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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내 속에서 과실을 맺으신다

LNCK 2012. 3. 1. 14:48

 

예수님이 내 속에서 과실을 맺으신다             요15:1~11              출처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당연한 원리임을.. 아래 설교문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고,

우리 성도는 그 “가지”이고,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 농사를 짓는 “농부” 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속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속성을 일컬어.. 마음이고 성품이고 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할 이유도 없고,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마7:16

나무와 열매는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15장에서 하나님은, 성도 안에 성령이 오셔서 행하시는 일을

<포도나무 농사 이야기>로 하십니다.


이는 성령이.. 성도 안에서 행하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성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삶을 그려내는 도화지에요.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서 일을 해 내시는데.. 그 일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맺은 열매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과실 맺는 이야기’를 하지요.

농부가 과목을 돌보는 것은.. 과실을 얻기 위함입니다.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은 단 하나..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선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하다는 것은.. 아는 것은 많은데, 삶이 없다는 말입니다.


과목은 과실을 맺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도..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마음대로 살게 하려면.. 우리를 구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귀 아래서는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예수 안으로 옮겨 준 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지 말고, 예수님 마음으로 살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은.. 나의 주인으로 오신 것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고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살려낸 것은

더 이상 옛 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러니 땅에 지체를 죽이고.. 하늘의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된 성도에게는, 간섭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옛날처럼 살면.. 징계를 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날마다 죽임 당하는 겁니다.


우리는 죄 짓는데 익숙해 있어요.

그런데 이젠 ‘왜 죄를 짓느냐’고 닦달을 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차라리 구원하지 말지, 왜 나를 구원 하셨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이건 구약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고 광야로 갖다 놓으니

나타난 반응과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기뻐한 것만 아니고

왜 애굽에서 가만두지 않고 빼냈느냐고... 난리를 쳤어요.


한마디로 자식들이 부모가 간섭하면

‘왜 날 낳아서 귀찮게 하느냐?’고 막말을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 몸뚱이는.. 애굽이 좋고, 광야가 싫어요.

그러니 광야에선 터져 나오는 것이 ‘나 가나안으로 안 갈래!’ 라고 반항하는 겁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던 예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사는 신앙생활이.. 훨씬 고단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죄를 끄집어냄과 동시에, 예수님의 삶을 살도록 하세요.

한 쪽에선 죄가 터져 나오게 하시고,

한 쪽에선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린 죽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므로

내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니까.. 우린 죽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삶을 일컬어

오늘 본문에선 ‘과실을 맺는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취해 내신 과실이에요.


농부는 가지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면 흐뭇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닦달해서 공부 잘하면 흐뭇해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실을 맺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8


과실을 우리더러 맺어서.. 제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과실을 맺는 자가.. 제자란 말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니 ‘내 제자가 맞구나!’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니 ‘너희 안에 예수가 있구나!’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올바로 접붙임 당하였으면, 반드시 과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안에서 맺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실을 많이 맺게 되면,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충만케 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실을 맺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거하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7절에서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된다” 고 합니다.


과실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저절로 맺힙니다.


“거한다”는 말은 “동거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 자리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머물게 한 그 자리가 있습니다.

옮겨 놓으신 자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옮겨 준 그 자리가 어딘가 하면 바로 “예수님 안”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주셨고!

신약의 성도는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구원이란.. 자리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우린 원래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 있을 땐 우린 아담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담의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옮겨지고 보니,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조롱당하고!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고!

예수님처럼 죽임 당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처럼 아버지 뜻에 복종하게 하세요.


이게 예수님이 맺게 하는 과실이에요.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이런 삶을 살았고,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성화는 불가능하다고요? 그런데 주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야곱을 보세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맞짱 뜨잖아요.


씨름 할 땐 이긴 것 같지요.

그러나 실상은 졌어요.


허리가 분질러지고, 지팡이를 의지하는 병신이 되고 말잖아요.

야곱은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천국에 들어갔어요.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 덤비다가 얻어맞은 흔적입니다.


우린 야곱입니다.

말을 안 들어요.


하지만 말을 듣고야 맙니다.

예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케 하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마치 인형극에서 인형 속에 손이 움직이듯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십니다.


그건 우리의 움직임이 아니고,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이걸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맺게 되는 과실'이라고 합니다.

과실(果實)이란.. 나무가 이루어낸 결과물이란 뜻입니다.


나무가 열심히 생산해낸 결과물입니다.

가지가 아니고, 나무가 생산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럼 과실은.. 예수님이 생산 해 낸 결과물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내신 것들입니다.

우린 가지처럼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맺은 열매는

옛 사람의 소욕은 십자가에 죽이시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맺는 열매(熱媒)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삶'을 다른 말로 ‘행함’이라고도 합니다.


과목을 접붙임 하는 농부들의 말을 빌리면

접붙임을 하면 그 해 바로 좋은 과실이 맺히는 것은 아니고

3년에서 ~ 5년 후부터 열린다고 합니다.


들 포도의 성질을 참 포도나무가

3년에서 5년 동안 서서히 자기 진액을 공급해서 밀어냅니다.


그래서 5년 후가 되면, 비로소 참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상품 가치가 되는 괴실은.. 5년 후에나 열린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구약에도 나옵니다.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레19:23~2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과목을 심거든.. 3년 동안은 열매를 맺더라도 먹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3년이 안 된 열매’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년이 되면 거룩해 지고,

5년이 지난 후에 맺는 열매는 할례를 받은 것이니 먹으라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과실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의인화(擬人化) 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살펴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접을 붙인 셈입니다.


그런데 3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열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5년 된 과실이라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화가.. 그냥 즉각 이루어지기 보다는

최소 몇 년은 걸린다는 뜻입니다.


열매가 접붙임했다고, 즉시 그 해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접붙임 해도.. 3~5년 지나야.. 비로소 열매가 맺히듯이

성도의 성화도.. 몇 년 오랜 시간에 걸쳐.. 열매가 서서히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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