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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 없는 크리스천

LNCK 2012. 5. 23. 17:22

◈원망 없는 크리스천                   욥35:5~8, 요10:29              설교스크랩, 편집

 

크리스천에게는 결코 원망,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름 받은 것이 큰 복입니다.


TV 방송국에서 그해 드라마를 빛낸 연기자들을 시상하는 연말 시상식이 있지요.

대부분 시청률이 높게 나온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이 상을 탑니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런 좋은 작품에 출연케 해 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번 KBS 시상식을 보니 “아이리스” 라는 드라마에 출연한 탤런트들이

상을 받았어요.


거기 주연 배우가, 여자부분 우수연기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혹자는, 그 배우는 연기가 약간 어설프다고 말합니다.


그 분의 얼굴은 예쁘지만, 연기는 좀 그렇거든요.

그런데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어요.

(반대로 연기를 잘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연기력’이 주제가 아니고요..)


이는 그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아서, 그 상을 받게 된 겁니다.

그러니 배우가 큰 상을 받으려면,

일단은 <좋은 드라마에 캐스팅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기력보다, 인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단 캐스팅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에, 캐스팅이 된 탤런트들이에요.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세례요한도, 거지 나사로도,

스데반 집사도, 바울도.. 그리고 지금 우리도 캐스팅 되었어요.


연기로 치면, 우리도 어설퍼요.

어설프다 못해,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이지요.


그런데 상을 받아요.

거지 역이든, 돌에 맞아 죽는 역이든.. 드라마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성도는.. 예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 하나로 만족하여야 해요.

하나님 나라에 캐스팅 된 것만으로도.. 무한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다 조연인데,

거기 조연에 ‘상감마마’도 있고, ‘주막집 주모’도 있습니다.

‘상감마마’가 자기 캐스팅을 자랑할 필요도 없고,

‘주막집 주모’가 자기 캐스팅을 불평하면 안 됩니다.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이걸 알면 감사가 되고.. 불평이 안 나와요.


감사와 불평은 샴쌍둥이에요.

감사하면 불평이 사라지고.. 불평하면 감사가 사라져요.


저 같은 목사 입장에서 보면, 교인이 맞니/적니.. 불평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반차(班次)에 세워주신 것만 해도.. 저는 감지덕지입니다.

이런 영광이 또 어디에 있겠어요!


성도는 이런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반차에 속한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해요.


복음을 알고,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 이상 더 큰 행운이 없어요.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큰 그림을 보면, 십자가도 복됩니다. 


사람의 일은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어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래 가요.


그러니 살다보면

오늘 건강하다가.. 내일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멀쩡히 길을 가다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번창하던 사업이.. 갑자기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예수님이 주인공인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기 때문에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결과는.. 마지막에 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범사가 감사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큰 그림을 못 보면.. 불평이 많게 됩니다.

 

‘이게 저게 안 되면.. 난 행복이 다 날아가 버렸어!’

‘난 건강하게 잘 살아야 돼!’


그래서 눈만 뜨면.. 어떻게 살까 근심 걱정 하게 되어요.

이런 근심 걱정을 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직 관념(머리)에 머물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왜 예수 믿게 해 주었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매사에 불평이고,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진짜 구원 얻은 신앙이란.. 그 자체로 기쁨이고 소망이에요.

현세적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성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하도록.. 주님이 나를 강권해서 이끌어 가십니다.

Divine Driven Life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늘 감사한 겁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를 해체시키는 일이에요.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

난 내 인생이 없고,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는 인생만 있다!

오직 주를 위한 인생만 있다! ..

예수만 자랑되어지면 난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라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어요.


온통 ‘자기’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요.

-자기 복 받는 것

-자기 삶에 환란이 있는가, 평탄한가?

-자기 장래가 활짝 열리는가, 안 열리는가?


이렇게 ‘자기’가 우상인 사람은,

아직 진정 거듭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 거듭난 사람은, ‘자기’가 우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고 삽니다.

그런 과정에 ‘자기’가 망가지는 것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고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그런 성도들이, 매 시대마다, 항상 필요했고,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폼나게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폼생폼사가 아니에요. 반대로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 주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복음 속엔, 그리스도의 고난이, 반드시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핍박받고 욕먹는 일들이 생겨요.


그러면 ‘아,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욕을 먹기 위해 선택된 캐스팅이지!’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해요.


물론 쉽지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그 길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핍박 받음을 통해-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루어지니까요.

 

구약엔 선지자들이 이런 삶을 살았고

신약에선 12사도들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교회 역사에도, 매 시대마다, 이렇게 존귀한 삶을 사신 성도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 내려온 것이고,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속된 말로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아무 존재감 없이, 의미 없이 살았어요.

세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영웅호걸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예수 때문에 핍박받다가 죽은 성도들의 기록은, 세상 역사에는 없어요.

세상에선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 사고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교회도 수 십 억, 수 백 억짜리 무슨 사업을 추진해야.. 알아주고

변두리 교회에서 복음 전하는 사역자는.. 아무 존재감이 없다고 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에요.


우리가 이런 ‘세속적 사고’에서 탈피해서,

복음과,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보자는 것입니다. ←말씀의 주제


큰 그림을 보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욥기를 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욥35:5~8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6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위 말씀은, 우리 각자가 물론 신실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네가 죄를 범한들 그게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그게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느냐!

-반대로 네가 의로운들 그 의(義)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의 선과 악에 일희일비 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역사의 경륜>의 큰 그림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열심히/성실히 살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시고,

그와 반대로 내가 열심히 못 살고/ 성실히 못 살면.. 하나님이 내게 역사 안 하실 줄 압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그림’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구속사를 운행하시는 ‘큰 그림’에는

인간의 행위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일희일비 하지 않으십니다.


거기에 따라

하나님이 조변석개 식으로 바뀌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나고 못나고를.. 크게 보지 않아요.

잘나도 죄인이고.. 못나도 죄인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잘나고 못나고를, 하나님 앞에서 너무 따지지 말란 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세계에서의 판단이요, 가치관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과응보에 입각해서 판단합니다.

그래서 욥기에, 욥과 세 친구가 변론을 벌이는데,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엉뚱한 이야기로 모든 입을 막아 버립니다.


‘왜 광야에 비가 오는지 아느냐?’

‘너는 하늘에 별을 만들 때 있었냐?’

‘너는 바닷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너는 바다 속 물밑에 들어가서 걸어 다녀 보았느냐?’


‘너는 빛과 어둠을 가두는 창고를 보았느냐?’

‘너는 빗방울의 아비를 보았느냐!?’

‘너는 산 염소가 새끼 칠 때 뭐 했느냐?’

‘너는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주어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전능하심에 비교하면,

인간의 존재는 그야말로 ‘재와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운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너희가 판단하거나,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큰 그림’을 보면서, 입 다물고 있어야지,

인과응보에 입각한 개인 각자의 ‘작은 그림’으로,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이 하도 기가 막혀서, 자기 입을 막고 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도 모르는 자가,

너에게 일어나는 일을, 어찌 너에게서 원인을 찾느냐!’ 라고 묵사발을 냅니다.

‘내가 너희들 행동에 따라 일하는 시다바리(조수)인 줄 아느냐!’ 라고 혼쭐을 내십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러잖아요.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왜 나만 들들 볶아 대십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이렇게 모든 사건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자 하잖아요.

작은 그림을 보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엔 비가 안 오면 왕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곤 했어요.

자기 때문에 비가 안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비는 인간의 영향에 따라 오고 안 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더 큰 그림을 보면, 하나님이 주관하세요.


이런 것을 모르면 교인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기도한다고 난리잖아요.

꼭 기우제 지내는 것과 같아요.


새벽기도 안하던 사람이 새벽기도 나오면, 반드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걸 풀어 보겠다고 정성을 쏟는 겁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기도해야 지요.

그런데 ‘작은 그림’으로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게 되고, 해석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가 그리는 그림으로.. 주님을 끌어당기지 말고,

(물론 주님이 따라오시는 것도 아닙니다. 헛수고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주님의 큰 그림으로.. 내가 보조를 맞춰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에게, 불평이 안 나오고, 큰 그림을 보고, 오히려 영광을 돌립니다.


내 개인이 잘 나고, 영웅호걸적인 바람을 일으켜도..

큰 그림에서 꽝일 수 있고,


내 개인이 못 나고, 나아만의 여종처럼 ‘존재감이 제로’에 가까워도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에서.. 화룡점정처럼 그림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화룡점정.. 용의 눈에 점을 찍음으로써, (눈알을 그려 넣음으로써)

            비로소 전체 그림이 완성된다는 의미


박지성 선수가 아무리 산소탱크처럼 열심히 뛰고, 천금같이 3골을 넣었다 해도,

맨유 팀이, 상대방에 패하면.. 아무 의미가 없고,


거기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후반 종료 3분을 남기고, 수비선수로 투입되었더라도,

맨유 팀이, 상대방에게 이기면.. 모두에게 승리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문의 주제는

-오늘날 모두가, 백이면 구십이 ‘자기 성공과 실패’로 인해 일희일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도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도..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 거듭나고, 진정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는,

 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큰 그림을 봅니다.

 (‘자기 성공’이라는 작은 그림이 아니라)

 그 큰 그림의 완성을 위해서,

 ‘자기 성공/실패’의 작은 그림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큰 그림의 완성을 위해서는

 ‘자기 성공’이 필요할 수도 있고, ‘자기 성공’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실패’가 필요할 수도 있고, ‘자기 실패’가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서는 크게 성공했으나 목회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크게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으며,


세상에서는 존재감이 제로였지만,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크게 평가받는 경우가.. 무수히 나타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그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짜 숨은 일꾼은

존재감 제로의 ‘기도하는 성도’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활동하는 내로라는 일꾼이기 보다는!


......................... 더 읽으실 분 ....................



바울은,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롬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평소에 잘 음미해 보십시다.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 이는 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어요.

천사들이나, 권세자이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로도 끊어지지가 않아요.


이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에요.

천사란 영물인데 여기선 마귀를 말해요.

마귀도 성도의 구원을 끊지 못해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협이나 칼이란 외부적으로 오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 전하다가 불이익을 당한다고 하여도 낙심치 말라는 겁니다.

온 세상이 이단이라고 하여도 구원은 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근이나 적신이나 하는 것들은 살아가면서 당하는 아픔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을 밥 먹듯이 당하였어요.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붙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이 닥치더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설령 사고 나서 죽는다 하여도 부활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처럼 죽어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에요.

성도의 구원이 얼마나 안전한가 하면 죽음까지라도 갈라놓지 못해요.

그러니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성도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9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 손을 챙겨 잡고 시장에 다니듯이 그렇게 다닌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요.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붙잡고 있으면 수시로 놓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너무도 화려하고

우리 눈길을 사로잡고 발걸음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가지 못하듯이 한다구요.

이때 엄마가 아이 손을 낚아채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그 믿음을 우리 힘으로는 지켜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믿음을 우리에게 관리하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관리 하시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예수를 주로 믿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관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관리 해 주셨듯이 앞으로도 관리 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취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취소 될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