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십자가의 패러독스

LNCK 2012. 4. 15. 22:52

◈십자가의 패러독스 (역설)          막15:25~37         인터넷에서 스크랩, 정리



◑역설1. 삶보다 죽음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들의 이야기는 생전의 업적을 강조하고,

죽음은 마지막에 잠깐 언급하는 정도인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지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72세, 마호메트는 62세, 부처는 80세에 생을 마감했는데

예수님은 33세에 생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짧은 삶을 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기독교 믿음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에서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던 틀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사형을 집행할 때 쓰는 틀을 믿음의 상징으로 여기겠습니까.


다른 종교의 상징들은 아름답습니다. 불교는, 연꽃, 이슬람교는 초승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믿음의 상징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인 상징물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 갈6:14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자랑거리도 바뀝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사무엘 어드포드라는 사람은 십자가를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감미로운 부담이다.

그것은 마치 새의 날개와 같고, 배의 돛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새에게 날개가 있는 것이 부담입니까.

날개가 있는 것이 때로는 부담이 될 수는 있지만, 날개 때문에 새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배에 돛이 없으면 배의 무게는 줄어들겠지만, 방향을 잡고 중심을 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인생에 부담감을 주는 것 같지만,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자유로워지고 인생의 방향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십자가 역설에 담긴 진리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전능하신 그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를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설, 패러독스(Paradox)입니다.


성경에는 역설적으로 나타난 진리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을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누구든지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설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왜 이렇게 역설적인 형태로 나타날까요?

진리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 사건이 역설이기 때문에, 진리는 역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믿는 우리는, 모든 것을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게 봐야합니다.

 

 

◑역설2. 조롱을 이용해서, 진리를 드러내는 십자가   ←하이라이트


 

특히 본문에는, 죽어가는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고 모욕하는 이들이 내뱉은

어리석은 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가 밝혀집니다.

이것도 역설, 십자가의 패러독스가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기 위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무지함으로 내뱉은 말에서 예수님에 대한 진리가 증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조롱1. ‘유대인의 왕’

 

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침 9시쯤이었습니다.

예수의 죄패에는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25~:26


로마 제국은 사형수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써서 죄패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명을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적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야한다고 했지만

빌라도는 거절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과정 내내 공회원들에게 끌려 다니다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후 잔인함과 포악함을 드러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스스로 주장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차라리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서 유대인 전체를 모욕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 전체를 모욕하고 싶어서 ‘유대의 왕’이라고 썼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역설적 방식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책에 보면

이 죄패가 전도도구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죄패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을 조롱하기 위해 ‘자칭’이라는 단어를 뺌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라는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조롱2. ‘남은 구원한다면서, 왜 자신은 구원 못하는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예수를 조롱하며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리스도, 이스라엘 왕아!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우리가 보고 믿도록 해 보아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사람도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29~:30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지나가던 사람들, 심지어 함께 못 박힌 죄수들도

예수님을 조롱하며 모욕했습니다.

두 죄수는 정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회개는커녕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데 동참한 것을 보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남을 구원한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이유는 남을 구원하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다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조롱하고 있는 그들의 말처럼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친 이후에 체포당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요청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일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아야만 남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조롱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여러분, 메시야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이 아니라,

불의한 십자가를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억울한 형편에 처했을 때에

그 억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내하셨습니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메시야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사실 그분은 성전을 다시 짓고 계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에서 사는 구원을 이루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조롱3.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절규하던 예수님이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 하셨습니다. 


“낮 12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둠이 뒤덮이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오후 3시가 되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31~:32 


이 장면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갈 때를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에, 전혀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가리켜 ‘숨어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오해1) 이것은 마치 “지금까지 하나님께 순종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부르짖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해2) 혹은 고통이 너무 커서 ‘이 정도일줄 몰랐습니다.

이토록 큰 고통을 주는 것을 보니 저를 버리는 것입니까?’라고 절규하며

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아셨고, 고난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정답) 놀라운 것은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붙잡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조롱을 받는 순간에도, 심지어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그런 뜻입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27:43


그들은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을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들이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신뢰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리..


이 말은 “지금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라는 전적인 신뢰의 고백입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규는 한탄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군요”

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조롱했지만 그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역설3. 불의한 자들을 사용하셔서, 십자가 구원을 이루셨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위대한 십자가 사건..

그건 의인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

거기에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들은.. 죄다 불의한 자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빌라도, 로마 군병들, 성난 군중들.. 그래서 <십자가는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병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모욕을 당하면서 숨을 거뒀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절정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동안

사람들의 모욕과 조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아무리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죽어가는 동안에는 엄숙하게 보내주는 것이 인륜입니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를, 몇 시간동안이나 모욕을 하고 조롱을 하는 교도관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사형수일지라도, 마지막에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 사람의 인생을 동정하는 것이 마땅한 인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가는 과정,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의 조롱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법정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더라면, 조롱과 모욕을 당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예수님의 사형이 집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넘겼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인의 법정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고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고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심, 로마 군인들의 잔인함,

빌라도의 비겁함, 군중들의 무지함을 사용해서 선을 이루셨습니다.

 

 


◑적용


여러분,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우리 역시, <십자가의 역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 여러분,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을 붙잡아야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이 바로 십자가 역설의 삶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역설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깨달을 수 있는 구절 같아 보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았지만 우리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입니다.”

라는 이 역설의 고백을 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이 역설의 고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는 자기 안에 자기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성령님이 내 안에 새로운 자아를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역설의 고백을 날마다 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못 박히실 때 받은 모욕과 조롱을 모두 인내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십자가의 역설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인 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되셨고,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대로

주님은 남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성도는,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 때,

그 조롱이 역설적 진리로.. 그를 부활시켜 줄 것입니다.

그 조롱이.. 기가 막히게.. 나에게 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삼하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3.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잠시 자신을 버렸지만,

그 순간에도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역설의 삶을 사는 성도들은

때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

이라는 고백이 됩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역설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