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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LNCK 2012. 5. 1. 13:16

https://youtu.be/M-1qCHExW5s

◈당황스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눅16:25          11.08.21.설교녹취

 

 

◑서론/ 누가복음의 특징

 

성경의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누가복음>의 특징은

다음의 4계층을 특별히 배려했다는 것이다.

 

1. 여성들을 특별히 배려했다.

누가복음은 유일하게 예수님이 안식일에 등이 굽은 여자를 고치셨고,  눅13:10~14

이 아브라함의 딸을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문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4복음서 중에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연약한 여자들을 배려하셨다는 내용이다.

 

2.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

누가복음에만 유일하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등장한다.

강도만난 사람에게 누가 진짜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하면

이방인 사마리아 인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누가복음만 기록하고 있다.  눅17:16

 

3, 죄인들에 대한 배려

유일하게 누가복음만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삭개오의 집에 찾아가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눅19장

 

누가복음에만 3개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비유가 나온다. 눅15장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아들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어거스틴이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불렀단 <탕자의 비유>가

누가복음에만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배려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4.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며, 인간의 가난을 영적인 가난으로 해석하려 했지만,

누가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좀 더 확실하게 가난을 지목했다. 눅6:20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는, 부자에 대한 비판을 자연스레 동반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라고 하셨다. 눅6:24~25

 

위 구절은 마태복음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인데,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즉, 누가가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더 분명하게 기록했다.

 

 

◑본론/ 당황스런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눅16장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관한 비유>이다.

 

▲1. 이 비유는 뚜렷한 특징이라면 결론이 없다.

결론이 모호하고, 어떤 교훈이 없다.

비유의 끝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하라’ .. 는 말씀이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끝에 ‘너희도 가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에는, 그런 결론을 찾아볼 수 없다.

 

‘너희는 그러므로 나사로처럼 되라’ 라든지,

‘부자처럼 되지 않으려 주의하라’는 말씀이 없다.

 

▲2. 뿐만 아니라, 왜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왜 거지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갔는지,

그 이유를 예수님이 명확하게 설명하시지 않는다.

 

나사로가 더 의로웠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부자가 더 불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일반적으로 부자가 불의하다는 얘기인지,

일반적으로 빈자가 더 의롭다는 얘기인지..

이러한 설명이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까, 이 비유를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게 된다.

우리가 읽어보면 이 비유의 교훈이 모호하니까.. 불편해진다.

 

▲3. 불편한 이유를 더 명확하게 말하면,

지옥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자가 죽어서 지옥 불에 던져져 고민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

‘지옥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지옥의 실재가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가?’

 

그리고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해서,

이 세상에 살 때 나사로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대로 부자가 죽어서 지옥 불에 떨어졌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부자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다.

 

취사선택할 수 있다면, 다 이 세상에서 부자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4. 또한 이 비유에 비 복음적인 성격의 내용이 나와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가장 쉽게 요약한 복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사람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그게 아닐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아니라,

‘빈자 천국, 부자 지옥’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과연 안전한 것인가?

내가 부자로 살려고 하는 동안에,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얘기인가?

 

만일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스스로 해 보신 적이 없다면,

성경을 아직 진지하게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의 검열(심의)을 통과한 것

 

▲1.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본문은 누가 자신의 ‘검열’을 통과한 것이다.

 

누가가 이 비유를 기록할 때,

자기가 무슨 내용을 쓰는지를 생각하지 않고서 쓴 것이 아니다.

 

이 누가가 누구인가?

탕자의 비유를 쓴 사람이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쓴 사람이고,

삭개오를 예수님이 부르시고 찾아가신 것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본문의 이 비유를 자기의 복음서에 포함시킬 때는,

자기의 다른 메시지를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죄인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이 진리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어려워할 필요가 없다.

 

▲2. 두 번째 이유는, 본문은 초대교회의 ‘검열’을 통과한 말씀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신학자 불트만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이후에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전하셨지만,

이후에 초대교회는.. <예수님>에 대하여 전했다는 것이다.

 

내용에 변화가 일어났다.. 는 것이 불트만의 주장인데,

만일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누가가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자기 복음서에 포함시킬 리가 없다.

 

왜냐하면 누가 자신도 초대교회의 산물인데,

만일 초대교회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오리지널로 전했던 메시지와 의도적으로 달랐다면,

누가가 왜 오늘 본문과 같은 어려운 말씀을 기록했겠는가?

초대교회가 그것을 포용하려고 했겠는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이 서로 다른 게 아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했다. 어떤 변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가가 이 비유를 기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교회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이 비유를 어려워할 필요가 없는 세 번째 이유는,

구원은.. 어느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도는.. 어느 정도의 겸손함이 늘 필요하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보장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도바울은, ‘너희의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라’고 하셨다.  빌2:12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긴장을 갖고서,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것이 유익하다.

본문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런 긴장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제가 옳은 길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고

하나님을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아무리 가깝더라도, 하나님을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부분이므로,

또는 내 믿음의 진정성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판단하시므로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늘 두렵고 떨림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늘 겸손함을 지키면서,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날마다 범죄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같아지면 안 된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가?

 

본문의 아이러니를 주목해야 한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였는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가 헌데를 핥으며, 그 부자의 대문앞에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며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여기서 아이러니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부자는 고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 하며 사는데,

바로 대문 밖에 있는 거지는, 부자의 대문 앞에 앉아서,

자기 아마 영양실조로 생긴 헌데를 핥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 부자에게, 세상의 모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운 거지만큼은, 해결해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운, 빈자를 돕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이가 없으셨다. 인간의 무관심, 인간의 이기심, 완악함, 무지함,

그래서 아무런 부연설명이 없이,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 불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가, 지어낸 비유가 아니라, 당시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라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비유’라는 말이 직접 언급되지 않고, ‘나사로’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예로 들어서 언급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경제문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빈자가 굶주리게 된 정치문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시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려니와..’ 라고 말씀하셨다. 마26:11

 

예수님이 여기에서 부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같지도 않다.

그럼 무슨 메시지인가?

 

다만, 자기 집 대문 밖에 있는, 자기 가까이에 있는 빈자에 대해서,

무관심한데 대해서.. 예수님이 진노하신 것이다.

유대인은 다 하나님을 믿는데 ‘신앙인이라면, 이것이 합당한 것이냐?’를 말씀하신다.

 

◑적용

 

지금 이 시대에, 일반적인 소비문화에 대해서, 한 마디 드리고 싶다.

사람이 살면서, 좋은 것을 누리고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부자처럼,

오늘 이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했다고 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 우리 시대에는 값비싼 명품 옷, 액세서리이다.

호화로운 잔치.. 고급 레스토랑, 고급 카페, 고급 여행, 고급 자동차

과시적 소비 conspicuous consumption 이다.

 

설사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대문 밖 사람들을 유념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일해서 벌었고, 내가 모은 돈이다..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법적으로 아무 저촉이 없다..’ 라고 말한다면,

사실 그렇게 하기가 쉽다. 특히 선교지에 가서 그러기 쉽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부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집 대문밖 거지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적어도 자기 대문 밖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은 부자의 책임이었다.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를 해결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 격차를 알면서도 허용한다면,

이 부자처럼 지옥에 갈 것이다.

(오늘날 이 비유를, 남북관계에 적용하시는 분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평하지 못하고 이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부자처럼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살다가

세상 떠날 때는 나사로처럼 천국 가기를 원한다.

 

그것처럼 이기적인 생각은 어디에 있으며,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다면,

하나님의 공평함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저는 이 본문의 메시지는,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리다가, 세상 떠날 때가 오겠지만,

그 때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천국이나 지옥의 내세를 말할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평함을 배제할 수 없다.

 

그 근거는 바로 이 구절이다.

아브라함이 이 부자에게 하는 말씀을 읽어보시라.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민을 받느니라.’ 16:25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평함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고난은 감수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설 때, 받을 위로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 받아 부자로 살고, 천국에서도 잘 살자’

뭐 이런 신학이나 관념을 갖고 있다. 설교의 주제나 근본사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장려하는 바는

이 세상에서, 주님과,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을 참는 가운데 인내하면서

‘저 천국에서 잘 살자’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복 받아 부자로 살고, 천국에서도 잘 살’만한 사람을 존경하는데,

천국에서는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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