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천년동안 왕노릇이란? 계20:4 계시록89강설교스크랩, 일부녹취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계20:4
지난 회 ☞성도의 천년 동안 왕노릇 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설교문
▲‘하늘의 왕노릇’은, 듣기 싫은 내용
이런 설교를 계속 하면, 교회에 성도들이 자꾸 떨어져 나간다.
‘예수 믿는 것이, 뭐 세상에서 바보 되는 것이냐?’ 하면서 불만을 토한다.
‘아니 한 두 번이지.. 매주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한다니..’
그래서 이런 복음적 설교가, 계속 사람을, 우리 교회에서 내쫓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므로.. 나는 어쩔 수 없다.
진리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초의 하늘의 왕노릇 - 아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다스리도록 왕을 세우셨는데, 아담이다.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왕에게 쓰는 단어이며,
또 그 단어가 똑같이 구약의 제사장에게도 그대로 쓰였다.
아담은 에덴의 (하늘의) 왕이며, 제사장이었다는 뜻이다.
그 왕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때만,
만물을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왕이었다.
그게 바로 절대 상위권자이신 하나님 아래서
만물을 다스리는 하늘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하늘의 왕, 하늘나라의 왕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쫓아가는 것,
이게 하늘의 왕노릇이다.
내가 힘을 과시하고, 내가 내 힘으로 뭘 해보는.. 왕이 아니다.
그런데 그 왕이 하나님께 반역했다. ‘왜 꼭 당신이 내 위에 있어야 하는가?
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선택에 따라, 내 삶을 개척해 보고 싶다.’
-이게 세상의 왕노릇, 땅의 왕노릇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의 왕노릇은, 세상의 왕노릇과 정반대이다.
▲죄란?, 구원이란?
인간의 죄란,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강함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그 (죄의) 뿌리이다.
자기가 이 땅에서 왕노릇 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다시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 원래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라는.. 하늘의 왕노릇을 하는,
그 최초의 에덴동산 아담에게 주어졌던 왕노릇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적으로 살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분께 철저하게 순종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거기(하나님을 의지하는 왕)로 끌고 가신다. 그게 하늘의 왕노릇이다.
◑역사의 두 흐름 즉, 하늘의 왕 노릇 과 세상의 왕 노릇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그 세상의 왕노릇을 추구하는 자들과,
하늘의 왕노릇을 추구하는 자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계신다.
이것이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 가인과 아벨
가인이, 자기 힘으로, 아벨을 고의적으로 때려죽이고, 하나님께 쫓겨나서
(성도는 세상에게 힘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힘으로 그들을 눌러주는 게 아니다.)
제일 처음 한 것은 ‘성을 쌓은 것’이다. 그 성의 이름이 에녹성이다. ☞ 전쟁과 평화
그러니까 죄란, 내가 내 힘으로, 나를 스스로 보호하겠다고 힘을 쌓는 것,
그것이 죄의 시작이고, 뿌리이다.
그렇게 세상 힘으로 성을 쌓아서, 자기 힘으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상인 그 아담이 지은 죄의 내용을 유전해서,
뿌리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게 바로 인류의 全역사를 판단하는 시대정신인 힘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그 힘의 원리 속에 빠져있는 자들,
세상 풍속, 불순종의 영이 지배하는 곳..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끌어내신다.
그래서 자기를 약하게 만들어, 자기를 비우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게 만드는 것이.. 구원이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어 힘을 얻고, 자기 힘을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마귀가 끌고 가는 곳으로 좇아가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는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절대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2. 하늘의 왕노릇 한 노아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자신의 힘을 쌓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혼하고, 소도 사고, 농사짓고 할 때,
노아와 그 식구들은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바보처럼 배를 만들고 있었다.
120년 동안 검은 먹구름 하나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 바보들을 보라!’며 놀려댔을 것이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 힘을 쌓는 동안에, 산꼭대기에 배를 짓는 바보 짓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참 약해 빠진 자들이네, 도대체 저 시간에 공부해서,
일을 해서 힘을 쌓지.. 왜 저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느냐?’며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의 성도 노아는,
세상 힘을 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세상 힘을 주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시가 아니라,
섬김을 위해 주셨으므로, 청지기처럼 잘 사용하면 된다.
다만 그 세상 힘을.. 휘두르거나.. 애써 추구하거나.. 탐닉하지 않는다!
▲3. 세상 왕 에서와, 하늘의 왕 야곱
하나님은 야곱을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택하시고, 복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야곱은 실제로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에게서 그 장자권 축복을 가로채었다.
야곱은 복을 빼앗으므로, 복을 반드시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진짜 복 받은 사람은 에서이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려고 할 때, 에서가 4백인의 사병을 데리고 나온 것을 보면,
어쨌거나 그는 큰 재력가이었거나, 능력 있는 부족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내가 나그네 인생길에 험악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에 걸맞게, 그는 절뚝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복인가!
진짜 ‘세상 복’을 받은 사람은, 에서이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다 살았고,
그런데도 부자이거나 유력한 사람이 되었고, 세상 힘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그것도 태어나기 전부터!
얍복강가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야곱은 남은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았다.
지팡이 짚고 다녔다. 이게 어디 복 받은 사람인가?
성경이 말하는 복은,
내가 나의 꾀로 나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잘 먹고 잘 살아보려 하고,
자기 힘을 쌓으려고 했던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환도뼈를 쳐서 죽은 자처럼 만들어 버리고,
평생 절름발이로 만들어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성경적 복이다.
그게 하늘의 왕노릇이며 .. 하나님이 거기로 우리를 끌고 가신다.
‘나God만 의지해, 내가 할게!’ 그게 하늘의 왕노릇이다.
▲4. 이스라엘 왕의 조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절대 다른 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가장 노하셨을 때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민족에게 도움을 구하러 갔을 때,
하나님은 무지하게 진노하셨다.
신17:16~17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시면서,
왕은 말을 많이 가지지 말고, 아내와, 은금도 많이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고대시대는 말馬이 곧 힘의 상징이었다.
몽골이 세상을 정복했던 이유, 또한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 세상을 재패했던 이유도
전부 기병으로(속전속결로) 세상을 정복했던 자들이다.
'말은 세상 힘의 상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에게, 말을 많이 갖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왕보고 ‘차 포 떼고, 장기 두라’는 말과 똑 같다.
세상 힘을 절대로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말도 많이 없고, 은금이 없는 왕이.. 무슨 왕인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뜻도..
주변국과 정략적 관계(정략 결혼)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서.. 자기 힘을 삼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 힘의 근원을 다 차단해 버리신다. 내가 하시겠다는 것이다.
‘힘을 빼라. 오히려 약해져라.
그러면 진짜 강한 내가 너희를 통해서 일할 게 그게 정말 진짜 강한 거야!’
약할 때 강함 되신다는 것이 그런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저마다 내가 높아져야 하고, 내게 자랑거리가 있어야 되고,
내가 뭔가 하려고 하니까, 자꾸 문제가 생기고, 티격태격 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이게 하늘의 왕노릇이다.
▲5. 기드온과 3백용사도 마찬가지다.
미디안의 군사 십수만이 칩입해 왔는데,
3만여명 겨우 모았는데, 2만명 돌려보내고, 1만명 겨우 남았는데
물을 마시는 모습에 의거해서 3백만 남기고, 다 집으로 돌려보냈다.
혹자는, ‘물 먹을 때도 경계심을 발휘해서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물을 먹은 사람이, 진정한 용사다’
그들이 바로 <기드온의 3백용사>로 뽑혔다고 말하는데,
저는 다르게 해석한다.
하나님이 그들 3백명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숫자가 작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9천7백 명이,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물을 마시고,
3백 명이 물을 엎드려 마셨다면, 그래도 하나님은, 그 3백명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물 마시는 자세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은 (약한) 소수를 선택하셨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3백명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작은 자들을 들어서,
어떻게 그 십수만 명을 물리치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지,
용사 3백명이 ‘일당 천’으로 적군을 물리쳤다.. 이게 핵심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좀 무능한 자들을 택해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그런데 인간의 유능함, 인간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퇴색되고, 가려져 버린다.
<기드온의 3백용사>들은, 노골적으로 말하면 죄송하지만 ‘3백 약골’들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약해지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드러난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전쟁은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 때도,
히스기야 왕 때,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을 때..
그 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친히 공격하셔서 이겨버리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상의 헛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나만 의지하라,
그 때 너는 진짜 강한 천국의 왕노릇을 하게 된다’고 계속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최초의 왕노릇으로
그들을 계속 역사속에서 부르고 계신다.
▲6. 하늘의 왕노릇 하신 예수님과 사도바울
그 삶을 이 땅에서 모델로 보여주고 가신분이, 바로 예수님이요, 사도바울이시다.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이게 하늘의 왕노릇이다.
새하늘과 새땅의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아가야할,
새하늘과 새땅의 또 다른 왕들인 우리 성도가
어떻게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형으로 미리 보여주셨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약한 모습으로,
깨어지는 질그릇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 질그릇의 영광이 아닌,
그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질그릇에 도금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 깨어지고, 그 안에 예수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보고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여러분의 힘과 자랑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시면.. 그것을 남을 섬기고, 공익을 위해서 쓰면 되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나는 단지 청지기입니다.’
이 삶을 살아내면 여러분, 절대 그것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 성도들이 천년동안, 우리의 인생동안
우리가 그 제사장적인 왕노릇을 하게 된다고 명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군림하고, 지배하며,
(세상의 왕처럼)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다... 고 가르치는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자!
제가 예전에 '민족사관고등학교'에 한 번 가봤는데
그 학교 앞에 <신에게 복수하자>는 글귀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무슨 뜻인가?
‘신이 우리의 운명을 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것을 다 깨자’
는 것이다.
성경과는 반대다.
▲지난 번 기독교 방송에서, 어떤 교회 설교를 들었는데,
그 목회자의 설교 논리가 이랬다.
자기가 많이 못 배우고 무식하다. 또한 잘 나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지금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해서, 교회의 이런 성장을 이루었으니
‘나를 보라!’는 것이다. 내가 받은 축복을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도, 나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내가 증거요, 모델이니까)
여러분과, 그 자녀들도, 장차 큰 인물, 큰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면, 이럴 수 있다.)
어쩌면 그렇게 바울이 말씀한 것과 정확하게 반대가 되는지...
바울은 내가 약할 때,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약한 자로 보여질 때,
내 속에서,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게 바로 성도의 강함이요, 성도의 왕노릇이라고 말했는데,
어떤 목회자들은,
내가 강함으로.. 하나님의 약함이 드러나게 되는
‘거꾸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게 바로 구약 내내 경고되어진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은 혹시 아닐까?
▲하나님은 절대 이 세상의 힘의 논리, 물질주의, 성공주의에 편승해서
기적과 이적을 동원해서, 성도들을 축복하지 않으신다.
(기적과 이적도.. 그 목적이 부자되고 성공하자는 것이다.
기적과 이적을 통해서, 가난하고 낮아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겸손의 자리, 낮은 자리, 비움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의 왕노릇인 것이다. ←설교 제목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와서도, 그저 <세상의 힘>만 추구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줄 수 있다는 가짜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받으려고, 그 설교자들을 황제 대접을 하며 섬긴다.
그 가짜들이 유혹하는 ‘성공과 축복’을 받으려고!
과거에 한국의 무당들이, 굿을 요청하거나, 점을 치러온 사람들에게
‘하대’라고 하면서 무식하게 반말을 해 댔다. 下待
무당은, 자기가 지금 신적 권위로, 그 의뢰인에게 막말, 반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샤머니즘적 영향이, 일부 교회로 침투해서,
일부 부흥사들이, 늙은 성도님들에게, 무조건 반말과 半욕설로 일관했던 적이 한 때 있었다.
그래도 성도들은, 오직 복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반말과, 반욕설을 다 들었던 것이다. 이건 샤머니즘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고후11:19~20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 교인들은, 약함의 모습으로 자기들을 섬기던 사도바울은.. 푸대접하고
자기들에게 ‘세상 힘을 주겠다며,
인간 본능적 가르침을 가르치던 거짓선지자’들은.. 아주 상전 받들듯이 떠받들었다.
그들에게 따귀를 맞고도, 교인들이 꼼짝 못했다는 것이다.
살후2:9~12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능력, 거짓 기적
-이것들은 그 궁극적 목적이, ‘기복주의, 성공주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획득한 힘과 능력을 의지하게 한다.
그 거짓 표적과 기적을 통해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자기를 부인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 표적의 목적이나 결과는.. 결국은 자기 과시인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
하나님이 심판 하시려고.. 계속 그대로 놔두신다. 살후2:11
▲이렇게 해서
힘을 좇고, 힘을 쌓으려는 신자들에 의해, 가짜 지도자들이 만들어진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왕이면 기적도 일으키고, 병도 낫게 해 주는 목사가 힘 있는 목사로 대접받고,
이왕이면 사람도 많이 모으고, 어쨌든 인기 있는 목사가 되어야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성도를 속여서,
자기는 일반 목회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능력의 종’ 행세를 하는 것이다.
진짜 일반 목회자들과 다른 ‘능력의 종’이 있겠지만, 그의 특징은 겸손이다.
자기 스스로 다른 목회자들과 다른 능력의 종으로 생각(착각), 스스로 홍보하는 자는
그건 벌써 미혹된 것이다. ‘(마귀가 주는) 능력의 종’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미혹에 빠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특별한 능력의 종’으로 홍보해야,
성도들이 자기를 벌떼처럼 따르기 때문이다.
‘나도 저 종처럼 믿어서, 저 종처럼 세상에서 한 번 보란듯이 성공해 봐야 되겠다!’ 한다.
세상의 힘에 대한 죄인들의 탐욕이
목회자 스스로 자기 힘을 과시(홍보)하게 만들고
또 성도들 스스로, 그 힘을 추종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그 세상 힘, 자기도 좀 얻게 해 달라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또 죄를 짓는데,
그래서 우리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그 피를 철철 흘리고 계신 예수님 앞에 가서, 예수님 고통스러워하고 계시는데
‘예수님, 당신이 죽는 것은 내가 상관없고 당신께 힘이 있다는데,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라고 간청한다.
예수님 우리 죄 때문에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데,
예수님 앞에 가서 ‘내가 올해는 소원이 있어요! 그 소원 꼭 들어주셔야 해요!’ 하고 생떼를 쓰고 있다.
낮은 자리, 약해지는 자리, 겸손한 자리, 비워짐의 자리.. 그게 하늘의 왕노릇이다.
우리가 오늘부터 그것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 안 한다고 욕하지 말고,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하면 된다...
............................
(관련글 / 펀 글)
가톨릭 계의 교회사학자 중에 알란 슈래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가톨릭 교회사라는 의미있는 책을 썼는데 제목과 달리
가톨릭계 뿐 아니라 개신교 쪽에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었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힘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쓴 내용이 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가톨릭 교회가 큰 힘을 얻었을 때는
세 차례 큰 사건을 겪은 후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즉 어떤 사건을 치른 후에 가톨릭 교회엔 새로운 힘이 생겼다는 것인데
그 내용이 우리 개신교 쪽에서 볼 때는 아이러니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1) 가톨릭 교회가 새 힘을 얻었던 첫 번째 사건은 종교개혁 때라는 겁니다.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루터고 칼빈이고 다 반역자요, 사건 자체가 아프고 쓰린 일일 텐데
오히려 그것이 교회가 새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깊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됐다는 거지요.
그리고 선교정책에 수정을 가하는 전환점이 됐다는 겁니다.
그 첫 번째 열매가 바로 <예수회>의 결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당시에 동양으로 보냈던
두 선교사의 이름만 들어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이 뿌린 씨앗으로 우리나라에도 천주교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선교정책이 바뀌면서 교회는 더 가난해지고 순수해졌던 것이
교회에 새 힘을 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가톨릭 교회가 새 힘을 얻게 된 것은,
1870년 로마교황청의 교황 명령권이 중부이태리에서 발생한 군사력에 의해
탈취되었을 때라는 겁니다.
그 동안 가톨릭은 종교단체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 세력으로 군림했었는데,
그 힘이 새로 생긴 힘에 의해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교회와 국가와의 기나긴 연대가 끝나자
교회는 가일층 분명하게 본연의 임무인 영성 계발에 초점 맞출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것은 분명 축복이요 은총이라고 썼습니다.
3) 세 번째로 교회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사건은,
20세기 초 이태리를 통치했던 무솔리니에 의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모든 땅을 빼앗겼던 때라는 것입니다.
무솔리니는 로마 가톨릭의 땅을 바티칸으로 축소시킨 장본인입니다.
가톨릭은 로마 전체의 땅을 다 소유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독재자에게 땅을 다 몰수당하고 단지 그 조그만 바티칸 안으로 쫓겨갈 때,
교회로서는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은총이었다는 겁니다.
그 동안 가톨릭은 지상왕국을 소유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에 종말을 가져오게 해 주었으니 어찌 축복이 아닐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 사건으로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힘을 잃었지만
진정한 하늘의 힘을 얻은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가 세상적인 힘을 깡그리 잃고 영성에 관심을 쏟을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는 것을 간파한 역사학자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에서 돕는 사람 (0) | 2012.04.12 |
---|---|
백성들은 양식을 준비하라 (0) | 2012.03.29 |
성도의 천년 동안 왕노릇 (0) | 2012.03.27 |
계시록에 3번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 (0) | 2012.03.25 |
나를 본 받으라 (0) | 2012.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