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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신앙 vs 신비주의

LNCK 2012. 4. 18. 21:03

◈일상적 신앙 vs 신비주의          엡6:10~13            펀글 토대로 재작성

 

 

◑신비주의가 아니라 한 걸음씩! step by step!


사탄이 오래 전부터 즐겨 쓰는 모략 중 한 가지는 신비주의입니다.


“네가 자꾸 넘어지는 것은 완전하지 못해서이다.

네가 신비한 은혜만 크게 한 번 받으면,

더 이상 사소한 문제로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혹해서

정당한 경건의 훈련과정을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은 step by step 훈련이며,

그 훈련은 반복을 통해 완성됩니다.

한 번 신비 체험으로, 경지(완성)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성령)만 한 번 크게 받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식의 선전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란.. step by step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야 하는,

경건의 훈련과정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문제 중 하나는

신비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성향입니다.


어떤 삶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참으로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

신비주의적 경향입니다.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런데 이것의 페해는,

일상적 신앙의 노력을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을 때, 염려할 것이 생겼을 때,

실제 현실에서, 누가 그 걱정근심을 잘 극복하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암송하면서, 평소에 끊임없이 염려하지 않는 경건훈련을 하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입니다.

그는 자기 신앙의 성숙을 step by step 쌓아갑니다.


반면에 우리의 종교적 본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으로, 염려를 극복하도록 미혹합니다.


갑자기 어떤 계시를 받거나,

우리를 위로하는 어떤 특별한 환상,

또는 특별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서..

내 염려에 대해 신비한 해결책을 주는 것인데,

이런 것에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것입니다.


지금 신비 체험이나, 성령의 은사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처럼’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이기기 위해서’ 평소에 해야 하는 일은,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려는 일상적인 노력입니다.


그런 일상적인 노력을 다 생략하고,

무조건 ‘신비적 체험에 빠져들어서’ 자기 염려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마귀의 미혹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생활에서, 일상적인 노력을 간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자 되는데 있어서, 너무 복권당첨이나 일확천금을 기대하지 말고,

(그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입니다.)

평소에, 매일의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부자 된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로 쉽게 빠져드는 사람들 중에

‘큰 거 한방’으로 다 해결하려는 ‘한탕주의’가 생기기 쉬운데,

그런 식으로 10~20년 신앙생활하면,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step by step, day by day, little by little 의 한 계단씩 밟아가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예를 들자면,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하는 신자가,

결국은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이며,

‘신앙생활에도 왕도나 지름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급격한 변화를 체험했다고 하는데,

아마 성경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그도 일평생 step by step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갔을 것입니다.


그후 그가 공식적인 활동을 하게 되기까지는

아라비아 3년을 포함에서, 약 10년 전후의 ‘내실 다지기’ 기간이 있었다고 봅니다.


사람은 본래 완전주의 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점에 사탄이 물고 늘어져,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런 ‘신적인 방법’ 또는 ‘신비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하나님의 주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을 성실히 사는 가운데, 우연히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도 성경에 나옵니다마는,

그것은 예외적으로 쓰신 것이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내가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가만히 놔둔 채로.. 나를 둘러싼 외적 환경을 바꾸는 싸움이 아닙니다.


염려를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염려하는가,

내가 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이렇게 집착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를 밀어 올려서, 말씀을 믿으면서,

염려를 극복해 나가는 싸움.. 경건의 훈련.. 이것이 염려 극복의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이 요구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신비주의 쪽으로 기울면,

언제나 단번에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렇게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종교적 본능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종교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나를 키우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신비주의적 미혹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예외적인 방식입니다.


신비주의가 부정적으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일반적 방식’을 무시해 버리고,

‘예외적/ 특별한 방식’에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방식’으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보면,

‘예외적/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단, 가끔입니다. 매일이 아닙니다. 매일은 일반적 방식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일상적 신앙이 기본이다.


신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병을 주시고, 재앙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인간 (그의 믿음, 신앙인격)을 고치기 위한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내 병만 고쳐주시고,

내 문제만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믿습니다.


시험을 잘 못 봐서 자살하는 학생을 없애기 위해

시험을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물론 자살은 안 하겠지요.

그러나 그 대신 학생들을 공부시켜서 훌륭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기도 한 번 했다고, 헌금 한 번 후하게 바쳤다고,

철야기도 한 번 진하게 했다고.. 무슨 문제가 단번에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당장에 없애주시기 보다는,

나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치료’(내적 성숙)은.. 보통 오랜 기간을 요합니다. 일평생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환경에.. 문제와 시련은.. 끊이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다 나를 치료하는데..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걸 해결하겠다고,

단 번의 철야, 단 번의 금식.. 그래서는 해결(응답)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욕심내시는 영광된 목표는,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1개월 단기코스’, ‘몇 주 완성’.. 이런 식으로 마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세상을 뒤집어엎는 위대한 일을 하겠습니다.’


-제가 대학총장이 되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다.

-제가 선교단체를 세워서..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겠습니다.

-제가 큰 기업을 일으켜서.. 물질로 쏟아 붓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요셉의 꿈’처럼, 신비한 꿈을 꾸기도 합니다.

자기가 안 꾸면, 엄마가 대신 꾸기도 하는데요..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그 꿈은 정말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0년, 20년은 기본이요, 30년, 40년, 50년이 지나도 안 이루어질 수 있고,

어쩌면 자기의 원대한 꿈을 못 이루고 죽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그 꿈을 이루어주시는 것’보다

‘네 성품을 연단시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품의 연단 없이, ‘내 꿈이 이루어지면’

다윗 왕도 아마 사울 왕의 길로 갔을 것입니다.


신앙세계에는, 기적과 신비적인 방식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큰 액수의 헌금을 바치고 나서,

무슨 큰 고래를 잡아서, 몇 배로 보상을 받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평생에 한 두 번 일어날까 말까 합니다.

아마 세 번, 네 번 이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신자는, 기도해서 기적적으로

자기 불치병을 치료받기도 하고, 남의 불치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특별한 은사자를 제외하면) 일상적인 일은 아닙니다.


이 글의 주제는,

신앙은 ‘일상을 성실히 사는 것’입니다.

거북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러나 꾸준히 인내하며, 자기 발을 옮기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정말 더디게 가는 것 같지만, 10년 지나면 멀리 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일확천금을 바라듯이

한 번의 신비한 체험으로,

뭔가 드라마틱하게 완전히 내가 달라지고, 내 환경이 천국이 되는 것으로...

그런 ‘도박적인 신앙’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누가 <40일 금식기도>를 하더라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신앙은 ‘한 걸음씩’ 일상적 과정을 통해,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하루 밤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비한 체험>을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신앙은 ‘한 걸음씩’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도 (신앙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등교육과정, 대학까지 전 과정을 차곡차곡 밟아야 합니다.


안 그러고, 하루아침에

자신(신비체험자)이 뭐 대단한 사람이나 된 줄 착각한다면

10년이 지나고 나서 보면,

‘거북이’들이 저 앞에 가 있는데,

자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요셉의 꿈’을 꾸고,

아무리 ‘놀라운 신비체험’을 하더라도

신앙에 왕도/지름길은 없으며,


‘일반적 방식’을 무시한 ‘신비적 방식’은

결국은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환상’도 없고, 아무 ‘신비 체험’도 없지만,

성경말씀 붙잡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상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나중에 마라톤에서 일등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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