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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모순

LNCK 2012. 5. 12. 17:53

◈신앙의 모순            히12:2~3, 학1:14       스크랩 글 토대로 재작성

 

 

요즘 제 머릿속에 몇 달 동안 늘 맴도는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서로 180도로 모순되는 명제가 종종 나옵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 모순되는(서로 정반대되는) 명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과거에..

한쪽만 진리로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신학적으로 고착화/정형화 되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순되는 두 명제를.. 둘 다 모순 없이 받아들입니다.’

성경에 둘 다 말하고 있으니까요.

한 개의 명제로 다 설명할 수 없으니까, 모순적 명제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신앙의 수동성과 능동성에 관해서..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편.

 

 

◑신앙의 수동성 

 

▶1.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자신은 복중에 짓기 전에 하나님이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고!

나오기 전에 이미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운명이 결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패망을 외치고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친구들에게 욕을 먹고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삶을 살았어요.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예레미야가 이렇게 태어나고 이런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그렇게 썼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도 평상시에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어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환호를 합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마치 북한 주민들이 도로변에 서서

외국 국빈을 맞이할 때 꽃을 흔들면서 열광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유대인들도 뭔가 홀려서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구도 이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았어요.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러라고 시키지 않았어요.

종교지도자들도, 시키지 않았어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는데

백성들에게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라고 할 리가 만무하지요.

 

그럼 누가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게 하셨을까요?

이는 주님께서 백성들이 마음을 흥분시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움직여요.

하나님이 마음을 흥분시켜 주어야 해요.

 

▶3. 학개서를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짓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마음을 ‘흥분시켜서’ 지었다고 합니다.

 

학1: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니

모두 다 성전을 짓는 역사에 동침을 한 겁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것

또 헌금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시키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하다못해 남에게 자장면 한 그릇 사 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 시키셔야지만.. 기쁜 마음으로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자들이 헌금을 쬐끔만 한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켜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흥분시켰는데도,

신자가 불순종해서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그가 하나님께 갈굼 당할 테니까...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우리가 다 과거에 이런 체험을 해서 잘 압니다.)

 

어쨌든 헌금이 안 들어오는 것도,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이지,

‘나와 교우님들과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를 해도.. 주님께!

원망을 해도.. 주님께 해야 할 일입니다!

 

▶4. 다윗도 성전을 짓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헌물을 요구하자

백성들이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차고 넘치도록 바쳤어요.

 

백성들이 너도 나도 힘에 넘치도록 헌물을 했어요.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우째 백성들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나이까!’ 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어요.

 

대상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도

하나님께서 흥분시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흥분시켜주어서 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베푸는 것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시켜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절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대처해 나가야지

나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대처해 나가면.. <인본주의>에 빠집니다.

공동체가 .. 세상 기업처럼 되는 셈이지요!

   

어떤 사람은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데도, 헌금이 풍성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서 (감동으로)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체험해 봐서, 잘 알지요!

 

그러므로 교인들에게 충성 봉사를 강요할 이유가 없어요.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받은 은혜가 없는데.. 억지로 봉사하라고 하면 신경질 내요. <이상 스크랩 글

 

 

◑신앙의 능동성 

 

성경에는 ‘수동태’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능동태’를 강조합니다. ‘너희가 적극적으로 믿어라!’는 것이지요.

 

아래 구절은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이렇게 시작합니다.

‘Let us~’는 ‘뭘 합시다!’ 라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권유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우리 눈을 고정시키자’는 권면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무슨 즐거움일까요?

무슨 즐거움이기에,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을까요?

 

몇 분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상 받을 즐거움.. 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후에.. 보상 받을 시간 없이.. 돌아가셨거든요.

 

-천국 상급을 받으실 즐거움

 그 천국 면류관을 받으실 즐거움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실 것일까요?

 

-제가 묵상한 결과, 내린 결론은

 ‘영혼이 구원 받는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은 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그럼 내게는 ‘예수님 같은 즐거움’이 있습니까?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없으면.. 좀 곤란합니다.

‘십자가를 참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의 즐거움 때문’이었는데,  for the joy set before him   

 

우리가 ‘그 앞의 즐거움(영혼이 구원 받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2.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scoffing its shame

히12:2절의 이 말씀도,

‘수동형’보다는 ‘능동형’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NIV는 scoffing its shame이라고 번역했는데,

‘부끄러움을 무시한다. 경멸한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자기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그 앞의 즐거움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게 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게 되고’

 

이어서 히12:3절에는 이렇게 계속 설명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지 않게 되고, 낙심하지 않게 된다.. 고 합니다.

 you may not grow weary and lose heart

 

성경에 다른 구절도, 이런 ‘능동적 권면’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히12:2~3절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가운데,

-예수님처럼 ‘그 앞의 즐거움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게 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게 되고’

-너희가 피곤하지 않게 되고, 낙심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 체스의 고수이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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