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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는 삶이 연결됩니다

LNCK 2012. 3. 2. 20:03

 

◈복음에는 삶이 연결됩니다             엡4:17~20                       출처

 


엡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방인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방인의 특징이 뭡니까?

‘저희는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하지요.  :18


그리고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하지요.  :19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있으니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자신을 방임하고 방탕에 내어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방임(放任)하고 방탕(放蕩)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방임이니 방탕이란 말은.. 자기 마음을 놓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겁니다.

이를 본능적으로 산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이에요.


성경에선 이렇게 본능적으로 사는 것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이니까 하나님이 니들 마음대로 살으라고 유기시키신 겁니다.


그래서 방임하고 방탕하게 사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18


성도의 마음은, 은혜가 붙잡고 있어요.

말씀이라는 생명줄에 매여 있어요.

그래서 막 살수가 없고!

자기 본능이 원하는 대로 살수가 없어요.


요즈음에 ‘복음을 전하면서’..

믿기만 하면 된다면서..

(직접적인 권장은 안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식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많아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예수 피만 믿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예수를 믿지만 ‘내 마음대로 살거야!, 내 본능대로 살고 싶어’

이게 바로 방임이고 방탕이에요.  :19

 

     비슷하게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이같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하지요. 빌3:18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와 거꾸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관념’(자기 생각)이에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냥 머리로,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거예요.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신앙이 생활이라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라고 합니다. :18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으니’..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새 생명이 자기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요3:16, 롬1:17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나.. 생명(영생, 구원)에서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는,

‘예수 안 믿는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 믿는다면서.. 구원 못 받는 사람’입니다.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뒤집어보면,

‘이같이 배운 사람들도.. 당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예수 진실하게 믿는 법’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여러분들은 다 요3:16절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 이 세상에서 좀 멋있게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바울사도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죄인은.. 자기 살이 썩어 들어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모르는 문둥병자와 같이

죄에 대한 아픔을 몰라요.


‘이방인’(:17)들이 죄에 대하여 그러합니다.


이방인들은 문둥병자처럼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죄에 대한 아픔이나 미움이나 싫어함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자는

신자가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했어요.


신자란..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죄를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혹시 죄를 짓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요.


죄에 대하여 아파하는 마음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나중엔 안하고자 하게 되어요.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성도가 죄를 지어 보세요.

그럼 주님이 속에서 그러십니다.

‘재미있냐, 그렇게 좋으냐, 언제까지 그럴 건데?’


그런데 사안에 따라서는, 무자비한 징계를 가하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라도.. 죄를 피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성화되면서 수준에 올라가면, 

나중에는 죄 짓는 것이 싫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되어요.

재미가 없으니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두들겨 맞으면서 배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기까지는, 늘 이러한 일들이 일어 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겁니다.  히12:4참조.

죄가 너무도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늘 죄와 싸우는 자입니다.

죄를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혹시 죄를 지어도.. 죄를 미워하며, 애통함으로 회개하며

예수님의 피 뿌리심에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성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늘 이 싸움을 합니다.


신앙생활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이고 삶이에요.

삶이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생명이란.. 늘 죽음에 세력과 싸우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생명의 능력이에요.


원리(법)적으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지만

육신으로서는/실제 삶에서는..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이방인과 구별되게 되어 있어요.

마치 물과 기름처럼 분리 되게 되어 있어요.


가치관이 다르고,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구별이 되고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일컬어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불량 식품을 좋아하듯이

자기를 긍정해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막 살아도 전혀 부담감이 없는.. 자신을 합리화 해 주는 그런 말을 좋아해요.

결국 그 독(毒)에 중독이 되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 신앙을 인정해 주고!

자기를 알아주는.. 그런 복음을 듣기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내 편을 들어주는 말이 아니고, 성경입니다.

그 누구의 말이라 하더라도 우린 먼저 ‘성경이 그러한가!’ 상고하여야 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의 설교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설교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 

 

계시록에서, 아시아의 7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하나같이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책망하는 내용이 뭔가 하면 바로 <성도의 행위>입니다.


2:5 처음 행위를 가지라!

2:6 행위를 미워한다!


2:19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도다

2:22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란에 던지리라!


2:23 네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3:2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도다!


3:8 네가 작은 능력으로 내 말을 지킨 네 행위를 아노니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차갑던지 덥든지 하라!


행위는.. ‘에르곤’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에르곤’을 성경 전체에 걸쳐서, 다양한 것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마5:16에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

막13:34에서는 종들이 맡아서 일하는 ‘시무’,


요5:38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소행’,

고전3장에서는 각각 행한 ‘공력’,


살전1:3에서는 ‘믿음의 역사’라고도 사용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고, 실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과거나 오늘날이나, 성도들이 신앙이 관념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그 행위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준엄하게 책망을 하시곤

어김없이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합니다.


열심(熱心)이 뭡니까?


열심을 원문(原文)에 ‘제엘로오’ 라고 하는데

이를 어원적으로 보면 사모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사모함이란.. ‘불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말입니다.


뜨겁다는 것은 살아 움직인단 말입니다.

머리에 있지 않고 손과 발로 행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은 차갑고 살아 있는 사람은 뜨거워요.

산 사람은 따뜻해요.

생명은 따뜻해요.


모든 인간은 뱀의 후손으로서 죽은 자입니다.

죄인들은 다 죽은 자에요.

그래서 차가워요. 마음이 싸늘합니다.


죽은 세상에 산 자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흑암에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흑암이란.. 생명이 죽었고 싸늘한 얼음이란 말입니다.

빛이란.. 살았고 따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차갑고 싸늘한 동네에 마음이 따뜻한 분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우리도 그래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이게 산 자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죽은 우리 마음에 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차갑고 싸늘한 우리 마음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을 받은 성도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싸늘한 마음들을 녹이는 것입니다.

이걸 산 나무로서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따뜻해 져요.

이 따뜻함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우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을 타인에게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열매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열심(熱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품으란 말은 이미 주어졌으니 부화 시키란 말입니다.


삶으로 보이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 받은 것을, 내어 보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에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심어 놓고

삶으로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그럼 은혜 받은 모습이 삶으로 나타나잖아요.


이걸 요15장에서는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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