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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장 해석, 4명의 서로 다른 욥

LNCK 2012. 8. 2. 20:31

◈세 친구들에 대한 욥의 마지막 변론1      욥27장        출처, 정리  

                                                                                      ◈ 욥기

*부제: “4명의 서로 다른 욥” 



이제 27장으로 지루했던 3라운드의 논쟁이 실질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친구들의 말은 엎칠락 뒤칠락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이,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본문은 세 차례에 걸친 논쟁을 종합해서

세 친구 모두를 겨냥한 욥의 대답이라고 보면 됩니다.


욥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는 죽기까지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겠다는 맹세와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이 대가를 치르고야 말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1. 자기 결백에 대한 욥의 맹세          27:1~6


욥은 세 친구를 향하여 자신의 결백을 또 다시 주장합니다.

이제 논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봐서 그런지 아주 비장한 각오로 무죄를 맹세합니다.


1 욥이 비유로 말하였다.

2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분께서 나를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신다.

3 내게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내 코에 불어 넣으신 숨결이 내 코에 남아 있는 한,

4 내가 입술로 결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내가 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5 나는 결코 너희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겠다.

6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


여기 보면 욥은 맹세할 때 흔히 쓰는 용어들,

즉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2절),

‘나는 죽기까지’(5절) 등의 말을 내 세우며 자신의 결백을 천명합니다.


여기서 ‘호흡’과 ‘숨결’이라는 말이

신체 기관인 ‘코’와, ‘악한 말’과 ‘거짓 말’이 ‘입술’과 각각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의 양심과 신체 기관까지도 하나가 되어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한다는 뜻이지요.


욥의 결백에 대한 맹세는 하나님과 친구들과 자기의 양심을 겨냥합니다.

자세히 말하면, 2~3절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자신이 정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개탄합니다.


4~5절은 친구들을 향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한 말이 결코 악한 말이나 거짓말이

아니며, 오히려 친구들이 내뱉은 말이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6절은 욥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향하여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이

조금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욥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당한 징벌을 주시는 것을 인정하거나

친구들이 악인이라고 몰아 부치는 주장을 수용할 경우,


욥이 지금까지 사력을 다해 펼쳐온 무죄 주장은 다 악한 말이요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욥은 ‘맹세’라는 아주 엄중한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구들과 자신의 양심을 향하여 자신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2. 욥의 원수들에 대한 저주   27:7~12


7~12절 말씀은 동방의 의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인

욥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랄합니다.


먼저 7~10절을 보세요.

7 내 원수들은 악한 자가 받는 대가를 받아라. 나를 대적하는 자는 악인이 받을 벌을 받아라.

8 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의 생명을 끊고, 그의 영혼을 불러 가실 때에,

   그의 희망이란 과연 무엇이겠느냐?

9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겠느냐?

10 그들은 전능하신 분께서 주시는 기쁨을 사모했어야 했고, 그분께 기도했어야 했다.”


착한 사람 욥에게 나온 말로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아주 심한 독설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생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도 있듯이

친구들이 해도 너무 하니까, 욥이 이렇게 극단적인 저주를 퍼붓는 것일까요?


친구라는 것들이 낡은 이론인 인과율만 가지고

자기를 아예 악인으로 단정하고 죄인 심문하듯이 다루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서 이런 독설을 내뿜는 것일까요?


욥은 이렇게 죄 없는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친구들을 비롯한

모든 ‘가상의 원수들’에게 준엄한 심판이 있음을 탄식조로 규탄한 뒤

이제 친구들을 직접 겨냥합니다.


*‘가상의 원수들’이라 함은,

욥이 직접 ‘너희 친구놈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3인칭을 주어로 해서 막연하게 ‘내 원수들,’ ‘대적하는 자,’ ‘그’라고 빗댄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11~12절


11 날더러도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큰지 가르치라고 해 보아라.

    전능하신 분께서 계획하신 바를 설명하라고 해 보아라.

12 그러나 그만두겠다. 이런 일은 너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그처럼 터무니없는 말을 하느냐?


친구들이 걸핏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운운하며, 자기를 가르치려고 하는데

자기더러 설명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도 다 알고 있는, 이같이 공허한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처럼 부당한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을 일방적으로 변호하는 공허한 말을

자기는 피하겠다는 것이지요!



◑3. 악인의 비참한 최후    27:13~23


13~23절은, 이제 욥이 <인과율>을 주장합니다.

세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말하며, 공격합니다.


악인은 그 많던 자손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고

살아남더라도 가난과 질병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14~15절).


14 비록 자손이 많다 해도, 모두 전쟁에서 죽고 말 것이다. 그 자손에게는 배불리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다.

15 살아 남은 사람은 또 염병으로 죽어 매장되니, 살아 남은 과부들은 기가 막혀서 울지도 못할 것이다.


▶악인은, 아무리 재산을 많이 긁어모아도 의로운 사람 차지가 되고 말 것이며

결국 알거지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16~19절).


16 돈을 셀 수도 없이 긁어모으고, 옷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17 엉뚱하게도 의로운 사람이 그 옷을 입으며, 정직한 사람이 그 돈더미를 차지할 것이다.

18 악한 자들이 지은 집은 거미집과 같고 밭을 지키는 일꾼의 움막과 같다.

19 부자가 되어서 잠자리에 들지만,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다음날에 눈을 떠 보면, 이미 알거지가 되어 있다.


악인은 두려움에서 떠나지 못하며 순식간에 재앙을 만나서

모든 것을 날리게 된다는 것입니다(20~23절).


20 두려움이 홍수처럼 그들에게 들이닥치며, 폭풍이 밤중에 그들을 쓸어 갈 것이다.

21 동풍이 불어와서 그들을 그 살던 집에서 쓸어 갈 것이다.

22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써도, 동쪽에서 오는 폭풍이 사정없이 불어 닥쳐서, 그들을 날려 버릴 것이다.

23 도망가는 동안에 폭풍이 불어 닥쳐서, 무서운 파괴력으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할 것이다.

  

※위 13~23절 단락을

욥의 발언이라고 보지 않는 견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욥이, 이런 나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1. 빌닷이나 소발의 발언이라고 보는 이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과율, 악인의 필망>을 주장하는 것이, 3친구의 논지와 똑같고,

   소발이, <3차 논쟁>에서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맥은, 빌닷과 욥의 논박이므로,

   빌닷이 말한 주제와 일치하므로, ‘빌닷의 말일 것이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는

   ‘소발이 말하였다’, ‘빌닷이 말하였다’는 구절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혹자는, 이 단락이, 

   욥이 친구들이 했던 말을 풍자적으로 되풀이한 것으로 봅니다.

   욥이 친구들의 주장을, 반어법으로 빈정거리며 비꼬는 말이라는 겁니다.

   즉, 욥은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지만, ‘과연 그렇겠군!’하며 비꼬는 것이지요.


3. 그런데 가장 자연스럽게 보면, ‘욥도 인과율을 주장하며, 친구들을 저주했다’ 입니다.↓ 

   

▶욥도 <인과율>을 주장합니다.


앞서 24:18~25에서도, 욥은 <인과율>을 주장했었습니다.

엘리바스의 3차 공박에 대한 답변으로, 욥도 <인과율>을 주장하면서,

다시 말하면, ‘엘리바스, 너는 나를 공격하다가, 벌 받을 것이다’라고 맞받아 친 것이지요.


똑같이 본문 27:13~23에서도, 욥은 <인과율>을 주장하면서,

빌닷의 3차 공박(25장)에 대응합니다.

‘빌닷, 너는 무죄한 나를 공격하다가, 벌 받을 것이다’라고 맞받아 친 것이지요.


이것은, ‘자기 결백에 맹세’까지 하며 주장하는         

27:1~6절의 문맥과도 일맥상통합니다.


27:1~6절에서, 자기 결백을 맹세해 놓고,

27:7~12에서, 친구들을 저주하며

27:13~23까지, 악인(친구들을 포함한)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말합니다.


인과율은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욥이 6장~27장까지 변론한 것은,


‘인과율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반박한 것이지,

‘인과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도 ‘인과율’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욥기에서 배우는 것은

‘인과율로 이웃을 공격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웃을 공격할 때 보면, 꼭 인과율에 근거해서 공격합니다.

그래서 신자인 경우,

‘내가 아프다. 애가 다쳤다. 사업이 어렵다’는 얘기를 일절 못 꺼냅니다.

그 말을 꺼내면, 위로는커녕, 주위로부터 인과율을 근거로 공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일수록

자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 자기 스스로 인과율로 생각하고

‘아, 내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구나!’


이웃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 하나님의 연단으로 생각합니다.

‘아, 하나님이 그를 더 크게 쓰시려고, 그에게 가시를 주시는구나!’



◑교훈 및 적용       


▶욥의 의로움의 자기 맹세.. 과연 정당할까요?    27:1~6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양심에 따른 맹세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욥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자기 양심의 이름으로 죽기까지

자기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맹세했습니다.


이제 친구들과의 논쟁이 아무 결말 없이 파국으로 치달리니까

최후통첩 형식으로 자신의 무죄를

이렇게 엄숙한 맹세의 방법으로 선언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욥기의 가장 큰 주제가 <자기 의로움>의 깨어짐입니다.

욥이, 일반 사람들보다 평균 이상으로 의롭고,

세 친구들보다 의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욥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만큼 의로운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욥이 띠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게 됩니다. (42:5~6)

    ☞ 42:1~6  욥이 받은 축복은 회개


그리고 32장부터는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그도 또한 욥을 나무랍니다. (물론 세 친구들도 나무라지만요)


▶욥기에는 <4명의 다른 욥>이 등장합니다.

1. ‘하나님께서 아시는 욥’

2. ‘욥 자신의 양심이 아는 욥’

3. ‘사탄이 아는 욥’

4. ‘친구들이 아는 욥’

네 가지의 욥이 서로 다툽니다.


3번 ‘사탄이 아는 욥’ 과, 4번 ‘친구들이 아는 욥’은 길게 거론할 필요 없습니다.

그건 틀린 내용이니까요.


문제는 1번과 2번의 차이/괴리입니다.

 

27장에서, (시종 내내 그랬던 것처럼) 욥은 자기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이만큼 재앙을 당할 만큼, 잘못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양심에 걸고 맹세합니다. 27:6


2번, ‘욥 자신(의 양심)이 아는 욥’의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번, ‘하나님께서 아시는 욥’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또한 성경은, 양심도 부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그 양심도 타락한 상태로 변질되었습니다.


▶신앙은, 1번과 2번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시는 나’ 와

2. ‘나 자신의 양심이 아는 나’ 사이의 간극을 줄이면 줄일수록,

그는 성숙한 신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나 자신을 똑바로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쉽게 풀이하자면,

‘나를 내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봐야 ..

자기 자신을 가장 똑바로 (죄인인줄) 알게 된다’는 논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욥은,

아직 그 간극의 차이를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이 자기 스스로 의롭다는 것은

2번 ‘욥 자신의 양심이 아는 욥’의 시각에서, 의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3번과 4번의 시각보다는 옳은 것이지만,

1번의 시각으로는, 틀린 것입니다.


앞으로 욥이, 어떻게 이 1번과 2번의 간극을 메워가는지..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신앙생활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강추) 

크리스천에게는 두 가지 실존이 있다.

하나는, ‘매일 직면하는 현실’이 있고,

또 하나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이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현실’과 ‘믿음의 이상’은

상당히 거리가 멀다.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의 이상’으로 접근해 가려는 용기를 잘 내기 어렵다.

즉, 현실은 현실이고, 믿음은 믿음이라는

두 실존이 평행선을 그리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살아간다.

무슨 ‘경건의 연습’ 따위는 실종된 지 오래다.

영적 성숙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믿음의 삶이란, 끊임없이 경건의 삶을 연습해 가는 과정이다.

경건의 연습이란, 그런 ‘현실’과 ‘신앙 이상’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좁혀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내 현실’이 마침내 ‘믿음의 이상’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 설교문 전체를 보시려면 ☞  믿으면 자유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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