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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고 아름답게 되기 3590

LNCK 2012. 5. 8. 21:34

◈총명하고 아름답게 되기         삼상25:23~33          11.11.13.설교스크랩

 

 

◑본론/ 아비가일의 내적 아름다움


본문 속에 그녀의 총명한 행적이 나타나지요? 

그녀는 살기의 광포로 가득 찬 다윗을, 길지 않은 시간에 양처럼 순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비가일의 모습은 ‘위기 수습’이라는 인생의 한 단면을 통해서

인생 전체의 문제에 대한 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뭐였을까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어떤 일에든 불평 불만하지 않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떤 순간에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1. 총명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전에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성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총명하고 아름답다’ 그랬습니다.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3


사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아름답긴 한데 앞에 ‘멍청하다’든지 ‘표독하다’든지 하는 말이 붙으면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지지요.


그런데 아비가일은 아름다운데다 총명하기까지 하다 그랬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인 겁니다.


이상한 것은, 그런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이

결혼은 정말 아니다 싶은 남자와 한 거예요.


아비가일의 남편이 바로 오늘 다윗을 분노케 한 장본인 나발입니다.

성경은 그가 완고하고 행사가 악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의 이름 나발은 ‘미련하고 불량한’ 사람이란 뜻인데

그게 그의 이름이 될 정도였습니다.

물론 별명이거나 아니면 후세 사람이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문은 더 커지는 거예요

어떻게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가, 이런 격에 맞지 않은 남자와 결혼한 걸까요?


이런 선택을 보면, 결국 여자도 남자와 비슷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생각해 봐야 할 질문입니다.

고대 근동의 사회도 우리나라와 풍습이 비슷했습니다.


당시 결혼은, 부모들이 정해주는 사람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저희 부모님도 14, 15살 때 얼굴도 모르고 결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비가일은 원치 않는 결혼, 또는 정략결혼의 희생물이었던 겁니다.


그래도 또 하나 의문이 남지요?

그런 안 좋은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총명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오늘 사태 수습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발견해 나가고자 합니다.


2.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녀의 남편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미련한 행동 하나로 온 가족이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어요.


그런데도 그런 남편의 행위에 대해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해결에 나섭니다.

사태의 전말을 하인에게 전해들은 아비가일은 즉각 행동에 돌입하지요. :18~:19


사실 아비가일이 이렇게 움직이기까지,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불평불만이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남편인 나발은, 정말 현실감각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쫓기는 자이지만 그에게는 600명의 군대가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부자지만, 나발은 민간인입니다.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쓸어버릴 수 있어요. 당시는 치안부재 상황입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실제로 나발은

다윗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죽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쭐거리는 감정 때문에

상황파악을 못하고 거들먹거리고 있는 거예요.

작은 힘, 작은 물질 가진 것을 무슨 굉장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남편의 모습을 봤을 때, 아비가일의 속은 어땠을까요?

마음속에서 그동안 곪은 상처가 터져서, 있는 대로 올라왔을 거예요.


‘늘 살아가는 게 그 모양이니,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며 분노를 터트릴 만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그녀가 원망이나 불평을 터뜨렸다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은 그녀의 모든 자존심이고, 가치고, 환경이고,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여자가 예쁘고 아름답다 해도,

남편이 비열하고 악하고 미련하다면.. 아내의 환경은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께 한 여성도가 상담을 하러 왔는데,

남편의 인격이 얼마나 엉망인지, 너무 고민이 돼서 살 수가 없다 그러더랍니다.


그래도 남편이 자기에게 상처 주고 고통을 주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비열한 행동을 하고,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은

보고 있을 수 없더라는 겁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마치 자기가 벌거벗겨져서 거리에 내쫓긴 느낌이더라는 거예요.


여자에게 남편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 아비가일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조금도 없이

지금 그녀는.. 사태 수습을 위해 현장으로 뛰어간 거예요.

우와! 그 내면적 인격의 힘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청년 때 얘긴데,

저와 친한 전도사님이, 친구 전도사 6분과 봉고차를 타고 어디를 다녀오시던 길에

그만 그 차가 저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전도사 두 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도 중태에 빠진 대형사고가 났습니다.


운전하시던 전도사님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때 그 전도사님은, 벌써 개척교회을 목양하셔서

교인이 몇 명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 김집사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자기 담임 전도사가 이런 사고를 쳤으니, 우선 불만을 터트릴 만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나서서 사태 수습을 다 했습니다.

우선 자기 담임 전도사님은, 친구 둘이 죽었으니 정신이 완전히 나갔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돌아다니면서 보험관계나 유족들과의 합의,

그리고 형사 건까지 경찰서를 다니면서 다 수습을 한 겁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웬만한 비용은 자기가 다 쓰고, 대접할 사람 대접하고,

사체 수습과 장례식까지 나서서 다 치렀습니다.


교회에 그런 사고가 났으면, 그 전도사님이나 교회는 큰 위기가 올 만한데,

그 교회는, 지금 안양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김집사님께, 고마워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여러분! 불만을 터뜨릴 때, 그 불만을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자기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김 집사님이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다는 데에는

자기가 사태 수습의 책임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지요.


본문의 아비가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망하고 불만을 터뜨렸어야 옳은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모든 일을 자기가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24절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라” 하는 말은 쉬운 것 같지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자기 내면이 튼튼하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되고 치유된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다윗을 모욕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자기 남편이지, 아비가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죄악은 내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아내니까요.”

이게 바로 불평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불평 불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그건 바로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일을 해결하려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지요.


원망과 불평을 터뜨린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은.. 해결의 도구가 아니고, 

(소리 없는 원망인) 신음이나 비명도.. 역시 치유의 도구가 아닙니다.


오늘, 나발이 일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비가일이 급히 음식을 나귀에 싣고 출발했다는 것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그녀는 남편이 이런 황당한 일을 저질렀을 때마다

비슷한 모종의 조치를 취해 왔다는 얘깁니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해 왔고, 바로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녀의 내면을 성숙케 하고 기품있는 여성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여러분! 불평 불만하지 않는 사람은 내면이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어떻게라도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미모는 그런 책임감과 자신감, 그리고 모든 잘못된 일은

자기의 불찰이라는 희생의 마음, 그 모두의 결정체입니다.


우리 역시 불평해야 할 때 그것을 참고,

오히려 내 스스로 책임자로서 현장에 뛰어들 때, 

아비가일에게 드리워진 후광 같은 아름다움이

우리에게도 왕관처럼 씌어질 것입니다.


그런 복을 받기 위해 불평불만 대신 내가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매사를 대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아비가일이 그런 총명함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녀는 언제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발의 뜻이 미련한 자라 그랬는데, 시편에서 다윗이 그런 노래를 하지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그런데 반대로 잠언 2:6~12 사이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지혜와 명철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직하고 선한 길을 보여 주신다’ 그랬습니다.


즉 하나님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자들에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분의 섭리와 뜻이, 무엇인지 아는 눈을 주신다는 겁니다.


지금 아비가일을 보시지요.

여러 정황을 볼 때, 그녀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일하실지도 보는 총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나귀를 타고 호젓한 산길에서 혼자 내려옵니다.

지금 살기등등해서 나오고 있는 다윗의 무리 앞에 아비가일은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나자 그녀는 얼른 땅바닥에 엎드려 말하지요. 

엎드려 말했지만 그 말 자체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꿰뚫는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아마 그녀는 다윗이 사무엘에게서 다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실까지 다 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 기간 동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이 된 다음에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   


제가 지금 아비가일이 한 말을 짧게 요약했지만

그녀가 한 오늘의 이 긴 말을 분석해 보면,

이건 수사학의 교과서로 써도 손색이 없는

정말 ‘유려’하고 설득력 있고, 장엄하기까지 한 연설입니다.  *流麗, 매끈하고 아름다움


말은 곧 그 사람 자체입니다.

아비가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성과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왕이 된 다음에 후회할 일, 창피당할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는 통찰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다윗은 그녀의 말 앞에 한 마디도 못하고 설득 당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아비가일은 이런 총명함과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제가 이걸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녀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사실 <불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은

엄청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즉 불평이 시작되는 순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되고,

원망이 생기면 하나님의 길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불평과 원망이 그쳐야

하나님의 길도 보이고, 하나님의 임재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조화 가운에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불평하거나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만약 이 일이 다윗의 계획대로 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사실 오늘 이 사건 바로 앞에는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살려 준 얘기가 나옵니다.


한 마디로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때의 다윗의 내면은 아주 아름답고 견고해 보였습니다.


극히 신앙적이었고 왕의 자질이 보였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한 평범한 사람(나발)의 완악함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뻔 했습니다.


완악함이 완악함을 부른 걸까요?

다윗은 지금 자기도 모르게 파괴자가 돼서 다 죽여버리겠다고

복수를 꿈꾸며 뛰어가고 있는 거예요.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자칫하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버릴 뻔 했습니다.


바로 이런 위기에게서 다윗을 구해주고, 대관식을 앞둔 사람으로서

큰 과오를 막아 준 사람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이 자기에게 한 말 때문에 정신을 번쩍 차렸습니다.

그리고 정말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다시 기억해 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 앞에 이렇게 고백하지요?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아멘!  :32~:33


그 뒤로도 남은 얘기가 있지만 이쯤에서 끝나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발은 곧 제풀에 죽어 버리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아마도 단순히 아비가일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자기의 큰 실수를 막아 준 그것 하나만으로도, 다윗은 평생 그녀에게 감사해야 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왕이 됐을 때 그녀의 안목과 통찰은

그 무엇보다 꼭 필요할 것이라 여겨서 아내로 삼았을 것입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아비가일의 아름답고도 총명한 모습이 어디로부터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를 어둡게 하고

우리를 못 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려면

우리에게 불평과 불만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 내면은 그 분의 살아계심을 인정함으로 인해서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름답고 총명해지는 길은 멀지 않습니다.

아비가일이 했던 말, 그녀가 갔던 길, 그녀가 행했던 일 바로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 있든지.. 총명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마십시오!

즉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미혼자들은, 아비가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 찰 수 있도록,

그것도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 아름답고도 총명해진, 멋있어진,

내면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견고해진 여러분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복이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론

 

실제로 자료를 보니까 심리학자와 의학자들이 똑같이,

‘사람의 얼굴은 심성(心性)따라 분명히 변한다’는 얘기를 해 놨더군요.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면, 양악수술을 하는 것 이상으로 예뻐지게 되고요,

조금 연세 드신 집사님 권사님도, 20년은 젊어지면서 아름다워 지실 것입니다.


방법이 어렵지 않습니다. 쉬워요.

오늘 우리는 그 방법을 아비가일이라는 한 여인으로부터 배우게 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지만,

설교가 단순히 미모에 대한 얘기로 그친다면, 그건 하나님 말씀이 아니겠지요?


놀랍게도 오늘 아름다워지는 방법과

우리 인생의 여러 문제를 푸는 방법은 똑같다는 겁니다.


즉 아비가일의 위기 대처 능력엔

그의 평소 라이프스타일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설교를 통해, 어떻게 아름다워질 것인가,

그리고 인생의 제 문제를 어떻게 풀 거냐 하는 등의 문제를

한꺼번에 생각하게 되기 원합니다.


▶본문 배경

다윗이 아비가일을 만나게 되는 배경인데요.. 주1)을 보십시오.


다윗의 부대가, 나발의 가축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면,

그 정도 호의를 제공했으면.. 양털 깎는 축제의 날에,

한 번 정도는 먹거리를 요구할 만 하지 않습니까?

또 주인의 입장에서는 한 번 대접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소년들을 보내서 주인 나발을 만나보게 한 겁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냐?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벌어지지요.

거절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발이 아주 무례하고 자존심 상하게 다윗을 대합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25:10~11


여러분! 우리도 살다 보면 거절을 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거절할 때, 정말 잘 해야 됩니다.


정중하고 완곡하게, 그리고 정말 단어 하나도 조심해서 사용해야지

이렇게 나발처럼.. 거절할 때 남을 무시하면.. 상상도 못한 후폭풍이 몰아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이름은 전 유다 내에 다 퍼졌습니다. 

골리앗을 이겼을 때도 “사울은 천천을 이기고 다윗은 만만을 이겼다”라는 로고송이

전 유다에 퍼졌고, 또 지금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유다 백성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을 향해 ‘다윗이란 작자가 누군지 알게 뭐냐?’ 하며 무시를 했고

더군다나 다윗을 주인에게서 도망간 종 정도로 여겼던 겁니다. 

자존심에 엄청난 흠집을 낸 겁니다.


다윗이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어떻게 하지요?

한 마디로 훽 뒤집어졌어요.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 하자면 꼭지가 확 돌아버린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이, 자기 부하들은 ‘종’이고

자기 자신은 ‘아들’이라고까지 낮췄는데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8


그래서 다윗이 뭐라 그러냐 하면,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2


지금 다윗이 제 정신이 아니지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랬겠어요?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서, 다윗이 여기서보다 더 벼락같이 화를 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 부하 400명에게 칼을 채워서 나발의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지금 상황은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칠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여태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노력도,

또 다음 번 이스라엘 왕 후보자라는 신분도 필요 없었어요.


이제 자기가 살아있는 목적은 나발 일족을 모조리 죽이는 일,

그것 하나 밖에는 없었습니다.

여태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처럼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오늘의 주인공 아비가일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벌집 쑤셔 놓은 것 같은 사태를 수습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내용입니다.

...................


주1)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던 와중에 생긴 일인데요. 

쫓기는 삶이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 생존할 뿐인 고단한 순간들입니다.


소망도 뭐 대단한데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한 번만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광야에서 그런 일이 있기는 만무(萬無)지요.


그런데 마온이란 곳에서 드디어 오랜 만에 먹는 것처럼 먹을 기회가 왔습니다.

거기에 양이 3천, 염소도 1천 마리를 갖고 있는 거부 나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가끔씩 축제날이 있었는데, 언제냐 하면 양털을 깎을 때였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수확해서 타작하는 날인 거지요. 


이때가 되면, 주인은, 동네 사람이든 외지인이든 다 맞아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나그네라도 먹을 것과 포도주를 대접하고, 잠시 수확을 나누는 좋은 풍습이었던 거지요.   


다윗이 자기 일행과 함께 광야에서 그 소식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 수하에 있는 소년들을 미리 보내서, 나발에게 부탁을 하지요.

여유가 되는 대로 좀 먹을 것을 나눠 달라 그럽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절대로 공(空)으로 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였습니다.


다윗 일행이 온 유대를 쫓겨 다니다 보니까

좋은 목초지를 따라 다니는 유목민들을 만날 것 아닙니까?


그럴 때마다 그들과 같이 있어줬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양치기들은, 다윗 일행 때문에 자연히 보호가 된 거지요.


지금 다윗 일행은, 일반인들로서는 보기만 해도 질리는 600명의 장정들입니다.

맘만 먹으면 누구든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군대 같은 존재들인 거예요.


그런데 무력을 쓰기는커녕, 같이 있어 주면서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줬던 겁니다.

나발의 양치기들도 다윗 일행으로부터 이런 보호를 받았던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자주 출몰하는 강도들을 만나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 정도 호의를 제공했으면.. 한 번 정도는 먹거리를 요구할 만 하지 않습니까?

또 주인의 입장에서는 한 번 대접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소년들을 보내서 주인 나발을 만나보게 한 겁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냐?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벌어지지요.

거절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발이 아주 무례하고 자존심 상하게 다윗을 대합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2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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