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거울을 깨버려라! 마26:57~68 출처
▲도입 예화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인 왕비는, 스스로 자멸해 갑니다.
이 왕비가 스스로 자멸한 이유, 그 비극의 발단은
‘마법의 거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왕비는 때때로 자기가 갖고 있는 마법의 거울에게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은 계속해서 왕비가 제일 예쁘다고 대답을 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왕비가,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미쳐버리는 거죠.
그래서 자기 자신이, 마법의 약을 마심으로써, 할머니로 변합니다.
흉악한 할머니로 변신해서, 백설공주를 죽이려 했는데,
백설공주를 죽이려다가, 결국 자신이 파멸되는, 공의의 심판을 받고 맙니다.
그저 좀 가볍게 생각해 보면 질문을 바꿨어야 돼요.
거울이 왕비에게 ‘백설공주가 가장 예쁘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거울아, 거울아, 내 나이 또래에서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혹은 ‘나이에 비해서 누가 제일 동안童顔이냐?’ 이렇게 물었어야 되는 거죠.
세월이 흐르면, 자연 노화를 피할 수 없는데,
언제까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는 질문을 계속할 참이었습니까?
그런데 제가 주제넘게, 왕비에게 조언advice을 하자면,
거울이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 거울을 깨버렸어야 돼요.
그리고 다시는 그 거울에게 와서 묻지 않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랬어야 열등감과 질투로부터.. 왕비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 동화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거울을 깨야.. 질투와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데,
사람은.. 거울에 비춰지는 자기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거울에 자기 모습이 비춰지듯이..
남들에게 비춰지는 그 모습에.. 사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여성인 ‘사빈 멜슈오르보네’는 <거울의 역사>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에서 그는, 참 인상적인 말을 남깁니다.
데카르트가 ‘코기또 에르고 쑴(cogito ergo sum)’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인문학사 속에 아주 뚜렷하게 기념비적으로 남깁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그런데 멜슈오르보네가 자기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비춰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로운 존재)가 되기 이전에
인간은 호모 스펙쿨룸(homo speculum, 거울에 비춰지는 존재)이었다는 거예요. *speculum은 라틴어로 '거울'.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전에
‘나는 비춰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앞서 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힌 통찰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애인을 만나서 연애를 하면 왜 살맛이 납니까?
애인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내가 나를 볼 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애인이라는 거울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가 보았더니
그 거울이 ‘이 세상 모든 여자를 올 킬’ 해버립니다. all kill
그 남자에게는, ‘나라는 여자가 최고’로 비춰지는 거예요.
거기서 그 비춰진 나를 보면서.. 살맛이 나는 겁니다.
아내가 찌개를 맛있게 끓였어요.
남편이 찌개를 먹으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이 끓인 찌개가 최고야!’
남편의 마음에 비춰진 자기를 보면서, 아내는 살맛이 나는 겁니다.
왜 연예인들이 연말에 상을 받으면서 웁니까?
시청자들에게 비춰진 자기 모습을 발견하면서
살맛을 느끼며, 거기에 감격해서 우는 거예요.
자기가 남들에게 좋게 비춰지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모습을 추구해 갈 때
반드시 2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백설공주의 계모인 왕비의 길을 걸어서
질투와 열등감에 몸부림치든가
-아니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처럼
호수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든가..
즉, 질투 또는 자뻑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자뻑 :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고 뻑 가는 것
질투와 열등감으로 자멸하든가, 자아도취로 자멸하든가..
둘 중에 하나라는 거예요.
자, 남들에게 비춰지면서, 자기 존재감을 찾는 게 인간인데,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그 모습을 추구해갈 때
반드시 왕비처럼 망하든지.. 아니면 나르시스처럼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주님께서 해답을 주신다는 거예요...
◑본문 설명
예수님이 체포되셔서,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와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증거 하는 자들이 마구 소란을 피우며 난리가 났어요.
여기저기서 거짓증거들이 난무하고, 마구 소란이 일어나는데,
예수님은 한 마디도 안 하고 침묵하십니다.
대제사장이 물어요, ‘어찌 가만히 있느냐? 이 난리통이 보이지 않느냐?’
자, 이 침묵의 의미가 뭘까요?
재판 장소에 서있는 피고의 입장에서는 무얼 해야 됩니까?
재판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배심원이나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비춰지도록 그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변론이나 변호를 합니다.
그런데 ‘극악무도한 나쁜 놈’이라는 비난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침묵해버리십니다...
▲1. 지금 예수님은, 왕비의 마법의 거울을 깨버리시는 거예요.
왕비가 마법의 거울에게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거울로 상징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거울을 본다고 할 때,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있지만, 그 기준은 대개의 경우 타인입니다.
예를 들어,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합니다.
화장을 시작해서, 화장이 끝날 때가 언제입니까?
타인이 내 얼굴을 볼 때 ‘이 정도면 괜찮겠다고 보겠구나!’라는 게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침묵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비의 거울을 깨버렸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 비친 나,
그게 어떤 모습일까? .. 상관없이 깨버렸다는 겁니다.
유대백성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 깨버렸다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다 깨버리셨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 .. 아무렴 상관없다는 겁니다.
마치 여자들이 실연을 당해 세상 살기가 싫어져서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새둥지처럼 해서 슈퍼마켓에 들락거리는 것처럼,
‘이제 내가 예쁘게 해봐야 누구에게 보이겠나?’ 하며.. 살맛이 없어지는 거예요.
비춰지는 거울이 사라지면.. 내가 살맛이 없어지는 겁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예수님은 이 왕비의 마법의 거울을 깨버렸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거울아, 거울아, 내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냐?’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2. 그런데 사람은 비춰져야만.. 자기의 존재감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침묵하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이 이렇게 묻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6:63
그때, 그 많은 아우성치는 비난 속에서도
당신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해낼 것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막연하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내가 누구냐 하면..)
권능의 하나님아버지 보좌 우편에 있게 되는 것과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게 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26:64
다시 말해 주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거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깨버리셨습니다. (▲1.)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아버지,
그 하나님의 거울 하나만을 보면서 사셨다는 거예요. (▲2.)
◑적용/ 이걸 우리에게 갖고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마음이 불편한 것은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남편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
이웃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
사장님에게 비춰진 내 모습..
이렇게 사람은, 그냥 다른 사람에게 비춰진 내 모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비춰진 거울 속에서
내가 필요한 존재로 비춰지고 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부장님 거울 속에 내가 칭찬 받을만할 때
내가 회사 다니는 맛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다 깨버리세요!
그렇지 않으면 왕비의 불행이나, 반대로 나르시스의 불행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거울을 매일 쳐다보며 사는 인생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다 깨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거울’ 하나 남겨두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거울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거울에 비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나요?’
이 질문, 하나만 묻고 사는 거예요.
본문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난리를 칩니다. :67
예수님은, 침 뱉음 당함에 마땅한 모습으로, 지금 사람들에게 비춰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비춰지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음에서는 그 거울을 다 깨버렸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 내가 어떤 사람 같으냐?’ ‘내가 어떻게 평가되느냐?’ 묻지 않습니다.
아무 상관없습니다.
완전한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넌 내 우편에 앉아있어야 마땅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 거울에 비친 모습 하나만 붙잡고
이 세상 모든 거울을 다 깨버리고 공회의 재판정에 앉아계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거울’에 내 모습을 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을 가르쳐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겁니다.
하나님의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은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받고 죽어야 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연예대상을 수여하면서 칭찬을 하더라도 속지 마세요.
수 천 명의 직원이 나를 향하여 ‘사장님, 사장님’ 하며 신처럼 받들어도 속지 마세요.
그들에게 비춰져 있는 성공한 재계의 인물,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닙니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인줄 알고 살다가는
반드시 왕비나, 나르시스의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요.
나 스스로 도취되어도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남에게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멸해버리고 맙니다.
주님이 죽으신 저주받은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 비춰지고 있는 내 모습을 찾고
사람들이 칭찬하든지 비난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 세상의 모든 거울은 깨버리고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 마땅한 자’라는 내 모습을 찾을 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부활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모습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것을 내가 마음속에 느끼면서
마치 애인 속에 비춰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확인될 때, 살맛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 모습으로 비춰질 때
그 살맛을 한번 느껴보세요!
괜히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았다,
이렇게 교리적 습관적으로 말하지 말고
진짜 애인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의 기쁨,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에 ‘네가 마땅히 내 자녀이다’라고 비춰질 때의 그 기쁨을
실제로 만끽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알고
세상의 모든 거울을 실제로 깨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주변에 언제나 나타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거울들을 향하여,
‘거울아, 거울아, 내가 어떤 모습이냐?’고 묻는 것을 중단하고
모든 거울을 깨버리고, 오직 하나님 거울만을 남겨두고
그것에 비친 내 모습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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