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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야 산다

LNCK 2012. 4. 29. 00:30

◈지금은 함께 울어야 할 때       창21:14∼19절            출처


사람은 울면서 나고, 울면서 살고, 울면서 죽습니다.

본문은, 하갈이 우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을 남용하는 인생은 반드시 울어야 할 때가 옵니다.

하갈은 애굽 사람이요, 사라의 몸종으로서 주인 사라의 특별한 배려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기 분수를 잊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남용하고 악용했습니다.

결국 그 집에서 영원히 쫓겨났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주어진 축복을 남용하면 슬픔의 광야로 쫓겨납니다.


건강을 남용하면 병이 듭니다.

낭비하던 탕자는 가난의 돼지우리로 갔습니다.

경솔하던 에서는 축복을 빼앗기고 통곡하였습니다.

사도직을 남용하던 갸롯 유다는 목매어 죽었습니다.


사람이 행위 방정을 잃고, 품행의 단정을 잃으면

하나님도 사람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둘째, 길 잃고 방황하는 인생은 반드시 울어야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길이 없고 동서남북을 구별하기 어려워 방황하기 쉽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길을 잃고 방황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잠 24:8).

좌우로 지쳐서 탈선합니다.

지쳐서 비틀거리고 방황합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탈선하고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선합니다.


신자도 자주 기도시간을 잃어버리고 말씀 듣는 시간을 경시하니까

영혼이 어두워지고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믿음을 잃으니 징계와 채찍 맞는 광야로 쫓겨납니다.

그래서 너무나 큰 눈물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세상 것은 반드시 없어지기 때문에.. 인생은 반드시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몇 날이 걸렸는지 알 수 없으나

가야 할 곳에 가기 전에, 가죽부대의 물과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목마르고 배고파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마주앉아 울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두 사람의 통곡을 들으셨고(17절) 하나님이 붙드셨습니다(18절).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셨고 하나님이 샘물을 주셨습니다(19절).


울면 됩니다.

안 되면 우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요, 물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 떨어지면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그림자같이 지나갑니다.


모두 풀의 꽃이요, 아침 안개요, 뜬구름입니다.

절대로 영원하지 못합니다.


많이 가진 자도 그렇고 적게 가진 자도 그렇습니다.

가죽부대의 물과 양식이 아직 남아 있어 방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방종, 낭비, 방황, 사치, 남용을 애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큰 소리로 “주여” 부르며 방성대곡합시다.


지금 우리는 모두 울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특권과 직분과 축복을 남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필요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십시오.

주님도 우셨는데 우리가 웃고 농담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우는 자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눈물 없이 영광과 면류관은 없습니다.


지금 우는 자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감사하며

영원히 웃으며 영원히 찬송하며 살 것입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6:21 


..................


야곱요셉은, 아버지와 아들인데도,

성품에 있어서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훨씬 낫습니다.


보통 설교자들이 인물 설교를 할 때.. 야곱은 우리 인간 모습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우리 예수님으로 조명을 합니다.

그럴 정도로 야곱과 요셉은 차이가 납니다.


야곱에게 나타난 특성을 보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 하고

요셉을 보면.. 예수님 모습을 보는 듯한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야곱이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다면.. 우는 것입니다.

그는 라반의 집에 가서.. 울었습니다. 창29:11


또한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형 에서를 처음으로 대면할 때, 그는 절뚝거리면서, 울었습니다.  창33:4 서로 울었습니다.


얍복강에서, 그가 울었다는 말은 성경에 안 나오지만,

평소에 잘 우는 그의 성격으로 봐서

환도뼈가 부러질 때.. 그는 하나님께 울면서 매달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울지도 않고, 뻣뻣하게 요구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로 축복해 주셨을리도.. 만무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요셉’이 아니라, ‘야곱’에 가깝습니다.

‘야곱’이 사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데 있습니다!

 

...................................

 

◈울어야 산다           눅19:41~46           출처보기, 축약

                                                                                          http://blog.naver.com/jjkkhh2232/50045467122

 

◑1. 강한 사람이 운다


사람의 눈물은,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눈물은 약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재산이 없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만, 흘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영적으로 보면, 영적으로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 흘린다.


오늘날 과학과 기계는, 만능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과학과 기계로도, 못하는 것이 있다.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과학과 기계가 아니라, 바로 눈물이다.

망나니 자식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눈물이요,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눈물이다.


눈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거두게 한다.

그러므로 눈물은 부끄럽지도 약하지도 않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사랑의 눈물이다.


이 시대가 고도로 발전하지만, 영적인 힘을 일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눈물이 말랐기 때문이다. 메마른 심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쳐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듣지 못한다.

머리는 있지만, 가슴이 눈물이 메말라가기 때문이다.


차디찬 비판은 있으나, 생명을 품는 뜨거운 감격은, 경험하지 못했다.

눈물이 마르면 생명이 없다. 눈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액체다.

 


◑2. 예수님은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다.  중략, 출처를 보세요


◑3.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울지 않을 것을 인하여 울고,

울어야 할 것을 인하여 울지 않는, 눈물이 왜곡된 시대다.


1.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41).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 나라를 죄악을 보고 우셨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죄로 사무친 백성을 보면서 울었다.


사도 바울도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동족의 구원을 위한 고통이라고 했다. 롬9:1~3


우리의 눈에는, 이 나라의 아픔과 상처가 보여야 한다.

타락과 멸망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문화가 보이고, 민족의 아픔과 위기를 보아야 한다.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리스도인의 눈물이다.

나라가 썩어서 망하는지 않고, 의인 10명의 애통하는 눈물이 없어서 망한다.


애국자가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두 애국자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조국이 있다.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들이다.

느헤미야는 조국이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비보를 듣고,

찢어지는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했다. 느1:4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울어야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가는 민족의 쇠운을 보고,

가슴을 치며 울며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사랑하여 주셨는데,

이 민족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라고 울며 기도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낙스는

“하나님이여 내 조국을 내게 주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총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때가 있으나, 기도의 무릎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다.


이 백성이 이만큼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도,

새벽마다 밤마다 울며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이 풍부한가? 땅이 넓은가? 인구가 많기 때문인가?

백성이 도덕적인 수준이 높고, 지혜롭기 때문인가?

이 민족의 힘은 기도의 힘, 애통의 힘이다.


2. 우리는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울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 여인들이 뒤따르며 울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다. 눅23:28


우리는 자신과 가정, 자식들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 자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면,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붙잡고서 통곡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스펄전 목사는 “마른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다.


눈물로 말씀을 먹어야 한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자신이 괜찮은 줄 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지 발견하게 된다.

자기 속에 있는 죄와 허물뿐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 죄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 예수님께서 용서하신다.

슬피 우는 자에게는 위로의 은혜를 부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교만의 눈으로 자기를 보기에, 울 수가 없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리면서, 자신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된다.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보게 된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여,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를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힘은.. 눈물에서 시작이 된다.

눈물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다. 눈물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다.


3. 교회를 위해 울어야 한다. 눅19:46


예수님은 우시며 성전으로 가셨다. 성전에 가서 장사치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밖으로 내어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신앙 양심이 무너진 현실을 탄식하고 계신다.

이 집은 눈물로 기도하는 집인데, 어찌하여 눈물은 없고, 장사꾼들만 우글거리는가!


민족을 살리는 마지막 힘은 교회다.

그런데 교회가 타락했으니, 끝장이 나고 말았다.


강도가 역사 구석구석에 있어도, 주님은 참으신다.

국회 의사당에 회사에, 학교에 강도가 들어가도 주님은 참으신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강도는, 주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눈물을 흘릴 자를 찾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눈물 없는 사람, 눈물이 없는 공동체,

눈물이 없는 세대를 향하여 한탄하셨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11:17)라고 나무라셨다.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낙원이 나타난다.”고 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안다.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기 바란다.


4.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주검 앞에 눈물을 흘리셨다.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불행해짐을 원치 아니하셨기에 우셨고 살리셨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문을 여시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애통은 이웃을 향한 애통이었다.

이는 우리 신앙인이 흘려야 할, 신령한 눈물이다.


오늘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은, 잠든 영혼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죽은 심령들 일어나라 말씀하신다.


썩어 냄새나는 자에게, 문을 닫고 살지 말고, 돌문을 열라 말씀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음의 자리, 실패의 자리, 질병의 자리, 절망의 자리,

게으름과 나태의 자리, 무력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참된 애통은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자신의 허물인줄 알고 함께 아파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을 살리려는 눈물이 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볼 때, 잃어버린 영혼 때문에,

사탄에게 빼앗긴 백성 때문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는 눈을 열어, 교회 밖의 잃어버린 영혼,

죽어 가는 영혼, 사탄에게 빼앗긴 영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들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

저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회개의 눈물만이 우리를 살린다. 가슴을 찢는 회개가 없이는, 살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신다.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려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시내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눈물을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 흘릴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의 최고 무기는, 잘못을 인정하며 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의 눈물을 보고 회복시키신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사39: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며 아주 시청각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도 많이 기도하고, 많이 울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 부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눈물이 있기를 원한다.


억울해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탄식소리를 듣고,

나를 보고 우는 눈물이 쏟아져야 한다.

내 감정에 북받친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신령한 눈물이 흘러야 한다.


마치는 말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공짜가 없다.


내 죄를 통회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내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 거룩한 눈물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신다.


조국을 위해 흘린 눈물에는, 삶의 평안과 풍성함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회개의 눈물에는 사죄의 은총과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에는, 성숙한 믿음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으로 채워주신다.

이런 축복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눈물> 관련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