생명이고 의(義)를 상징해요.

그러니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의 모형이에요.


그러니 창조가 되려면 “없음”이라는 바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없음에서”~ “있음이라” 는 창조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역을 보면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 먼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흑암이니 혼돈이니 공허는 죽음이란 말이에요.

‘없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세요.

죽음에서 생명을 낳는 일을 하세요.


이게 창조거든요.

이 창조 사건 속에는 성도를 구원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러한 식으로 구원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 사건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하나님을 힘입어 자식을 낳고자 했어요.


이건 자기 가능성으로 낳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가능성은 ‘있음’이에요.  有


그러니 아브라함이 젊어서 아들을 낳고자 한 것은

“있음에서”~ “(더)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낳은 것이 되기 때문에 ‘있음’의 연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고자 선택을 하셨어요.

그러자면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없음’의 상태가 되어야 해요.  無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아브라함의 힘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드디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집니다.

경수가 끊어진다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생산 불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제 ‘없음이’ 된 것입니다.

‘죽은 자’가 된 것이에요.


인간의 생식법으로는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야 생명이 잉태가 되어요.

쉬운 말로 정자가 난자에게 잡아먹히면서 일어나요.


아이가 잉태하는 것 속에는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정자가 난자 속에서 죽는 것은, 씨앗이 흙 속에서 자기를 죽이는 이치와 같아요.


자기가 죽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생명의 낳아짐 속에는

반드시 먼저 생명을 가진 자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을 통해서 낳아진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성도의 구원에 모습이에요.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먹혀주심으로서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사라가 난자를 생산할 수 없는 경수가 끊어졌다는 것은, 죽은 여자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씨를 주어도 그 씨를 받아 낼 밭이 없는 것입니다.


씨는 밭이 있어야 싹을 내요.

씨를 책상 위에 둬 보세요.

일년이 가도,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그대로에요.

씨가 싹을 내려면 책상 위가 아니고 흙이 필요해요.


이처럼 씨가 아무리 싹을 틔우고자 하여도 땅이 없으면 못해요.

왜냐하면! 생명은 반드시 씨가 흙 속에서

자기를 버리는 죽음을 통해서 낳아지기 때문입니다.

씨가 죽으려면 흙이 있어야 하잖아요.


정자(精子)라는 씨를 죽이는 그 흙 역할을, 여자의 난자(卵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에겐 경수가 끊어져서, 그 난자(卵子)를 생산 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이 아무리 씨를 사라에게 주어도 그 씨를 받아 줄

난자(卵子)라는 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식을 생산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낳아진 자식이라야

하나님의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사라가 죽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언약의 후손이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지요.

그럼 예수님이 구원을 해 내려면, 자기 백성들이 죽어 있어야 하겠지요.


죄와 사망 가운데 갇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살려 낼 것이 아닙니까?


죽어 있다는 것은 ‘없음’이란 말입니다.

이 ‘없음’에 ‘있음’이라는 예수님이 들어 온 것입니다.


‘없음’ 속에 들어와서 ‘있음’이라는 자기 자신을 죽였어요.

(자기 부인, 철저한 회개, 깨어짐, 바닥 체험으로) 죽은 우리들에게 생명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럼 ‘없음’이라는 죽은 우리들이 예수라는 ‘있음’을 통해서

‘없음에서’~ ‘있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 즉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오는 과정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났어요.

그러니 ‘없음’이었던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있음’이 된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가지요.


가서 자식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자신들의 근거로 비웃어 버립니다.


왜? 비웃습니까?

자기 꼬라지(형편, 처지)를 보니까, 한숨 섞인 웃음이 나오는 것이지요.


사라는 씨를 주어도 받아 낼 수가 없는 죽은 자잖아요.

‘없음’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하니

속으로 비웃으면서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수준으로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아들을 준다고 하자!

속으로 웃기고 있네!

당신이 아무리 자식을 낳아 준다고 해봐라!

여자가 경수가 끊어져서 죽은 몸인데 어찌 임신이 된단 말인가!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서로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사자가 자꾸만 헛소리를 하니까

짜증을 내면서 ‘웃기지 말고 밥을 먹었으면 그만 빨리 가라’는 식입니다.


(중략)


그런데 일 년 후 이삭을 낳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없음에서’ 낳아진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잉태 할 수 없는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낳아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자식을 생산 할 수 없으니, 죽은 자와 같은 것이지요.

죽은 자란 ‘없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없음’ 이라는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씨를 주어서, ‘있음’ 이라는 이삭을 낳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생명을 심어주어서 끄집어 낸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누가 죽은 사라의 몸에서 생명을 끄집어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낳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삭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진 자식인 것입니다.


모든 하늘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에 방법으로 낳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백성들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모르고,

    자기 ‘있음에서’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더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세계만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영역만 넓혀진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러한 것은 모든 죄인들이 꿈꾸는 바에요.

     죄인은 신(神)을 이용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계속하여서 “나 있음”을 유지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나로 남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죄인이 죽지 않고 계속하여서 ‘나 있음으로’ 유지하게 되면

     이 세상은 죄인의 세상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어요.


     이러면 하나님은 죄인을 팽창시켜주는 촉매처럼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바라는 것을 철저히 깨부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어떤 식으로 깨부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소원을 빼앗아 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는 것은

전부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방식이 됩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은 자식이에요.


“있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자에요.

이 놈이 나중에 “없음에서”~ “있음으로” 낳아진 이삭을 핍박하잖아요.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는 것을 보고 큰 근심을 하지요.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자 “육으로 낳은 자식”이

결국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아진 “언약의 후손” 을 공격하더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큰 근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 원수 노릇을 했구나!’ 탄식한 것입니다.


이런 맥(脈)이 계속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속에 두 민족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음으로’ 낳아진 표면적 이스라엘과,

‘없음에서’ 낳아진 이면적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없음(무)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깨어지고, 낮아지고, 죽어서 없어질수록..

    있음(유)의 창조역사가.. 신비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지론(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은

    기독교 방식이 아닙니다. 그건 이스마엘을 낳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 빈손인 사람들이, 無이신 분들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이루어가는 주인공들이란 뜻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깨어짐, 없음, 철저한 회개'에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부활하여) 크고 창대하게 되는 일도 있겠죠.

    그런데 그때 크고 창대하게 되어도.. 그저 덤덤한 것입니다.

    과거의 깨어져 없음의 상태나.. 별로 다를 게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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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이면적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