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막1:1~8 12.03.11.설교스크랩
◑우리는 Doing을 생각하지만, 세상은 교회의 Being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교회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사회를 향한 기능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는 소리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입니다.
사회를 바로 잡는 소리는 아무 때나 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서, 사람들이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 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영적 권위에서 오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힘이란,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세워줄 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숙된 모습과 영적 권위에서 나오는 힘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한 번 외칠 때,
세상이 놀라고 반성하고 두려워하고 긴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상을 향해 외쳤더니, 놀라고 긴장하기는커녕
‘너나 잘 하세요’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그건 뭘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만큼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권위는커녕 존경이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다만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인 겁니다.
▲사회를 향해 아무 말도 못하고,
한 번 맘먹고 힘 있게 외쳐도, 거기에 아무 긴장도 하지 않는 사회!
그런 시대에 우리들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만큼 이 사회가 악하고 문제투성이라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옛날 아모스 선지자가, 사악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해 정의를 외쳤을 때도,
요나가, 니느웨의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을 때도
그들은 이토록 싸늘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몹시 악하고 잔인한 백성들이었지만
선지자가 외치자..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불안해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런 반응이 없는 것은
이 사회가 고대사회보다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씀 드리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교회가 점점 신령한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왜 점점 신령한 힘을 잃어가고 있을까요?
교회의 핵심인 교인들은.. 왜 점점 영적인 힘이 빠져 갈까요? ←문제 제기
오늘 말씀은 거기에 대한 답을 찾자는 겁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세례 요한은,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보면,
세례 요한은 힘 있는 교회와, 영향력 있는 성도의 롤 모델이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예수님 직전의 선지자요 예언자였고, 광야에서 살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고,
후에는 헤롯왕에게 목이 잘려 죽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살았던 시기는 그리 평온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기다리는 메시야는 오지 않고, 조국은 로마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며,
때를 따라 보내 주었던 예언자는 400년 동안이나 출현을 멈췄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기였음에도
그가 던지는 한 마디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가 외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람들은 회개했고 환호하며 따랐습니다.
또 그가 외치는 말에, 헤롯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의 그 권위는 어디로부터,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세례 요한의 그 힘과 당당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했고,
또 죄를 정확히 고발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봐도.. 맞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도 말씀연구나 설교로 따지면
역사상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회를 향해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얼마나 예리한지
절대 헤롯 시대 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얘기를.. 온갖 매체로 쏟아놓는지 모릅니다.
어떤 조그만 사회문제도.. 교회가 나서서 바로 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런 모든 시도는, 세례 요한 때보다, 수 백~ 수 천 배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잃어가고 있고, 세상을 향해 권위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님이 우려하셨듯이, 제 맛을 못 내니까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세례 요한과 오늘의 교회는 무엇에서 차이가 나는 걸까요?
오늘날도 교회는 복음을 위해 외치고
사회를 향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활동이 적어지거나 위축된 것도 아닌데
왜 교회는 예전에 비해 그렇게 힘이 없어져 버린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교회의 역할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해서, 무슨 일에 열정을 낸다고 해서
거기에 교회의 역할과 힘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Doing 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Being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Being
본문은 그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
그의 외형적인 면을 설명하는 일은 좀처럼 드뭅니다.
대신에, 성경은, 그의 혈통과 가문을 말하고,
어느 지파 누구의 자손인지, 그리고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그런 것을 따지지..
그의 외형적인 모습을 소개하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의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을 더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1:6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는 그게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약 8백 년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입었던 옷과 똑 같은 모습입니다.
즉 세례 요한은 지금 엘리야 선지자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그럽니다.
이것은 또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똑같습니다. 사40:3
그러니까 그는 지금 엘리야의 모습으로 이사야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이사야.. 그들 둘 다, 자기 시대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직 자기 맨 몸 하나로만 말씀을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그 모습을 보면서
‘400년 만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붙여 줍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그에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주식으로 삼았던 음식도 범상치 않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 그랬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은 유대 광야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 음식입니다.
조금만 찾아다니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던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11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메뚜기와 석청은 바로 유대인이 먹을 수 있는 정결음식으로서,
그 자체가 성결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은 입는 옷과 음식으로
수도자의 청빈함과 성결(세상과 구별)의 삶을 직접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오늘날의 교회가 대비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현대의 우리들 교회에는 이 약대털옷, 메뚜기, 석청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청빈과 성결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청빈은, 단지 가난하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청빈이란 말을 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청빈과, 성경에서 말하는 청빈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청빈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믿고 사는 게 청빈입니다.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거기에 가치를 두지도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을 믿으며 하루 하루 사는 것.. 그게 바로 청빈입니다.
그래서 청빈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있을 수 있고,
가난한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먹고 사느냐인데,
바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겠다’ 하며,
과도하게 쌓아두지 않는 모습이.. 바로 ‘청빈’이라는 겁니다.
▲성결은, 세상과의 구별을 성결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세상 근처에도 가지 않고, 수도원 근처에 살면 그게 성결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결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삶의 모든 기쁨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기쁨을 돈이나 자리에서,
또는 성공이나 육체의 쾌락에서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 한다면.. 바로 그게 세상과 구별된, 성결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겐 바로 그 모습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풍요로움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좇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틈엔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성결을 잃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찾는 그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순결하고 정결한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교회에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교회사학자 중에 알란 슈래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가톨릭 교회사>라는 의미 있는 책을 썼는데
가톨릭계 뿐 아니라, 개신교 쪽에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힘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쓴 내용이 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가톨릭 교회가, 큰 힘을 얻었을 때는
역사적으로 3차례 큰 사건을 겪은 후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①가톨릭교회가 새 힘을 얻었던 첫 번째 사건은 종교개혁 직후이었습니다.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루터고 칼빈이 다 출교자요, 사건 자체가 아프고 쓰린 일인데,
오히려 그것이 교회가 새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깊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됐다는 거지요.
그리고 선교정책에 수정을 가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열매가 바로 <예수회>의 결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당시에 동양으로 보냈던
두 선교사의 이름만 들어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 와 중국선교사 마테오리치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이 뿌린 씨앗으로 우리나라에도 천주교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선교정책이 바뀌면서, 교회는 더 가난해지고 순수해졌던 것이,
가톨릭교회에 새 힘을 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②두 번째로 가톨릭교회가 새 힘을 얻게 된 것은,
1870년 로마교황청의 교황 명령권이
중부이태리에서 발생한 군사력에 의해 탈취되었을 때라는 겁니다.
그 동안 가톨릭은 종교단체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 세력으로 군림했었는데,
그 힘이 새로 생긴 힘에 의해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교회와 국가와의 기나긴 연대가 끝나자, 교회는 가일층 분명하게
본연의 임무인 영성 계발에 초점 맞출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것은 분명 교회의 축복이요, 은총이었다고 썼습니다.
③세 번째로 교회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사건은,
20세기 초 이태리를 통치했던 뭇솔리니에 의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모든 땅을 빼앗겼던 때라는 것입니다.
뭇솔리니는 로마가톨릭의 땅을 ‘바티칸’으로 축소시킨 장본인입니다.
가톨릭은 로마 전체의 땅을 다 소유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독재자에게 땅을 다 몰수당하고
단지 그 조그만 바티칸 안으로 쫓겨 갔을 때,
교회로서는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은총이었다는 겁니다.
그 동안 가톨릭은 지상왕국을 소유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에 종말을 가져오게 해 주었으니
어찌 축복이 아닐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 사건으로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힘을 잃었지만
진정한 하늘의 힘을 얻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적인 힘을 깡그리 잃고, 영성에 관심을 쏟을 때
비로소 영적인 힘이 생긴다는 것을 간파한, 역사학자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지난 20년간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크게 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이 가난을 은총으로 주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성도의 힘은.. 잡으려고 하지 않고, 낮아지려고 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성도의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것에 목맬 때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게 낙타 털옷 한 벌뿐이고,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게 메뚜기와 석청이라도
내 삶의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청빈과 성결은 덧입혀질 것이고
우리에겐 세상 무엇과 상대해도 압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지남철>이라는 시를 들어 보셨는지요?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읜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 교회를 향한, 세상의 통렬한 외침 아닙니까?
뭔가 영적인 길을 밝혀줘야 하는데,
청빈과 성결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늘 떨고 있어야 될 텐데,
그렇게 떨림을 멈추고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된다면
우린 더 이상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한 쪽에 고정이 돼서
쓸모없는 지남철처럼 버려질 뿐입니다.
잡으려고 하지 말고 놓으십시다!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십시다!
이기려 하지 말고 져 줍시다!
세상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을 바라십시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기쁨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도록.. 그렇게 사십시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새 힘이 생길 것이고, 우리들 교회엔 영적 권위가 부여될 것입니다.
그런 지향성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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