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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성만찬과 스트레스성 폭식

LNCK 2012. 2. 16. 09:42

◈성만찬과 스트레스성 폭식        마26:26-30         출처



◑스트레스성 폭식이란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가끔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우리가 접하게 됩니다.


한 여자가 실연을 당하고 좌절감에 몸부림치다가

집에 들어와서 몇날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서, 냉장고 안에 있는 모든 반찬들을 꺼내서

찬밥과 함께 정말 세숫대야만한 양푼에,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쓱쓱 비벼가지고,

너무 미친 듯이 입에 퍼 넣는 모습을 봅니다.


또 아니면, 포장마차에 가서, 그야말로 실신할 정도로

폭음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뭐 이건 꼭 실연당한 여자가 아니라도, 직장에서 잘린 남자라든지..

이게 다 우리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스트레스성 폭식입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생리적으로 신체적인 변화상으로는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고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해서 혈중의 당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면 사실은 식욕이 없어지는 거예요, 신체적으로는.

그런데 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뭔가 자꾸 먹게 되느냐?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게 되는 순간

심리적으로는 내 속이 비어있다는 것이 과도하게 느껴집니다.

한 마디로 ‘속이 허한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집니다.  *虛: 빌 허


그래서 그 허함을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폭식과 폭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먹어도 정말 토할 정도로 밀어 넣어도..

사실은 가 아니라, 마음이 채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습관화 되면,

만성적인 스트레스로부터 폭식과 폭음의 습관이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스트레스와 성만찬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사람이 이 세상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에 대해서 어떤 소원을 갖지 않습니까?


그 소원을 갖는다는 것이.. 마음으로 폭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트레스성 폭식과 똑같은 이치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이게 바로 돈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허하니까..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돈을 미친 듯이 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양푼에 찬밥과 김치와 고추장을 버무린 밥을 좋아해서 그렇게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게 폭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을 굉장히 마음에서 갖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과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싶고.. 엘리트가 되고 싶다는 야심을 갖게 됩니다.

이게 실제로 일류대학이 좋아서도 아니고, 엘리트가 되는 게 대단해서도 아니고,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됩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닌 것들을 마음으로 소원하며

허기진 마음의 배를 채우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다 죄악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이제부터는 하나님만으로 배부르겠다고 하는 결단의 표현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언약’을 제정하시면서

특별히 ‘먹고 마시는’ 형식으로

즉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만찬을 먹고 마시는 가운데, 그래서 배부른 가운데..

스트레스성 폭식을 피하라는 것이지요!


음식뿐만 아니라,

물질의 폭식, 명예의 폭식, 그 외 모든 폭식으로부터

내가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자, 성만찬을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가 죽게 될 것이고, 그 몸이 바로 이 떡이다,

또 잔을 주시면서 죄를 사하기 위해 흘린 나의 피다’고 하십니다.


‘유월절’이 제정된 이유가

출애굽 사건에서 구원을 뜻하는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성찬식은 ‘새 언약’이니까, 유월절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유월절 구원사건을 대치해버리는 사건이

신약의 성만찬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왜 죄 사함과 구원의 사건이

하필 성만찬,

즉, 먹는 것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느냐 이겁니다.  ←문제 제기


여러분, 죄가 바로 먹는 것/세상 만족/배부름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죄 사함과 구원의 사건이.. 성찬을 먹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배부름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배고파지고, 끊임없이 배불러야 되는 그러한 순환 속에서 인간이 삽니다,

인간뿐만 아니에요, 동물도 마찬가지예요.

동물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먹이를 찾는 겁니다.


아담의 원죄로 타락한 인간도

(마치 짐승처럼) 끊임없이 먹이를 찾는 것인데,

인간은, 육체의 먹이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한 가지 더 보태져서

마음의 먹이를 찾아서.. 마음이 배불러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어있는 마음이 배불러져야.. 비로소 기쁨이 생기고 행복감이 생겨납니다.

‘내가 이제 살 마음이 생긴다’, 반대로 ‘이제 살 마음이 없어진다’는 말은

마음이 배부른 상태와, 마음이 배고픈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좋은 게 없던 사람이, 갑자기 애인이 생기면서 살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애인이.. 자기 마음의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배부름을 위해 사는 존재로 태어난 것이에요.


그런데 죄가 어디서 성립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뜻은

하나님 말고.. 내 배를 내 스스로 채우는 것입니다.


‘돈이 좋아, 출세가 좋아,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는 게 좋아!’

이렇게 좋다고 하는 것,

내 배를 채울만한 것을

하나님 이외에서 찾아내는 것,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거(죄)라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밖에 없도록 지어진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결별을 하면서부터

인간에게는 스트레스가 유전적으로 전해져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내가 적응하기 힘들어지면서 긴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만 배를 채울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면서

근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긴장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고, 결코 기쁠 수 없고,

결코 배부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긴장 속에서 사람들은 그 공복을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붙잡은 게

돈, 승진, 명품 가방이라는 겁니다,

허겁지겁 붙잡고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게 일류대학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모든 소원은 다 하나님이 결여되면서

하나님으로 밖에는 채워질 길이 없는 마음들이 바짝 긴장하면서

그 스트레스, 긴장된 마음을 채우려고 버둥거릴 때


마치 실연당한 여인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폭식을 하듯이

돈을 갈망하고, 출세를 갈망하고, 건강과 장수, 승진을 갈망하고,

심지어는 교회성장을 갈망하고...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목사님들이 교회의 숫자적인 부흥을 갈망하지 않습니까?

경우에 따라서 ‘과도한 스트레스성 폭식’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채워져야 될 목사님이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스트레스를

‘교회성장’이라는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스트레스성 폭식이 나타나고 있는 거라는 얘깁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성만찬의 의미가 뭡니까?

왜 성만찬이,

하필 먹는 것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까?


사람이 끊임없이 그 속이 허하고, 비어있기 때문에,

그 빈 속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참 만족과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살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생각합니다.

‘아, 내 마음이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어요’라고 믿는 것이

성만찬을 받아들이는 태도요, 바른 마음가짐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성만찬을 받아들인 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내 마음에 ‘아, 요거 이뤄졌으면 좋겠다’ 싶을 때, 스스로 깜짝 놀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하늘아버지로 채워져 있지 않구나!

하늘아버지로 채워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그 스트레스로 인해 내가 자꾸 이 세상의 무엇인가를 먹으려고 하고 있구나,

스트레스성 폭식이 마음에 나타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깨우쳐 주고 자각하고 인정하는 것,

이게 바로 성만찬의 의미대로 삶을 사는 거라는 거예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교회가 성장했으면 좋겠다..

이 모든 소원이 생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가 죽은 자다, 이런 소원은 하나님아버지로 배부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성 폭식의 일환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내 소원에 대해 죽고, 소원을 바꾸는 겁니다.

굶주림으로 인해서 채우고 싶은 그 좋은 음식을.. 주님의 살과 피로 바꾸는 거예요.


십자가를 붙잡고, 내 세상 소원에 대해서 죽은 자에게

하늘의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면서 배부름을 허락하고,

거기서 기쁨과 행복을 주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을 향한 내 소원이 죽고, 이제 하나님을 내 소원으로만 삼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스트레스성 폭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