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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삶도 험난합니다

LNCK 2012. 3. 21. 09:06

◈신자의 삶도 험난합니다.      창47:9       설교일부스크랩, 출처보기 



세상 죄인으로 살다가, 예수 믿고 신자가 되면.. 당장 삶이 좀 편해질 줄 알지만..

결과는 평안이요, 예수 안에서 생명이 풍성한 삶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편치 않습니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십니다. 


탐욕으로 가득찬 인간은, 소유가 더할수록 고민도 더해집니다.

만족한 것이 아니라 목마릅니다.

탐욕은.. 이상하게 눈사람처럼, 굴리면 굴릴수록 커져만 갑니다.


사람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무저갱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늘 목마르고 늘 부족함으로 불행해 합니다.

결국 자신이 키운 그 탐욕에 깔려 죽어갑니다.


부자가 자살을 하지, 가난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자기를 망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탐욕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십니다.

어떻게 벗겨 주시는가 하면, 탐욕에 사로잡힌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여서 망하게 해서 벗겨주십니다.


그런 방식으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하나님은 정과 욕심이 버려지는 죽임 당함 속에 평안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름하여 ‘십자가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죽음 (망함) 안에서 쉼’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쉼을 주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게 함으로써 벗겨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서 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여서 쉼을 주시겠답니다.


결국 세상에서 살고자 수고하고 무거워하는 탐욕으로 가득찬 죄인이라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그 실제적 방식은 세상에서 망하게/안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십자가에 죽고 나서, 잘 됩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

누가 이 역설의 의미를 알까요?


하나님은 항상 이런 역설로 자기백성들을 다스려 왔습니다.

이 역설 속에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운명을 담아 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 것을 주는 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세상이 싫어지도록 간섭합니다.


우리 스스로 탐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나를 괴롭히는 ‘탐심’이라는 형벌을 벗겨주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탐 하는 것을, 오히려 빼앗아 감으로써.. 벗겨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살이가 지긋지긋해야 합니다.

세상이 꼴도 보기 싫어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하여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 종살이 고역으로 인하여 ‘주여 살려 주세요!’라고 부르짖은 것 같이

성도들도 ‘주여 빨리 세상에서 제대 시켜주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살기 좋으면 안 되어요.

그건 저주에요.


목사도 하기 싫어야 해요.

목사 노릇하기 좋다고 하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대접받고 살만 하니 그런 겁니다.


바울처럼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욕을 먹고 한다면.. 누가 목사 노릇을 하고 싶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못할 짓이에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에게 등 떠밀려서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하다가, 경제적 파산을 하였습니다.

도저히 회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도박에 더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손실만 더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안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에겐 야속하겠지만 말이에요.


도박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 준다는 것은

그 수렁으로 더 밀어 넣는 것입니다.


가진 돈을 빨리 탈탈 털게 하여서, 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입니다.

도박을 예로 들었지만,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역사하셔서, 성도를 세상에서 정을 떼게 만드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바로 탕자이고, 세상이라는 도박판에 빠져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습니다.


진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박에서 발을 빼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자면 돈 줄을 끊어야지요.


돈을 달라고 하여도 주지 말고, 욕을 하여야지요.

적극적으로 그가 가진 모든 돈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 빼앗기는 과정을 통과한 후에,

물질의 사명/은사를 받아서, 새롭게 회생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물질을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려워하며 사용하는 분입니다.


인생살이가 이상하게도 소유가 더하면 더할수록, 편해지는 것이 아니고

수고와 무거운 부채만 가중됩니다.


전도서 기자가 그럽니다.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자지만 부자는 그 부(富)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상을 알면 알수록 세상에 노예가 됩니다.

돈을 알면 알수록 돈에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 악이 활개를 칩니다.


원수들이 들끓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이런 부채를 경감시켜주시려고

하나 둘 야금 야금 빼앗아 가십니다.


마치 야곱이 자기방식으로서의 성공신화를 써서 금의환향하는 것을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씨름하여 그 동안 쌓은 것을 허무는 작업을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에게 얻어맞고 난 후

20년 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20년 동안 헛고생만 한 것입니다.

손에 하나도 잡지 못한 안개 같은 인생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인생은 안개 같은 것’을 가르치려고

20년 동안 가만 두신 겁니다.


야곱이 이제 성공 했어! 라고 의기앙양 하여 귀향을 할 때

하나님이 놀부처럼 나타나서 야곱의 인생을 헝클어 버립니다.


지금까지 쌓았던 것을 허무는 인생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다스려가는 방식입니다.


야곱은 결국 죄인의 인생이란.. ‘험악한 세월’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이란..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창47:9


그래서 세상에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바로 왕에게 가서

‘인생은 별거 아니다!

세상 영광이란 잠간 피다가 사라질 들에 꽃과 같은 것’이라고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과 같은 인생을 성경에선 복 받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죄인의 인생이란, 결국 전부 버려지고 빼앗기고 삭제당하는 인생인 겁니다.

그래서 빨리 빼앗기는 것이, 빨리 새사람으로 출발할 수 있으므로,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야곱과 같은 방법으로, 동일하게 다스려 가십니다.


과거에 신성종 목사님이

세미나 강의 중에 감명 깊게 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신학을 알려고 철학을 12년 동안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철학이 도리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데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젠 12년 동안, 그 배웠던 철학을 빼내는 일을 하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철학의 허구성을 알리려고 철학을 하였는데

도리어 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철학으로 해석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젠 철학을 빼내는 싸움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참석하신 목사님들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면..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만큼 그 앎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 그 말을 참으로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제 신앙으로 적용해 보았습니다.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내 이력서를 채워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뭔가 남들보다 좀 더 화려한 스펙, 이력서를 갖고 싶었고, 그걸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쌓았던 그 세월만큼이나

채웠던 이력서를 지워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릇된 사상을 버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팔자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죄’인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을, 세상으로 자꾸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악’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기 때문에

눈만 뜨면 ‘자아 확장’을 꿈꾸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만나서 말이에요.

얼마나 웃깁니까?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자기가 저주 받은 죄인인줄 모르고, 능력 받아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설쳐 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찌 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다 빼앗깁니다. 나중에 회복되어도..



◑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안 되는지를.. 알아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왜 죄인을 만나 주지 않는지에 대하여서도.. 살펴보기로 합시다.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지도..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고 문을 걸어 잠가 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을 했을까요?


선악과를 따 먹었더라도 그냥 용서하고 함께 살면 안 됩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용서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매정하게 집에서 쫓아내고, 저주를 하시느냐 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아담은 ‘부모와 자식관계’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였다고 해서 저주 하느냔 말입니다.


아무리 미물 같은 동물이라고 하여도, 자기 새끼를 죽이고 저주하는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물(하찮고 작은 동물)들도 하지 않는 그런 일을 하셨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에서 쫓아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

천사들로 하여금, 행여 들어 올까봐, 불철주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아니 아무리 자식이 잘못 했다고 하여도, 어떻게 집에 못 들어오게 합니까?

그것도 경비원을 시켜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라고 합니까?


이런 하나님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하나님을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과연 우리가 사랑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상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법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계산된 사랑법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철저히 응징하는 사랑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모 자식이라도, 일가친척, 형제나, 이웃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자기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하면.. 미워하고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잘못하였다고 저주하고 집에서 쫓아내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힘이 너무도 커서 내가 이기지 못하여

혹시라도 미움을 받으면, 내게 화가 될까봐서,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또한 인간들도, 자기에게 힘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땐, 다 얻어 낼 것이 있어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 계산된 자기 유익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뭔가 도움을 입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탐심입니다.

이걸 성경은 우상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교회에 바퀴벌레가 보여서 소독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동안 바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바퀴가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소독을 했습니다.


저는 바퀴가 교회에 서식하지 못하도록 소독을 하고, 눈에 보이는 족족 바퀴를 죽입니다.

교회에 바퀴벌레가 살지 못하게 하려고, 저와 바퀴벌레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바퀴벌레와 함께 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과 동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거룩과 非거룩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죄송하지만 이해하시고 들어주세요 바퀴벌레와 같습니다.

철저하게 사라져야 할 대상입니다.


눈에 보여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하나님 눈에 얼씬 거리면 죽임 당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시고 문을 걸어 잠그고, 얼씬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 이걸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만나서 자기들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인들의 소원을 들어 준다면, 죄인이 번창하게 됩니다.

가만 두면 바퀴벌레처럼 온 집을 엎드러지게 합니다.


이걸 어찌 허락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선 죄인은 진멸 대상인데, 어찌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도리어 죄인의 소원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소원을 일절 들어주지 않기 위해서, 추방을 해 버린 겁니다.


아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사랑을 몰라요.

도리어 야속하게 느껴져요.


※그럼 예수를 믿고서, 아담 안에서 → 예수님 안으로 옮겨진 신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새 신자는, ‘법적으로 의롭게 인정’되었지만, 아직 아담의 옛 습성이 몸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담의 옛 습성이 점점 성화/성숙될 때까지..

  아버지의 사랑의 우산 속에서, 아버지의 징계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성화되라고.. /편.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거룩과 부정이 공존하면 부정이 죽습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 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 빛이 어둠과 분리하는 것이, 빛으로서의 사랑이고, 어둠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이고, 범죄한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끼리 살라고

아담을 산 자들이 사는 에덴동산에서

죽은 자들이 사는 세상으로 추방을 하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 턱이 없습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왜 쫓아냈는지는 모르고

그저 쫓겨낫다는 것으로만 하나님께 ‘너무 합니다!’ 라고 합니다.


너무하다고 하면서도 틈만 나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밤새워 기도하면서 만나 달라고 합니다.

인간의 소원대로 하나님이 만나주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면, 하나님은 더 꽁꽁 숨어 버립니다.

‘죄인에게 숨어 계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