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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LNCK 2012. 3. 4. 21:18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막11:12~21        인터넷에서스크랩, 정리



본문 설명 : 예수님이 혈기, 성질부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하신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저주의 대상이 식물인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사람을 살리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가장 파괴적이라고 봅니다.

예전에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돼지 떼 2천 마리를 몰살시키기도 하셨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한 영혼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버리게 한 기적>은

예수님이 파괴적인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유일한 사건입니다.

이 기적으로 살아난 영혼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참새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시고, 들풀도 정성껏 키우시던 예수님이

지나치게 과격해지셨다는 오해가 생길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모든 기적, 표적에는.. 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화가 나셔서, 화를 억제하지 못하셔서, 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표적에는 깊은 의미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1. 첫 열매가 중요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무화과나무는, 4월부터 10월까지 다섯 번 열매를 맺습니다.

한 열매가 나고 떨어지면, 또 다른 열매가 나기를.. 5번이나 반복하는 독특한 나무입니다.


*파게

유월절 즈음에 나는 첫 번째 열매는, 크기도 작고, 맛도 없습니다.

이 열매를 가리켜 ‘파게’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 주인은 파게를 내다 팔수 없습니다. 작고 맛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는 모두 따야합니다. ‘파게’를 따지 않으면,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맛있는 무화과가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게’는 지나가는 행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따 먹어도

주인이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파게’를 따 먹어주는 것이 주인을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나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열리는 무화과 열매를 ‘테나’라고 합니다.

‘테나’는 크고 맛있는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열매(파게)가 열리지 않으면, '테나'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게’를 바라셨지만,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막11:1

 

벳바게의 은 집, 바게는 무화과나무의 첫 번째 열매인 ‘파게’를 상징합니다.

베다니는 테나가 합쳐져서 베다니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의미로

그만큼 예루살렘 주변에 무화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지역의 이름으로까지 붙여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기대한 열매는, 조악한 ‘파게’입니다. 

실한 열매 ‘테나’가 열릴 철이, 아직 아니었습니다. ‘철이 아닌지라’ :13


집 주인이, 남들이 따먹어 주기를 바라는 그 ‘돌 무화과 열매’,

그 작고, 아무 맛도 없는 그 열매(파게)를..

마침 시장하셨던 예수님은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무성할 뿐.. ‘돌 무화과 열매(파게)’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14

예수님이 괴팍한 성미가 아니란 뜻입니다. 적어도 '파게'는 열려 있었어야 했으니까요!

더욱이 잎은 무성한데.. 열매(파게)마저도 없었다는 것은, 그 나무에 문제가 많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지역 상황을 모르면 '아직 철이 아닌지라'의 말씀에 근거,

예수님이 성질 부리신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형편없는 첫 열매지만.. 중요합니다.

(그날 아침 식사가 부실했던 것인가요?)

어쨌든 예수님은, 그 조악한 열매라도 바라셨지만..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시자.. 말라버렸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셨으며, 그 의미/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 열매가 열려야.. 두 번째~다섯 번째 열매가 맺힌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팔레스틴 무화과나무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그 첫 열매가 맺히지 않으니..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잎은 화려할 정도로 무성했으니까요!  마21:19


-팔레스틴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는.. 형편없는 열매입니다.

크기도 작고, 당도도 없는.. 전혀 상품성이 없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첫 열매가 맺혀야 (비록 따서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두 번째~다섯 번째 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큰 열매를 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열매라도 맺는 사람이.. 나중에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잎은 무성한데도 불구하고

작은 열매마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분노하십니다. 안타까워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첫 열매는.. 유대민족,

두 번째~다섯 번째 열매는.. 이방민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17)이란 표현은..

예수님은 결국 ‘만민’ all nations을 염두에 두시고, 본문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첫 무화과 열매(파게)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서.. 제2 제3의 열매가 맺어져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비록 완전한 열매가 아닐지라도,

내가 (조악한) 첫 열매가 되면.. 나를 토대로            *조악한: 거칠고 나쁜

다음 사람은 더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실 2천년 교회 역사도,

누군가의 발판을 토대로, 계속 성장하고, 발전해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한 열매는 (부족하더라도)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는 비록 상품가치는 없지만.. 누구나 따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빈자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고 형편없어도.. 작은 사명이 있습니다.


또한 첫 열매가 열려야 다섯 번째까지 열매가 열립니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 열매가 열린 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또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첫 열매의 고귀한 사명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2.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었습니다.


병행구절을 보십시다.

마21:19, 마침 길가에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이 그 나무를 향해

'네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시자 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종교권력을 상징합니다.

본문은 소위 ‘샌드위치 기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빵’처럼 겉을 아래 위로 감싸고 있고,

성전을 청소하신 이야기가 ‘고기(패티)’처럼, 그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막11:15~19   


이렇게 볼 때,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성전 청결’과 관련된 이야기이며,

성전을 관장하는 유대 종교권력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21:19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뿌리부터 마르게 하신 것은, 충격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충격적인 교훈은.. 권력화 되어버린 유대종교를 향한 교훈이었습니다.


종교는 권력화를 멀리해야 합니다.   

종교가, 그 본래 기능과 목적을 잃어버리면.. 종교는 권력을 지향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에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권력화된 로마교회의 부패를 지적했습니다.

어느 때부터 중세종교는, 권력을 휘두르며, 죄와 사망의 왕국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8:15

헤롯이 주는 누룩(여기서는 악영향)인데.. 그것은 ‘권력’이 제일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은, 당시 유대의 권력자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서로의 이익과 윈윈을 위하여

종교와 권력이 항상 ‘인간적인 생각으로’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만..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는 광야에서 5천명, 4천명을 먹인 후에 제자들은..

'무리들을 조직화해서 권력을 갖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 '헤롯의 누룩'입니다.

 

     종교가 어떤 형태이든지, 세속적 권력을 갖게 되면.. 또는 손잡게 되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어서.. 예수님의 저주를 받게 되기 쉽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 영광’에 해롭기 쉽습니다.

 

     기독교는.. 희생, 섬김, 낮아짐, 사랑이지..

     권력의 힘/물리적 힘으로 뭘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마11:17


‘기도하는 집’과 ‘굴혈’이 대비됩니다.

기도 안 하면.. 굴혈이 된다는 뜻입니다.


정직한 기도와 신령한 예배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권력화 됩니다.

교회 내부에서 권력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교회의 갈등은 권력싸움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교회끼리, 교회안의 사람과 사람끼리 권력다툼을 합니다.


교회가 권력화 되면.. 마치 중교가 권력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감추어진 권력의 유혹을 철저하게 제거해야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3. 뿌리가 마르면 안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뿌리를 마르게 하셨습니다. 막11:20 

뿌리가 마른 나무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영적공동체는 뿌리부터 마릅니다.

잎이 무성해서 살아있는 것 같지만

영적인 근원이 말라 버린 것은, 종교의 타락과 영적 공동체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인생도 철을 따라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신앙의 목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참된 종교는 언제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뿌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통해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인생도 철을 따라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뿌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맺히는 것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수 없다” 요15:4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내가 애써 맺는 것이 아니라, 맺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시면..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열매가 맺어집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거나, 헌신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했더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용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 율법적인 종교에 머무르게 되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면 열매 맺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머무르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거짓종교일수록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여서 자꾸 뭘 대내외적으로 해서,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화려하고 복잡합니다. 또 그렇게 화려하고 복잡하게 보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된 신앙은 단순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닮아 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와 함께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가 목표를 세워 행동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