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내 막12:1~12 인터넷에서 스크랩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하나 만들어 울타리를 치고, 땅을 파서 포도즙 짜는 틀 자리를 만들고 망대를 세웠다.
그러고는 어떤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를 주고 멀리 떠났다... 막12:1
본문은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일컬어집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교훈이 가능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낸 종들이 계속해서 희생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첫 번째 보낸 종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곧장 조치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악한 농부들을 빨리 처벌해서,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종들이 계속해서 희생당하는데도
계속해서 자기 종들을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종을 4번 보내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냅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의 주인은, 힘이 없고 연약해 보입니다.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패배자처럼 보입니다.
보내지 않아도 될 종들까지.. 위험한 곳에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 희생을 당하고 나서야
악한 농부들을 심판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대응>은
바로 악한 세상과 악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내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의보다 사랑이 먼저
본문을 읽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인의 인내>가 이해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복을.. 법칙처럼 생각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빠진 정의’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주인은 정의를 행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인내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복하고 싶은 충동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회전체에 인내가 없어졌습니다. 사랑보다 정의가 앞섭니다.
때로는 사랑 없는 정의만 부르짖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의 없는 사랑도 문제입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사랑 없는 정의>에 훨씬 더 익숙해져있습니다.
인내란 무엇입니까?
인내는 정의보다 사랑이 앞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항상 정의보다 사랑을 앞세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인내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사랑으로 분노를 이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참고 기다립니다.
배반이 주는 상처와 고통을 사랑으로 인내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리석어 보이거나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도
인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셨다면
심판 이전에 틀림없이 오래 참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곧장 심판을 하시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랜 세월(길게는 120년)을 먼저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인내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벧후3:9
▲인내를 악용하는 사람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약속하신 주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벧후 3:8~9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내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행한 대로 그대로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결코 이 시간에 살아남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농부일 수 있습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도다. 전8:11
사람들이 악을 담대하게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인내를 이용해서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은 더욱 담대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공의롭지가 않아서도,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인내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해서 끝임 없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복의 법칙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회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계속해서 때리고 핍박하고 모욕을 주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어도.. 주인은 여전히 참고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해서
하나님께 상처를 줘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내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악한 농부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했지만
주인은 그들을 인내하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또한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선지자들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까지 세상에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까지도 보내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은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사랑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분의 죽음으로 자녀를 살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40일 특별새벽기도를 드리고 나서 결정하시겠습니까.
아마 정상적인 부모라면 쉽게 결정할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서 자녀를 살릴 것입니다. 자신보다 자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살려야 하는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 이상의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을 때
주인은 무력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을 때
온 세상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항상 패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누가 항상 집니까. 사랑이 많은 사람이 집니다.
그것이 내리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스스로 패배자가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면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패하고, 악한 인간들이 승리해서
악한 인간들이 역사의 주권을 차지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벨론의 역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권세를 거부하는 역사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역사의 주권을 차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소작농에 불과합니다.
맡겨진 포도원에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를 드리는 존재입니다.
※이 소작농이 바쳐야 할 세貰인 ‘열매 소출’과,
요15:2의 ‘열매’를 연결해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포도원을 맡은 농부는 주인을 모욕했습니다.
주인의 넒은 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악용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그를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인내를 이용해서 자신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아들을 죽임)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모욕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만물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도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를 통해 최고의 사랑을 다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한계이며 인내의 한계입니다.
더 이상의 인내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이제는 공의로운 심판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보다 사랑이 앞서서 인내하셨지만
자기 자신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이제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인내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 “누구의 권세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그러나 여러분, 아들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비유는 슬픈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심으로 위대한 역전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비극처럼 보이는 희극입니다.
역사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희극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악한 농부들을 심판하시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이방민족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으니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일 뿐이다.’ 막12:10~11
포도원 이야기에서 갑자기 돌이 나옵니다.
의아할 수 있지만 전혀 의아할 문제가 아닙니다.
시편 118편은 다윗이 자신의 상황을 비유해서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는 도망자에서 왕이 되고, 버려진 사람에서
가장 필요한 머릿돌이 되는 인생경험을 노래했습니다. 시118:22~23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버려진 돌을 사용하셔서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벤’이입니다. 돌은 ‘에벤’입니다.
간혹 학자들은 (건축자의 버린) 돌과 아들의 발음에도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시편 118편을 암송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유월절이 되면 시편을 암송했습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가장 잘 표현해 줍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조롱하면..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는다.
지난번 집회에서 프랜시스 챈 목사님이,
자신의 딸을 단상 위로 부르고, 스킷 드라마로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당신이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죽임당하는 것을 상상해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딸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아야합니다. :9
인내와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을 때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심판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주어진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해서, 지옥을 가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하는데
그들은 역사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준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진리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예수를 체포할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두려워해 예수를 그대로 두고 가 버렸습니다”(12절).
'악한 농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하지 말아야!
결론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면서까지
하나님은 인내하고 최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하지 말아야합니다. 1)
하나님이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2)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의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분명히 정의롭게 말하면 심판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보다 사랑이 앞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3)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은 영혼들이 있다면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 그들을 변화시켜야합니다.
인내로.. 한 영혼 한 영혼을 변화시켜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인내'와 관련해서
어느 목회자에게.. 자기를 늘 괴롭히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목사 체면에, 같이 대놓고 싸울 수도 없었고.. 난감했습니다.
그 목회자는.. 그 문제를 놓고,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쉽게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인내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 응답은, 성경말씀대로 ‘오히려 그를 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회자는.. 그 말씀에 순종이.. 정말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목회자에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여, 저 못된 교인을 회개시켜 장차 (고생 엄청 하는) 목사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축복도 되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자기가 순종하게 되고,
또한 자기를 애 먹이는 교인을, 호되게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도도 되니..
그 후로, 자기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를 애 먹이는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모조리 ‘목사가 되거나 (너도 나처럼 한 번 겪어봐!)
목사 사모가 되게 해 달라’고.. 자기 마음속으로 축복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이 시원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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