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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깊이를 원하십니까?

LNCK 2012. 2. 4. 23:38

 

◈얼마만큼의 깊이를 원하십니까?          겔47 :1~5.       모두 스크랩 글 

 

주님이 보내신 천사가, 에스겔에게 물었던 질문은

사실상 “얼마만큼의 깊이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장 속 어느 깊이까지 파고들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 어느 깊이까지 들어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임재에 완전히 잠기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잠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익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아가 죽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죽는 그 순간 생명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썩어져 가는 세상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처음에 그의 발목까지 차는 깊이까지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와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발목 깊이’ 정도까지만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 정도 깊이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움직이고, 우리가 내키는 대로 말하는 수준,

또는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선까지만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에스겔에게 

‘나는 네가 그보다 더 깊이 나아오길 원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에게 1천척을 더 척량하게 하시고, 더 깊이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겔47:4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자아를 버리길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깊이가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의 흐름에 의해 우리가 떠밀려 가기까지

깊은 곳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오도록 때로는 부탁하시고

때로는 설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존자의 영광스런 임재 속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성령님께 굴복당하기 원하십니다.

 

겔47:5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은 무릎 깊이의 물까지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이 무릎 깊이까지 들어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물살의 흐름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 깊이는, 여전히 안전한 장소입니다.

저는 완전히 잠겨 익사하게 되기까지 나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이 물(그분) 속에서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 정도의 깊이까지 주님 안에 잠기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 이라고 느끼지 않게 될 것이고,

'주님께 완전히 삼킨바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님이 보고 있는 것을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기껏해야 무릎 깊이까지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깊은 물속으로 이끄시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누구도 완전한 부르심 가운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에야 비로소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활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여러분은 주님께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깊이까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실 것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물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 속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은 나, 살아 있는 나

 

1. 현재 기독교 가운데 있는 두 가지 보완점을 말하자면

먼저 설교를 아이들도 알아듣도록 ‘쉽게 하라’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설교를 쉽게 하라’는 뜻은, 어휘를 쉬운 걸로 사용하라는 말이지

설교 내용이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교 내용은 쉬울 수도 있지만, 결코 쉽지 않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성경에 다른 말로 ‘비밀’(무스테리온, mystery)로 표현한 것은,

 

깨닫는 자에게는, 복음이 쉬운 것이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닌, 그야말로 ‘비밀’입니다.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난 사람은 비교적 쉽게 알아듣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사실 세상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면

상당히 비상식적인 역설이요 비밀이요 감추인 것이며..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설교 형식을 쉽게 하는 것은.. 좋은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감춰진 비밀이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2.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만 믿게 하므로

숭배적인 신앙으로 끌고 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잘 믿으면... 열심히 믿으면...’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례와 성찬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묻지마 식으로) 믿으면 된다기에

그 분이 나를 위해 하신 일에, 나를 결부시켜 깊이 생각할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믿음을 쉽게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를 믿으라!’ 뿐입니다.

그리고는 ‘한 만큼 축복하신다, 한 만큼 상급이 쌓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묻지마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 믿음일까요?

 

그래서 믿음을.. 세례와 성찬과 결부시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세례와 성찬을 왜 받습니까?

예수와 함께 내가 죽고 그 분의 다시 살으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 안에서 내가 다시 살았음을 시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지마 식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내가 죽고, 내가 살았음’을 늘 믿고/고백하고/생활하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를 믿는다’며 철썩같이 믿고 있지만,

전혀 자기 자아의 죽음을, 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실은 안 믿는 것입니다!


 

 

◑ 복음 설교 준비에 10년을 투자하시라                     출처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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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만큼 구원이 되고, 듣는 만큼 믿게 된다.

나는 설교 잘하는 사람은 봤지만,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을 그리 보지 못했다.

복음을 잘 전하는 분은 희귀한 존재다. 어쩜 이 시대에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다.

값으로 칠 수 없다. 잘 나는 비둘기 한 마리가 3억 7천만 원인데

온전한 복음을 들고 잘 달리는 분의 몸값을 과연 계산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분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형님으로 모시겠다.

 

도발적인 말을 하자면, 지금 구원열차 탈 정도의 메시지 속에선

거듭남과 생명을 얻는 회개와 구원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다.

그렇지 않다고 보시는가?

거기서 오케이 할 정도는 하나님께는 이미 노 하신지 오래다.

(전부 다 그렇다는 뜻은 결코 아님) 

 

‘참 맞는 말이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복을 받지.. 맞고말고.. 나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지..’ 할 수는 있지만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에 찌든 자아상을 바꿔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는 신분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난 지금 ‘부족’이라고 했지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게 현재 신학교의 교수들의 수준이며 교회의 수준이다.

그건 목사는 교수가 만들고

교수는 그 신학교의 영적인 카테고리를 넘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냥 목회의 기본적인 자질을 점검하고

전통적인 신학지식과 성공적인 목회를 위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 전부다.

 

처음 입학할 때에 가졌던 내면의 질문을 하나도 풀지 못하고

리포트의 노예가 된 채 졸업을 한다.

신학교나 신대원 그리고 박사과정에서 내가 들어야겠다고

귀가 번쩍하는 강의는 몇 번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성경에 관해서, 그리스도에 관해서 about’일 뿐

‘바로 이거다’ 하는 강의는, 좀처럼 들어보기 힘들다.

그만큼 한국의 신학교가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에 대해.. 척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밋밋한 시간을 견디지 못해 도전하는 것이

겨우 성령세례나 은사주의 운동이다. 그 만큼 기독교가 가난하다.

들은 게 없으니 들려줄 게 너무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 당장 보여 줘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과 그 영광은

언제나 ‘장차’에 있다. 구원도 외상, 천국도 외상이다. 앞으로 부지런히 갚아야 한다.

 

사람들을 교회에 붙잡아 둬야할 것 같고

그러려면 뭔가는 줘야 남아 있을 것 같은 강박관념에 별 희한한 소리를 다 한다.

 

안쓰럽다. 성경을 연구하시라.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하시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책을 많이 보시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으라.

 

다만 남의 설교는 절대로 흉내 내지 마시라.

오직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성경에 집중하시라.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될 때까지 정진하고 정진하시라.

잡다한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속성재배를 바라지 말고, 

그 일에 10년을 투자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