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 무불위 갈6:6 출처 모두 스크랩 글
저는 청년 때 노자를 참 좋아했습니다.
노자의 사상을 흔히 무위 무불위 (無爲 無不爲)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님’
(즉 못 하는 것이 없는)을 뜻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아니지만, 무불위적인 무위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사람.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
-존재로 말하는 사람.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마 세 번 째 사람의 삶과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은퇴가 한 4년 정도 남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말과 행동으로 살았다면 (정말 말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벌렸습니다.)
은퇴 후에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과 행동을 하지 않아도
존재가 말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삶에서 풍기는 예수님의 냄새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노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삶이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가 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위(無爲)라는 말이 저는 참 좋습니다.
쓸데없는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無爲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은퇴 후에도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은퇴했으나, 여전히 지배 구조를 장악하고, 은퇴 전 보다 더 활동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無爲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삶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에도 힘은 발휘되지만,
그 보다 더 크고 무서운 힘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발휘 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당하실 때)
구태여 천사가 발 붙들지 않아도, 높임을 받지 않아도, 영광을 받지 않아도,
이름이 더 높아지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을 때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싸리비’ 붙들고 씨름하지 맙시다. 출처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시대이다. (분주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
그런데 저녁이 되어 그날의 일들을 뽑아보면
딱히 한 일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고 스산해진다.
바쁘게 지내지만 의식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 시차로 말미암아 의식은 분열 일보직전이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규정했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이
과도할 정도로 자기를 몰아붙이고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는 사회,
성과를 통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소진되고 마모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만성적 피로,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의 증가가 만연하다.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있다.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눈을 뜨면 된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밤길을 가다가 도깨비를 만나 씨름을 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도깨비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기력이 소진되어 포기하려는 찰나..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도깨비가 황급히 달아났다는 것이다.
정신이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니, 자기 옆에 싸리비가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싸리비를 도깨비인줄 알고, 밤새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싸리비 : 싸리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길다란 빗자루. 여기서는 보잘 것 없다는 뜻.
다소 허망한 결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절묘하고 오묘한 이치가 숨어있다,
▲우리가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있는 대상이 겨우 싸리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된 때는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여명이 밝아오는 때였다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아니 우리가 차마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하찮은 것(싸리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명이 밝아오듯이 우리마음에 등불 하나 밝혀지면
과도한 욕망에 바탕을 둔 행복의 꿈이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데만 분주하지 말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데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이다.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6:6 출처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6:6
*위 구절에서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가
물질을 함께 하라는 뜻인지, 성경적 교훈을 함께 하라는 것인지 헷갈립니다만,
일차적으로 말씀, 신령한 교훈을 서로 깊이 있게 교제/나누라는 의미이고,
거기에는 일부(5%) 물질적 교통도 포함될 것입니다.
비슷한 용례, 단어로 쓰인 다른 구절들은, 대부분 ‘말씀, 교훈을 함께 나누라’는 뜻.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반드시 가르치는 자가 있고 가르침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은 성경을 끼고 다닌다고
아니 몇 천 번 읽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계시의 영을 가진 사람이
그 시대 공통된 신학의 어휘로 가르칠 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다’는 말과 같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만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고,
다른 모든 사람이, 다 그 앞에 줄을 서야 한다는 말은 잠꼬대입니다.
▲그리고 어떤 한 특정인에 의해 세계선교가 될 것 같은 꿈은
빨리 깨는 게, 그 꿈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사실은 세계선교가 이미 거의 이루어졌습니다.
(일부 소수 부족을 제외하고는) 성경이 거의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다만 성경을 풀어주고 가르치는 선교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걸 어떤 사람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통해 세계선교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 방법과 전혀 딴 판입니다.
주의 보내심을 받은 종이
복음의 교과서인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서 가르치면
성령께서 엄청난 비밀의 파일을 풀어주시므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또 성경 교사가 됩니다.
▲그만큼 가르치는 자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누구한테 배우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께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교훈이나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겁니다.
그 분의 가르침과 그 분의 삶에 의해
자신이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와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통해 자신의 구원과
구원 받은 그 이후의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배웁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다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의 영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만약 아니면 그건 성경을 가르치고 배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 관한 내용(지식)만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받아, 그를 아는 자(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제자)은
가르치는 자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좋은 것이.. 반드시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갈6:6
그게 가르치는 자에게 가장 귀한 대접입니다.
빛의 사자라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빛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생명의 종이면.. 제자들이, 생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뭐 가르치는 자에게 온갖 좋은 것을 갖다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건 아주 치사한 삯군입니다.
가르치는 자에게 배우는 자로서 최상급의 대접은
그 가르침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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