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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부름 받았습니다

LNCK 2012. 4. 19. 19:16

◈당신도 부름 받았습니다        히11:33~40         인터넷에서 스크랩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의 증거는.. 자기가 받은 구원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전도, 선교에 동참하지 않는 신자는.. 오히려 전도, 선교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승리자의 두 부류

 

믿음의 전당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믿음으로 승리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들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능력을 꺾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용맹한 사람들이 되기도 하고

이방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은 자신의 죽은 사람들을 부활로 되돌려 받기도 했습니다.” 히11:33~35

 

성경에는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또한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고 평화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나이와 성격, 문화와 직업이 달랐지만 

동일하게 믿음의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35b절부터는 또 다른 믿음의 영웅들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했으며, 심지어 결박되고 투옥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았고 톱질을 당했고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양 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녔으며

그들은 가난했고 고난을 당했고 학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 등에서 떠돌며 살았습니다.” 히11:35~38

 

이 말씀을 보면.. 믿음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칼의 위협이 왔을 때 칼이 부러졌고,

사자 굴에 던져졌어도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류의 영웅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칼에 죽고, 채찍에 맞고, 심지어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승리를 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우상숭배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유대계 이집트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고

이사야도 므낫세 왕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베드로도..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히11장의 클라이맥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은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8절을 보면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장벽을 무너뜨린 사람들’도 위대하지만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한 사람들’은 더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위한 핍박 받음과 순교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11:35

 

▲그런데 본문 히11장에 나오는 핍박에 대한 이야기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핍박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구약시대에 유대교에 대한 핍박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왜 이러한 사건을 믿음의 전당 마지막에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히브리서를 읽는 성도들 또한, 동일한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때 이들이 순교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 상황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순교를 했는데,

메시야가 오신 이후의 사람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설명을 하기 위해 가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헬라어로,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나의 순교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한 이후, 흩어진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에 의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수가 없어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빌립, 마태, 마가, 누가, 맛디아, 도마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요한만이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게 더 순교보다 더 어려운 순교였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일어난 대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들의 털옷을 입혀, 개들이 물어뜯어 죽이게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신을,

로마 군인들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박해는 2~3세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앗수르에 의한 핍박’보다 훨씬 심하고 조직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에 나오는 순교 장면은, 우리의 가슴이 저리도록 하는 기록이 많습니다. 

 

초대교회 감독 이었던 이그나티우스 순교당하면서 일곱 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에는 자신을 위해 중보해달라고 하거나

순교당하지 않도록 구명운동을 해달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결같이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자신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의 행동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적혀있습니다.

 

자신이 고난당할 때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울 것이고,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할

하나님의 밀알이라고 썼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연약해서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부활할 때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부활이라도 ‘더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의 피로 전해지는 복음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우리들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러한 순교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통계학자인 바르시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약 6억 5백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정부의 박해와 핍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약 2억 2천 5백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연 평균 크리스천 순교자의 수가 15만 9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그 정도의 사람들이 순교를 하고 있다는 조사입니다. 

이 시대에도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순교의 피를 통해 증거되고 있습니다.

 

순교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북한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한국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지하교회 한 곳이 발각되어 문을 닫을 때,

그들은 순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 여기(북한)서 교회가 한 곳 문을 닫을 때, 남한에 교회를 한 곳 든든히 세워주소서!’

라고 피 끓는 기도를 드린답니다.

 

그러니, 오늘 대한민국의 교회가 이만큼 설 수 있었던 것도,

거기에는 <북한 성도들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결과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잠자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현재 북한에는 40만 명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외국에서 사역하는 한 한인목사님이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던진 세례문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신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입니다.

교리적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북한 주민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도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파키스탄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한 교회를 방문했는데,

모슬렘의 폭탄테러로, 사지가 잘린 크리스천 지도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파키스탄에는 회교도들이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그들만 사는 마을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차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회교도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그들은 사회에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상속권이 박탈됩니다. 기독교인의 90%가 직장이 없습니다.

약 2%만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인분을 치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변했던 바티 장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온누리교회에도 오시고, 횃불트리니티에서 명예박사를 받으셨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유일한 기독교인 고위 공직자였던 그는.. 최근에 피살되었습니다.

 

1억 7천만 인구 중 2%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의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신성모독법을 비판했다는 억지 이유로,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2011년 1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슬람 신성모독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계속 벌인다면 살해될 것이라는 협박이 있지만

폭력은 나를 괴롭힐 수도, 위협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결국 2011년 3월 11일 순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나라에, 크리스천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번역되어서 알려지고 있는데

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추운 날 강가에서 세례를 받을 때면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반신불수인 형제가 일어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고,

뇌질환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기적들이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반면 신앙의 자유가 있고, 인권이 보호되어 순교가 사라진 서구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적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는 선교사’들을 도와야 합니다.

 

핍박 속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빌1:29절에 기록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할 책임, 곧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할 책임을 받았습니다” 빌1:29  

 

또한 그들에게, 목숨 걸고, 순교의 각오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도.. 이런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행20:24

 

선교란 결국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살고 있습니다.

선교사 중에는 생명의 위협이나 고난, 희생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볼리비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교회를 24개 이상 개척하고 수만 명을 전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선교지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아들을 잃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는데 담벼락이 없는 2층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들을 잃는 엄청난 희생 이후, 성령의 역사가 그분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순교는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불쌍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더 좋은 부활’을 사모하며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헌신한 귀한 사역자들입니다.

위대한 순교를 맞이한 그분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선교는 순교입니다.

순교적 각오로 한 해를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가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살아있는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당신은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거의 ‘죽어’ 있습니까?

 

들은 얘기인데, 지방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서울의 교회로 투어를 정기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혹사니 그들이 ‘크고 화려한’ 것을 보기 원한다면,

그것보다는 차라리 ‘순교자 기념관’으로 투어를 가는 것이.. 더 살아있다는 증거 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예배 → 성령 → 선교공동체 사이클링        

 

 

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군 복무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는 자기를 군인으로 불러 모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딤후2:4

 

선교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지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선교사가 되어야합니다.

선교는 일부 선교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군함에 승선하게 됩니다.

선교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교에 대한 명령을 하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마28:17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이 베푸는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신성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을 경배 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드려야 할 경배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이후에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의 출발은, 예수님에 대한 경배로부터 시작됩니다.

선교는 예수님이 주가 되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고후4: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님이 되신 것과

예수 때문에 우리가 여러분의 종 된 것을 전파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전파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누군가의 종이 됨으로써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이 되어야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선교는 예배공동체로부터 시작합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곳은 반드시 선교공동체가 됩니다.

 

故하용조 목사님은 온누리 공동체의 성격을 세 가지로 정의하셨는데

그것은 예배, 성령, 선교공동체입니다.

 

예배하는 공동체에는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선교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역은 다시 한 번 평가해야 합니다.

선교에 헌신하지 않는 성령사역은 방향을 잃어버린 위험한 사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진정한 성령사역은 선교의 열매가 얼마나 맺어지고 있는지를 토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에 들뜨고 흥분되는 것이 예배의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또 다시 성령사역으로 이어지고 성령사역은

다시 선교로 이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선교는 예배를 만듭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만드는 것이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 성령 → 선교공동체는 사이클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도행전적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예배공동체가 일어나고, 그곳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것이 선교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위대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 주신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뵙고 경배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 (마28:16~17)

 

경배를 드리는 제자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불순종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여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동일하게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도

결국 성령이 임하면 이 명령을 수행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의심이 많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심이 변해 굳건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의심은 때로 굳건한 확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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