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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삶의 활력을 준다

LNCK 2012. 4. 25. 18:16

 

◈부활은.. 삶의 활력을 준다       행2:43~47       11.09.04.설교스크랩, 녹취

 

 

 

◑부활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유대인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제 예수는 끝났다. 그의 제자들도 끝장났다.

예수가 무엇을 시작했든 간에, 이제는 다 끝장이다.’

 

왜냐하면, 신생 단체의 지도자가 죽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도,

예수님만 돌아가시면, 다 끝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50일 후에, 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끝날 줄로 알았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가 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특별히 분류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들이 뚜렷한 모습을 갖추게 되니까...

 

이들이 믿는 신앙을 ‘기독교’ 라고 부르게 되고,

그 제자들을 ‘크리스천’이라 부르게 되고,      *크리스티아누스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다.

 

▲50일의 기간.. 부활의 엄청난 증거

이러한 새로운 시작이,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유월절부터, 딱 50일째 되는 날에 시작되는 절기였다.

 

이 정확한 시기(50일째)를 파악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신빙성을 보태준다. 왜냐하면..

 

만일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1년이든, 5년, 10년 후의 한참 후에 일어난 일이라면,

‘부활신앙의 기독교’에 대한 신빙성은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즉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타종교들처럼, 교주가 죽었고, 그 가르침만 전해져서..

1년, 5년 후에 ‘기독교가 제자들에 의해 생겼다’ 라고 보게 된다.

 

새로운 종교(기독교)가 탄생하는 데는.. 경전을 만들고, 조직을 정비하는 등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경말씀대로

오순절 성령강림과, 그로인한 초대교회의 생성 사건이

예수님 돌아가시고 불과 50일 후에 일어난 일이라면,

 

(부활사건을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부활신앙을 모토로 하는 기독교’에 상당한 신빙성을 안겨 준다.

 

초대교회의 모든 획기적 변화가

만일 정말로 50일 이후에 (또는 50일만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납득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50일이란.. 인위적으로 조작하기에는 너무 빠른 기간이기 때문이다.

 

50일 전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불과 50일 만에, 제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아서 활기차게 활동하는 것은

(부활이 없었다면) 도저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0일 정도의 기간이라면..

제자들은 아직도 슬픔과 아픔을 애도하며, 침울하게 지낼 기간이기 때문이다.

 

▲위축되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생기가 돌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따르던 스승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해 돌아가시자,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관계로, 남은 제자들은 어쩌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아주 슈퍼스타 이셨다.

카리스마라든가, 성령의 능력이라든가, 가르침, 인지도, 성품 등

모든 면에서 예수님 같은 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혀서 처형을 당하셨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무엇을 일으킬만한 위인이 아직 없었다.

뚜렷이 내세울만한 후계자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이때 제자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추측해 본다면,

그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볼 때

 

    (이것은, 사람이 만일 전쟁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렸다든지,

    큰 사고를 당했다든지, 큰 충격을 받았을 때에 나타나는 정신장애를 말한다.)

 

우리가 상喪을 당한 집을 방문하면,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 집안사람들은 조용히 지내고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야만 했었다.

축 늘어지고, 우울하고, 의욕이 없고, 두렵고, 용기가 없어야 했다.

 

그러나 50일 이후에 그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본문 말씀 그대로다.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43~47

 

▲모두 다 부활 때문에 일어난 일

위 본문의 놀라운 현상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이후로 오래 지속적인 일이었다.

걷잡을 수 없고, 마치 핵분열과 같은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제자들이 과거를 돌아본다거나, 향수에 빠질 틈이 없는

현재진행적인 굉장히 분주하고, 굉장히 바쁘고,

굉장히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것은,

예수께서 정말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모든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5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던 사도들의 증언을 신뢰하는 것뿐이다.

사도들의 증언이 결정적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무슨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는데..’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적은 기적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한 이상,

어떤 기적도 그 자체가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을 직접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고,

사도들의 증언을 글로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그런데 당시 사도들의 정황을 추측해 보건데,

그들의 증언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신빙성이 있다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본문이 그 중에 하나이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5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본문의 열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없다)

 

행2장의 열기, 사도들의 그 열정,

행2장에 일어난 일도, <열기>라는 말 외에는 달리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의 열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모하기 위한 열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면, 고인을 그리워하며 추모한다.

 

그런데 행2장에 나타난 이상 징후인 열기(성령충만으로 나타난 여러 현상들)

과거지향적인 ‘추모의 열기’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진행적인 ‘열기’였다.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예수님이 그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그 제자들은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돌아가신 분을 믿는 게 아니고,

현재 살아계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분을 믿은 것이다.

 

그래서 행2:47절에, 주께서 구원받는 백성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주’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게 아니라,

과거의 인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하셔서,

‘(부활하신)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구원 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한 것은,

사도들의 설교도 아니고,

교회의 프로그램도 아니고, 

어떤 마케팅 전략도 아닌,

예수님이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여 주신 것이다.

 

<만들어진 위인>이란 책이 있는데,

위인들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펴면서,

예수 그리스도도 만들어진 위인이다.. 라는 논지를 펴는데..

그런 주장은 이미 우리가 많이 들어서 익숙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읽고 사도행전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담은 책이 아니고,

그 당시에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사도들이, 무슨 입을 맞추는 담합을 한다든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교리를 조작해 낼만한 그런 상황도 아니고

(즉 만들어진 위인이 아니고)

그럴만한 필요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뭐 하러 그렇게 하겠는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여러분,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부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 없다.

그런 주장이 없어도, 얼마든지 석가모니를 기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굳이, 믿지도 못할 부활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

부활을 주장하지 않아도, 석가모니처럼, 얼마든지 신도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슬람교에서, 마호메트(무함마드)가 부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이 없이도,

얼마든지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의도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뭐 하러 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정말 증명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없었을지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널리 홍보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추모하고,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굳이 정말 변증하기 어려운..

세상 사람들이 쉽게 공격할만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주장을 제자들이 한 이유는,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것 이외에는 교회가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고백으로 했을 리가 없다.

 

프리마 크리도 .. 제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신앙고백’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라는 것이었다.

부활은, 그저 여러 교리 중에 하나가 아닌, 가장 우선적인 교리였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신지 5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놀라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도,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리하여 어떠한 시련을 무릅쓰고라도,

만민에게 전할 만한 기쁜 소식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결코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적용

 

오늘 본문의 진리를, 우리가 실존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해 보자.

 

과거에 <전화자동응답기>가 있었다. 그때가 좋았다.

그때는 전화를 받기 싫으면, 응답기를 켜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휴대폰>을 쓰는데, 전화를 안 받을 수 없다.

만약에 전화를 안 받으면 전화 건 사람의 이름이 뜨기 때문에 ‘전화를 씹었다’고 욕을 먹는다.

 

우리가 살다보면, 외로움이 전화를 걸어온다.

두려움도 전화를 걸어온다.

시험도 같이 놀자고.. 내 집 문을 두드린다.

 

우리가 한가한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available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찾아온다.

 

그때 우리가, 전화응답기처럼 대답해야 한다.

‘제가 지금 잠깐 바쁩니다. 혹은 제가 지금 집에 없습니다.

용건을 남겨놓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나를 찾아오고, 계속 내 방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따끔하게 돌려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이 조금 지나서,

그야말로 축 늘어져서 우울해하고 침울해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들을 찾아가보니까, 그들처럼 바쁜 사람들이 없었다.

 

이제 그들의 삶은 과거지향적이 아니었다. 현재진행형이었다.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얼마나 중요한 매일의 사역을 갖고 있는지..

 

이들은 그날 이후로,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순교할 때까지 늘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들은 결코 신세타령을 한다거나, 뭐 옛날이 좋았다거나..

외롭다거나.. 이런 여유가 없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일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침울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활력이 넘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한다거나

슬픔에 잠겨 있다거나, 자기를 가엾게 생각한다거나

이럴만한 시간이 없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목적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는 도중에 얻는 부산물이다.

 

우리가 목적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다가 보면,

행복이라는 것을 부산물로 얻게 된다.

 

크리스천도 마찬가지다.

그러기 때문에 우울함이든, 슬픔이든, 고독함이든, 시험이든,

‘비켜라 좀 비켜! 나 지금 바쁘거든!’

이렇게 나오게 된다.

 

TV에 보면, 연예인이나 유명인사가 나오는데,

카메라맨 수 십 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주위에 모여드는 장면을 본다.

그 인사가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면,

기자들이 그를 따라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면서.. 막 따라다닌다.

 

여러분, 세상에는 이렇게 우리를 달라붙는

괴로움 자기연민 슬픔 우울함 등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비켜다오! 나 지금 바쁘고 할 일이 많거든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되거든. 나는 주님과 약속이 있다.

나는 나의 사명과 선약이 있기 때문에, 너랑 지금 만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크리스천은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천성에 갈 때까지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시는 일들이 끊이지를 않는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가다보면,

질병도 우리를 못 좇아오고, 환란도 우리를 못 좇아온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을 사는 성도,

현재적 부활을 사는 크리스천의 증거이다...

행2:43~47의 상황이.. 자기 삶에 재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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