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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채찍, 인생막대기

LNCK 2012. 5. 4. 09:57

◈사람채찍, 인생막대기         삼하7:14~16          출처보기

 

 

◑1. 회개와 징계

 

범죄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회개 기도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죄로 말미암아 점점 몰락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기억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 기도가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일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상태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다시 재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이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을 비인격으로 대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기계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만 하면,

마치 죄가 다 용서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슬퍼할 줄 아는 인격이십니다.

정말 내 마음에 ‘회개의 진정성’이 드러나야 하며,

즉 ‘내 죄에 대한 애통’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도, 우리를, 인격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자기 마음에 ‘사죄 받은 확신’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범죄 했을 때, 그 죄 행위만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는 마음을 해결하기 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이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의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했고 어린 시절부터 죄 짓기를 쉽게 생각했으며

습관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고, 기질 속에 혈기와 분노가 있는 근본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근본 마음 바탕이 변화되지 않은 채)

내가 누구에게 화를 냈다,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는 등

겉으로 드러난 사건만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 밑에 있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회개해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어떤 죄에 대한 ‘징계를 주십니다. *discipline : 훈육이란 뜻. 긍정적 의미

 

그때 “내가 다 고백했잖아요. 잘못했다고 뉘우쳤잖아요?”라고 항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 있는가를 이해하고, 징계하심의 뜻을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창3장에,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덮어주셨습니다.

수치를 가리우시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대가도 치르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하셨고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의 다스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남자들에게는, 땀을 흘리고 수고해도 척박한 땅에서 수고한 대가를 다 얻지 못하고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면서, 직업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고

정결하게 되는 구속의 방법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은혜로 죄사함 받고 입술로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활 가운데서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그러나 더 나가야)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는 이 연단과 구속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오랜 세월을 믿어도, 근본적인 본성이 변화가 되지 않고, 신앙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귀를 닮았던 우리의 종자가, 하나님 성품의 종자(근본)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는 일마다 행악의 씨앗을 뿌렸던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흩뿌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삼하7:14~16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서만이 아닌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 속의 인격구조를 정결케 하십니다.

 

아마 가정마다 어려움이 다 있을 것입니다. 부부 관계의 어려움, 자식 문제,

혹은 시댁이나 친정의 어려움 등 갖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괜히 나를 미워하고

내가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엄청난 범죄를 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 나서,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죄를 지적했고,

그때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다윗의 회개기도를 받으시고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하12~20장까지

다윗의 가정과 이스라엘 나라에 우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용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다윗 왕가에 계속 어려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받은 형벌punishment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그의 성품을 수술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징계discipline인 것입니다.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목적이 엄연히 다릅니다.

   형벌은.. 파멸이 목적이고, 징계는.. 회복이 목적입니다.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의 영향력은 계속 끊어지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이 사건을 출발로 해서

다윗 속에 있는 기질, 못된 성품, 육신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잘못된 성향,

그의 피 속에 흐르는 망령된 행실 등을 깨끗하게 해서

다윗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수준까지 끄집어 올리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주의 일을 안 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다 합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착착 풀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여전히 안 풀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예수를 잘못 믿고 불의하게 살아서 어려움이 있는지 알았더니

예수를 잘 믿어도 어려움이 있구나 생각합니다.

 

교사도 하고, 성가대로 섬기는 것도 고귀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내 성품의 변화, 마음 근본 바탕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만약 그게 안 되면,

아무리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내도.. 여전히 ‘갈굼’ 당합니다.

그 목적은 ‘회개하라!’입니다.

 

이렇게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합격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징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데는 큰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줘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지금 범죄해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윗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하나님적인 존재’로 변해 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바른 응답

 

다윗이 징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정결케하기 위해서 그를 다루실 때

다윗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 귀중한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일이 잘 안 풀려질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포기함

첫 번째로, 우리가 고난당할 때는, 이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삶을 지배하시는 통치자요

결국 심판하러 오실 심판의 주라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나의 태어남, 나의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진행, 인생을 마치기까지의

모든 삶의 여정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어떤 사건 앞에 부딪혔을 때,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또 어려움을 준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다윗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잘 보십시다.

삼하16:5~14,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리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10-11절,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다음 12절에서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시므이가 아닌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습니다.

“정말 내가 회개했는지,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던 그 사실을

내가 시인하는지를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너희가 어찌 이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내가 여기서 합격해야 하나님이 내 원통함을 풀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잘 나갈 때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기분이 덜 나쁩니다.

그러나 사업이 좀 어려워지든지,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누가 옆에 와서 빈정거리거나 약을 올리면,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집니다.

 

그것도 내 기준에서 볼 때 좀 수준있는 사람이 얘기를 한다해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자기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한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사람이

경멸과 모독의 언사로 “그건 하나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도망치는 상황이라 해도 일국의 왕인 다윗을

지금 그런 식으로 대접을 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주시고 역경의 시간을 주셨을 때,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질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시므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이 비밀을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서 잘되는 것은 허망한 것이요 거품이기 때문에

차라리 적나라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내가 죄를 버리고

정결케 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고,

시므이를 통해서 진짜 다윗이 회개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막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딴 길로 가려고 하는

타락한 나의 기질과 본성이 내 원수입니다.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김집사가 아닙니다. 열 받게 하는 자녀가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밤을 새워 진땀을 흘려가며 씨름했던 ‘그 어떤 사람’,

야곱은 그 밤에 그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동녘이 밝아올 때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자기를 시달리게 했던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0년 동안 삼촌의 집에서 삼촌에게 이용당하고

사촌 형제들에게 시달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면서 살았던 그 많은 세월들,

‘그 어떤 사람’, 내가 가는 곳곳마다 복병으로 숨어 있으면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어떤 사람들’,

 

결국은 나의 환도뼈를 부러뜨려서 절뚝거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 어떤 사람이

내 부모가 아니고, 시동생이나 시누이가 아니고, 내 돈 떼먹고 도망친 그 놈이 아니라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내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절뚝거려야 이 씨름은 끝이 납니다.

지지 않으려고 계속 버티면 이 씨름은 더 길어집니다.

 

고난의 기간은 우리가 단축할 수 있습니다. 2년 만에도 가나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태여 40년을 채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그만 고난의 세월을 더 벌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빨리 잡아야 합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2.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함

두 번째로, 다윗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는 말씀으로 돌아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회복되면

반드시 말씀과의 관계가 회복돼야 합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신게 무엇이었습니까?

삼하12:9-10에서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말하고

10절에서는 “나를 업신여긴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말씀을 멸시(업신)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릇 행하였다’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욕이 요구하는 대로, 욕심이 요구하는 대로

기분 나쁘면 배신해 버리고, 기분 좋으면 아첨이라도 하는 것이

우리의 옛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한 이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시119:71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당한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례를 배우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내 멋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아래 붙잡히게 되고 하나님이 연단하실 때에는

내 모습을 버리고 말씀 앞에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르는게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 봅시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를 품어주라. 기다려줘라.”

 

내가 이때 어느 메시지에 순종해야 합니까?

여러분,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개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나를 용납 못하는데 내 남편을 어떻게 평생 100점을 주면서 살 수가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이 감정을 누가 충족시켜 줍니까?

 

우리는 감정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따르라고 하면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좋아도.. 말씀이 안된다고 하면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고난을 통해 연단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의지로 결단해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회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3.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함

세 번째로, 다윗은 고난 당할 때에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샀습니다.

 

삼하15: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다윗을 따랐던 심복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도망을 쳤습니다.

 

압살롬을 대적해서 빼앗겼던 왕위를 다시 되찾을려 하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어떤 면에서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20절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왕좌를 빼앗기고 도망자의 신세에 있을 때

남아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이라도 시켜서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방위사령관격인 잇대가 육백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좇아 왔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도망자의 신세다. 지금 나를 따라 오지 말고 돌아가서 압살롬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또 있습니다. 삼하25:26절을 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따라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궤만 가지고 나오면 압살롬이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 편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언약궤를 들고 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시면 내가 다시 언약궤를 볼 것이요

언약궤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봤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서 다시 왕위(王位)를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는 인격적으로 잘하다가도 도망칠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입지를 위하여 보다 많은 사람을 확보함으로 지지를 얻어

자기의 정당성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지 법궤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용사가 나를 지원해 주고 언약궤가 따라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합당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게 축복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면 이 모든 위기는 다 원상복귀될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믿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뒤처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거나 코너에 몰리면 그 사람의 본체가 드러납니다.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4. 말을 조심함

(중략)

 

3.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큰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종자가 (내면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욥기서 1장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에스겔서 14:14절과 20절을 보면 이 지상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사람

세 사람을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는

요즘으로 말하면 그가 교회당을 건축하고 헌금을 얼마를 했고, 전도를 몇 사람 했고,

어마어마한 사역을 했고, 굉장한 직분을 받아서라고 표현하지 앉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에 악에서 떠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성품,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굉장한 사역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인 9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다 외적인 행함이 아니라 내적인 성품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가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마5장에 팔복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 8가지를 말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입니다.

이게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 내가 장차 큰 쓰임 받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시는 분이 있다면

먼저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합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을 자꾸 오해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의 행위나 사역은 외식이 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성품, 우리의 기질,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생각을 신령하게 바꾸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 보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평판이나 여론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몇 점짜리냐, 이것을 회복하는 게 우선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멋있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가 압살롬의 반역을 거론하고, 다윗 왕가의 비극을 계속 나열한 것은

다윗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환경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시어머니가 나를 괴롭히고,

부부간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자식이 골치를 썩이고 나를 괴롭히는 등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왕권을 회복합시다. 실수했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 힘들다고 좌절하지 맙시다.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우리의 중심이 결실을 거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기도/ 최선을 다했는데도 풀리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을 안고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쯤 더 기다려야 좋은 날을 볼 것입니까? 내 원수가 나를 비난하며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험들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주여, 이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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