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 때가 있다 갈4:4 출처보기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믿게/ 깨닫게 해 주셔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다스려 가십니다.
언약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엔 정한 때와 기한이 있어요.
갈4:4절에,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도 시나리오 대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려고 오셨으니
자기 백성이 구원 받는 것도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 또한 정한 때까지, 율법이라는 후견인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때가 되면 율법 아래서 끄집어내십니다.
구원이란.. 율법 아래서 빼내심을 입는 겁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도, 아브라함과 언약 한 때가 차서 되었어요.
행7: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이걸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율법 아래 있다가 부르심을 입는 때가 정해져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심을 입고, 어떤 사람은 늦게 부르심을 입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 체험’ 이전엔 율법 아래 있었어요.
바울이 약 30세 정도에, 다메섹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렇다면 바울은 30년 동안 율법 아래 있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 주시지 않았으면
바울은 평생 율법지킴을 신앙이라고 믿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를 핍박하다가 지옥으로 갔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 예수님이 바울을 율법 아래서 불러내 주셨어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때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일어나요.
저도 수십 년 동안 율법 아래 있었어요.
그러다가 십 수 년 전에, 복음을 받았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다가.. 복음 안으로 빼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아직 복음을 모른다’고 조롱하면 안 됩니다.
언제 부르심을 입을지 모르잖아요.
택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고 믿도록 해 주세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어서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20년 전에 재림을 했거나 제가 죽었으면 저는 지옥에 갔어요.
왜냐하면! 전 그 땐 복음을 몰랐거든요.
그 땐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어서, 내 의가 충만 했어요.
당시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신자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다메섹 이전의 사울처럼, 철저히 율법주의로 살았거든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예수님이 그 때 재림하시지 않았어요.
저 또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20년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고 제가 죽지 않고 지금껏 살고 있는 것은
저는 예수를 믿고 천국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서 불러내서 복음을 믿게 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복음을 믿게(깨닫게) 해 주셔서,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깨닫고 증거하는 것은 제가 똑똑해서도 아니고!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되어서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서 에요.
▶성도들의 신앙의 프로세스(과정)는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지금 누가 복음 모른다(깨닫지 못했다)고 정죄할 수 없어요.
정죄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 우리는 판단 할 수가 없어요.
택한 백성이면.. 때가 되면.. 반드시 복음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판단하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알게 하실지 아니면
1년 후가 되든지 10년 후가 되든지 기다리자고요.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해서 간섭하시니까요.
그러므로 ‘당신은 왜 복음을 모르느냐?’ 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정한 때에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안다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치 못해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까지만 해도
정죄하는 그 사람들처럼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비밀’이므로, 깨달아야 합니다.
내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은혜로 깨닫고, 믿게 해 주십니다.
자기가 배워서 깨달은 지식이 아니므로
‘난 아는데, 넌 왜 모르느냐?’는 식으로 말할 수 없어요.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듯이
복음도 계속해서 들으면 지식으로 알게 되어요.
자신은 그 신비가 깨달아지지 않지만, 깨닫고 믿는 척 할 수 있어요...
복음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모습들이 나타나요.
‘아~ 이런 나 같은 죄인이 용서 받았구나!’
죄 용서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긍휼이 나타나요.
그러나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거드름을 피워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에게 선생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하고, 잘난 척을 해요.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어요.
진짜 복음을 안다면 비판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자신이 복음을 아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복음 아는 것을 절대로 자랑거리로 삼지 않아요.
이게 부르심을 입고 용서받은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사도바울이 구원을 받고 나니,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는 것이 깨달아진 겁니다.
복음에 대해서 악행하고 포행 자였던 자신이 용서 받고 보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비판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참아주고 이해하고 다가갔던 겁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저 사람에게도 임하지 않을까?’ .. 하는 심정으로 다가 갔어요.
그 심정이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였던 겁니다.
‘난 너희와 상종하지 않아!’ 라고 하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갔어요.
그러니 그 사람의 앉고 일어섬을 주님께 맡기고 기다리자고요.
이미 우린 복음을 받았잖아요.
그러니 여유롭고 관대해 지세요.
가진 자답게 좀 풍성해 지세요.
복음이 주는 넉넉함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세요.
누가 이단이라고 해도 그냥 씩 웃고!
‘그래 나는 당신이 보기엔 이단이 맞다!
당신도 나처럼 이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세요.
우리가 설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반드시 찾아낸다는 것을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포도원 품꾼을 부르듯이
어떤 사람은 아침에 포도원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점심때 들어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저녁때 들어가라고 합니다.
일꾼을 부르는 것은 주인이 정해요.
주인이 아침 일찍 부른 사람은 일찍부터 복음을 알고!
점심때 부른 사람은, 저 처럼, 수십 년 율법 아래 있다가 빼내심을 입고!
저녁 때 부른 사람은, 늙어 죽기 전에 빼내심을 입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불러 주신 주인을 찬양해야지 부르심을 입은 자신을 자랑하면 안 되어요.
아침이든 점심때든 저녁때든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것이지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복음 안다고 잘난 척 까불면 안 되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구원한다는 말은 살려낸다는 말입니다.
살려 낸다함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요.
그럼 죄인은 다 죽은 자란 말입니다.
맞아요. 모든 인간은 죽음에 가두어져 있었어요.
인간은 죽은 자로 태어나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죽은 자로 보아요.
인간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인 겁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인간도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은 자와는 함께 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것은
아담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영생의 세계에요.
죽은 자는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쫓아 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사는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장래에 장차 망하는 도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요1:4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 밖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 이외는 생명이 없어요.
다 죽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을 일컬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생명을 주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어떻게 주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서 주십니다.
생명이 사망에 먹힘 당하셔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주어져요.
(예수님이 짐승의 밥통에 나신 것도 다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날 먹으라는 겁니다.)
날 먹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이에요.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살려 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는다'고 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농부가 밀알을 심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한 알 심어서 한 알 얻으려면 심지 않아요.
한 알 속엔 엄청난 열매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심는 겁니다.
농부는 한 알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열매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한 알을 죽이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예수님 속에 수많은 열매를 끄집어내시려고
예수님을 심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은, 곧 생명을 심는 것과 같아요.
생명을 심었으니 수많은 생명들이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심었으면 죽음이 나올 텐데
생명을 심었기 때문에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세요.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수많은 성도들이 살아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죽었으면 혼자였을 텐데
죽었기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이 만약 안 죽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는 겁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심도 다 “정한 때” 가 있습니다.
그 때에 맞추어서 죽었어요.
이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라서 일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죽는 때가 정해져 있다함은
곧 성도가 구원 받는 때도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 사람마다 부르심을 입을 때가 정해져 있어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정한 때와 기한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복음을 말해도 귓전으로 듣고 콧방귀를 뀝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복음을 전했는데 대뜸 알아먹어요.
어떤 분은.. 복음을 들어도 지식적으로 듣습니다. 모태교인이 보통 그렇지요.
그러나 어떤 분은.. 복음의 신비를 깨닫고 믿습니다.
이를 두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복음을 듣게 하는 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10장에서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양을 찾아낸다고 하지요.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면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는’ 식으로 찾아냅니다.
목자가 앞서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므로 따른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목자와 양은 본능적으로 서로 끌어당긴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핏줄은 서로 당긴다는 말과 같아요.
그래서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들은 그 목자 뒤를 졸졸 따라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우리” 에 들지 않은 양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우리”란.. 목자의 죽음으로 생겨날 새로운 이스라엘을 말해요.
새로운 이스라엘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생겨납니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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