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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포도나무요..

LNCK 2012. 3. 6. 09:31

 

◈내가 참 포도나무요..         요15:1            스크랩, 출처보기


본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내가 “참 포도나무” 라고 하시지요...



◑타락에서 → 구원으로


창세기 1장에 보면, 처음 창조된 세상이 혼돈 속에 있습니다.

그 혼돈 속에 빛과 어둠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혼돈 속에 있던 빛과 어둠을 분리해 내십니다.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저녁에서 시작해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저녁은 어두움이라고 하고.. 아침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은 죽음이고.. 빛은 생명입니다.


어두움은 타락이고.. 빛은 회복을 말합니다.

어두움은 가짜이고.. 빛은 이란 뜻입니다. (지금 포도나무를 살피는 중입니다.)


그러니 창조의 흐름이, 가짜에서 진짜로 나아가지요.

가짜가 먼저이고.. 진짜가 나중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선 항상 먼저 나온 자는 가짜이고.. 나중에 나온 자들이 진짜로 나타납니다.

 

육이 먼저이고.. 영이 나중이에요.

아담이 먼저이고.. 예수님이 나중입니다.

 

가인이 먼저이고.. 아벨이 나중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이고.. 이삭이 나중입니다.

 

에서가 먼저이고.. 야곱이 나중입니다.

레아가 먼저이고.. 라헬이 나중입니다.


사울 왕이 먼저이고.. 다윗 왕이 나중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먼저이고.. 영적 이스라엘이 나중입니다.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땅에서 난 자가 먼저이고.. 하늘로서 난 자가 나중이에요.

옛 사람이 먼저이고.. 새 사람이 나중입니다.


아브람이 먼저이고.. 아브라함이 나중입니다.

야곱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입니다.


언약도 동일합니다.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나중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것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죽은 세상에.. 산 자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지요.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 ‘사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만 하나님 형상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곧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원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같은 사람을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마귀의 형상’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아담이 낳은 자식은 모두가 짝퉁 인간들인 겁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진짜 사람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진짜 사람은 이렇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만 사람이고.. 나머진 모두가 가짜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에고 에이미” “나는(I am) ~ 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진짜(참)가.. 가짜들에게 오신 겁니다.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고 “참” 포도나무에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결국 이스라엘은 가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짜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내가 “참 포도나무”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에 타다 만 포도나무


그럼 예수님은 왜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이는 포도나무의 특징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알다시피 포도나무는 관상수가 아니고 유실수에요.

포도나무는 눈으로 보기 좋으라고 심는 나무가 아닙니다.


또한 가구를 만들 목재로 사용하려고 심은 나무도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하여 재배하는 나무입니다.


유실수는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과입니다.

예수는 눈으로 감상하는 분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할 분입니다.


도를 깨우치는 것은 예수를 감상하는 것이고.. 사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절간에서처럼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를 염불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이 열매에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재배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열매를 삶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 삼은 것은

그들을 통하여서 얻어낼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삶이 있어요.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마음으로 살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를 얻지 못해서 찍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로(옛 포도나무)부터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참 포도나무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 ‘포도나무’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지금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해서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을 살피는 중입니다.)


에스겔 15:2~5입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건 열매를 맺기 때문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유실수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삶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종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땐.. 다른 나무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든 민족을 나무로 묘사합니다.

그리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삼림 중 여러 나무’라고 할 때   겔15:2

열매의 가치를 빼면.. 포도나무 보다는 쓸 만한 나무들이란 말입니다.


열매를 빼고 나무의 가치성으로 따진다면, 포도나무는 무가치한 나무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땔감으로도 사용할 가치가 없어요.

(여러분이 시골에 가셔서 포도나무를 직접 봐 보세요. '어떻게 저 나무에서 포도같이 탐스러운 열매가 열릴까?'

 의심스러운 정도로.. 나무가 형편 없고, 구불구불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땔감으로 산에 나무를 하러 많이 다녔습니다.

     땔감으로 사용할 나무는 속이 단단한 것들로 합니다.

     그래야 오래 타거든요. 속이 단단하지 않으면 낙엽처럼 금방 타 버려요.


     넝쿨 식물을 땔감으로 해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칡넝쿨 같아요.


     그래서 포도나무는 화목(火木)으로도 사용하지 않아요.

     열매가 없으면, 넝쿨식물은.. 그냥 모아서 밭에서 불을 지르고 맙니다.


그런데 더욱 참담 한 것은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인데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겔15:4


아니 열매도 못 맺는데.. 거기다가 불에 타다가 말았어요.

온전해도 쓸까 말까하는 하는데.. 불에 타다가 만 것을 누가 쓰겠습니까?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를 탐내는 사람은 없어요.

그걸 어디가 쓰겠어요.

타다가 만 포도나무는 쓰레기에요.


인간적으로 따지면 다른 민족들은 건장하고 힘이 있는데

이스라엘은 중풍병자 같아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포도나무처럼 불이 나면 속절없이 타 버리고 말 그런 나무란 말입니다.

포도나무는 넝쿨이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종이처럼 그냥 확 살라지고 말 그런 나무입니다.

숯불도 남기지 못하고 재로 변해요.


지금 에스겔이 그럽니다.

이스라엘은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민족보다 못하단 말입니다.

그냥 이름 없이 사라질 민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볼품없는 민족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민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단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신명기 7:7~8절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보세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 ‘가장 수효가 작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작다는 것은 무가치 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열등하다는 말입니다.

가장 작다는 것은 남의 나라에 종노릇이나 하는 민족이란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백성이 애굽에 종노릇했어요.

로마 식민지 생활을 했어요.

이게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와 같은 겁니다.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는 ‘저주 받은 자의 상징’입니다.


죄인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모습이에요.


고전1:26~29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약한 것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멸시 받는 것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우리들 모습이 하나님 앞에 이렇다는 말입니다.

자랑 할 것이 아무도 없는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가장 작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했어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을 선택했단 말입니다.

마치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을 선택을 했어요.


스가랴에 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이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이는 곧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불에 그슬린 나무’들입니다.


에스겔서로 말하면,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에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자란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습이 세리와 창기에요.


그러니 꼴값 떨지 말란 말입니다.

자기 주제도 모른 채.. 뭐가 좀 잘 되면.. 꼴값을 떨어요.(교만해요)

그러니 얼마나 목불인견(눈뜨고 못 본다)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내가 보여요.

내 꼬라지(타다가 만 포도나무)가 보입니다.


내가 바로 가장 악한 자이고 인간쓰레기라는 것이 보여져요.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입을 다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죄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 남의 눈에 티를 보고 나무란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요.


▶본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서두에서 모든 역사는 ‘타락’에서 →‘구원’으로 진행됨을 살펴보았습니다.

일례로, ‘저녁(어두움)’에서 →‘아침(빛)’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 그것도 타다가 만 아무 쓸모 없는 포도나무에서> →

<예수님의 참 포도나무>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접붙임 함으로써)

<쓸모 없는 포도나무>에서 → <참포도나무>로 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쓸데 없는 타다 만 포도나무'였지만,

내(포도나무의 가지)가

참 포도나무와 연합, 교제, 동행, 내주함을 통하여..

내 안에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그 열매를 맺어가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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