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친한 사이가 되려면 막9:1~13 출처보기
혹시 나 자신은 예수님과 아주 친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십중팔구는 뭘 모르고 하는 오해일 것입니다.
아주 어색한 관계에 있으면서, 친한 줄로 아는 것이 대부분 신자들의 영적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정말 친해질 수 있는 길을 한 번 살펴봅니다.
‘좋으신 예수님 참 좋으신 나의 예수님’ 찬양도 부르고 그러지만,
아주 어색한 관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내 신앙생활이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과 친했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리다
▲어색한 관계의 예
A집사와, 새로 전입 온 B집사는 교회에서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A집사는, 사업 차 어디를 가는 중에
마침 B집사가 근무한다는 방송국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B집사에게 전화를 한 번 걸어보니,
흔쾌히 자기 사무실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집사는, 방송국 구경도 할겸, B집사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B집사가, 방송국에서 ‘간부’ 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렇게 높은 직책일 줄은 몰랐답니다.
마침 B집사는, 무슨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여러 직원들이 도열해 있고,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비서가 옆에서 수행하는 등
B집사가 ‘높은 사람’인줄은 알았는데, 그렇게 ‘높은 사람’인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집사는, 그의 집무실에서 B집사와 차를 한 잔 같이 마시게 되었는데..
그만 사이가 예전 같지 않고, 좀 서먹서먹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에서는 같이 웃고, 이야기하고, 아무 거리감 없이 지냈는데,
그날 다음부터는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좀 어색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고는, 어색한 관계가 되다.
변화산 사건을 마가는 특별히 이상한 데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을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하고 그 다음 단어가 기가 막혀요.
‘랍비여!’ 아니 왜 뜬금없이 랍비가 나옵니까? :5
랍비라는 건 ‘선생님이여!’라는 뜻 아닙니까?
분명히 본문 바로 앞에서 일주일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뭐라 그랬냐 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주’라고도 부르고, ‘그리스도’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왜 ‘랍비’가 튀어나옵니까?
이 ‘랍비’라는 말은, 그냥 일반 사람들이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을 향해서 부르는 존칭어입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 남자분들 만나면
가만히 있기도 그렇잖아요?
그럼 뭐라 그래요? 보통은 ‘선생님!’합니다.
(‘사장님’은 너무 경망스럽다고, 요즘 쓰지 않습니다.)
지금 본문의 ‘랍비여!’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선생님!’ 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색해져 버린 겁니다.
변화산에서, 영화롭게 변화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서..
제자들은, 평소에 자기들이 ‘막 대하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친밀감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2박3일 수련회 갔다 오면,
그 다음 주일예배 때가, 1년 중에 가장 친밀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주일이에요.
2박3일 동안, 함께 머물러도, 서로가 그렇게 친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의 3년 동안 동고동락한 거예요.
서로 얼마나 친했습니까?
근데 변화산에서, 이 세상 사람이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빨래할 수는 없을 것처럼.. 희게 변화되셨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얼굴과 옷이 다 빛이 났다 그래요.
그러니까 영화로운 빛의 발광체가 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보좌 앞에서 계실 때,
그 본래의 모습, 빛의 덩어리로 나타나자.. 갑자기 ‘랍비’가 튀어 나오는 거예요.
관계가 어색해졌음에.. 마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예수님을 막 대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예수님과의 친밀감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좋은 의미로)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에서 12제자와 가장 친하셨어요.
그 중에서 세 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건 말 할 수없이 친한 관계입니다.
이 지구 위에서 예수님과 가장가장 친한 자 세 명이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변화되셔서, 하늘나라에서의 모습을 보자
그 친한 관계가 어색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요.
그래서 6절에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너무 굉장합니다. 천국의 영화를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무섭습니다.
마치 예를 들자면, 노숙자가 자고 일어났더니, 자기가 갑자기 왕궁에 와 있는 거예요.
잠자고 깼는데 왕궁에 있는 거예요.
왕궁이 좋기는 좋은데, 어리둥절하고 무섭습니다. 그런 거예요 지금.
◑2. 예수님과 친했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어리둥절해지다.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앞서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어요,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막8:29
모든 제자가 이 베드로의 고백에 동의를 했습니다.
근데 여기서 놀라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는데도,
실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 본적이 없는 거예요.
그들이 관심 있어 한 것은,
오직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예수님과 가장 친한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는 주요, 그리스도’는
다 땅에서의 모습입니다.
-즉, 나라의 독립을 가져다주실 주,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그리스도
(그래서 실제로 그들은 누가 좌, 우에 앉을 것인가를.. 서로 다투었습니다.)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해주실 물주.
이것이, 그들이 이해하는 ‘주요, 그리스도’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원래 모습,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모습 (변화산에 나타나신 모습)을 보자,
그들은 당황하고, 어색하고, 놀라고, 어리둥절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황하고 어리둥절해진 증거가,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막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베드로는,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횡설수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당황함, 어리둥절함을.. 좋은 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보니까..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가치가..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계속 눌러서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
진짜 천국의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뵈니까
이 땅에서 그렇게 이루고 싶었던 모든 소원들,
이 땅에서 좋은 것들을.. 다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 하늘, 그 천국의 그 모습을 보니까,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김구선생님의 열망이었지요. 이준열사와 안중근의사의 열망이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열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니까,
나라의 독립이 좋은 것이지만,
천상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나라 독립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무슨 재벌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그런 큰 기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니까.. 싹 달아나는 거예요.
-내가 너무너무 결혼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진짜 모습 보잖아요? 그 여자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밤새도록 24시간 낮이고 밤이고 어딜 가나 그 여자 생각뿐이었는데,
예수님의 진짜 모습 딱 보잖아요?
그 모습을 느끼고 천국의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하면.. 그 남자를 잊어버려요.
그게 소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좋은 게 천국이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 설교문의 주제
‘내가 예수님과 친한 사이’라고 착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제일 친한 사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보고 나니까..
‘선생님! (랍비여)’ 하고 부르면서.. 친한 관계가 어색해져 버립니다.
변화산의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그래서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전에는
나는 예수님과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진짜 친한 사이가 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달동네에 살아도..
예수님과 친한 관계로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진짜 예수님과 친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예수님과 진짜로 친한 사람들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과 친한 사람이 되려면!
이렇게 제자들이 어색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진짜 친한 사이라면,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고서, 그렇게 당황할 이유 없습니다.
예수님과 친하기는 했지만, 피상적으로 친했던 것이지요.)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셋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들은 예수님과 대화도 말도 건네지 못해요, 어색한 관계에요.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진짜 친한 자들이 따로 있더라 이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친하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요?
우선 예수님과 친한 사람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왜 친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자가 모세이고,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가 엘리야인데,
이들의 특징이 있어요. 공통된 특징이 뭐냐 하면..
-모세는 80살 되어서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면대면 하게 됩니다.
이 모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자였습니다.
나라의 독립, 민족의 독립
이런 거 아무것도 이루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80살 노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둘 다 특징이 뭐냐 하면,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친해서 대화할 수 있는 자들이었고,
제자 셋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친한 줄 알았는데
왜 그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면서 따라 다녔지마는,
이들 마음에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 소원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게 인지상정이지요.
모세와 엘리야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없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없었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간 자, 마음이 세상을 떠나 있었던 이 자들이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고,
그렇게 친한 줄 알았던 자기들(세 제자들)은
세상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런 관계로
예수님의 진짜 모습 앞에서 한없이 한없이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과 친한 사이가 되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논의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뭐 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거예요.
어떻게 죽어요?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일에 대해서
십자가를 기억해 내고, 그 일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한 시간 동안 십자가 붙잡고
아픈 몸에 대해서, 내 마음이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내 마음이 질병에 안 뺏겨지고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거예요.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이때, 마치 땅에 심은 씨가 물을 주고 하는 동안에
언제 자라서 열매를 맺는지 우리는 모르죠.
부지중에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그러잖아요, 비유 속에서.
그런 것처럼 내 마음이 점점 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그 영화로운 모습을
성령의 감각을 통하여 내 마음이 느끼기 시작하고…
점점 더 세상에 대해서 소원이 없어지고,
반면에 점점 더 반비례해서, 나와 주님과 관계는
점점 더 친해져 가는 관계로 됩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친해짐을 통해, 정말 천상의 주님을 뵈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원이 없어요.
그래야 친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야 더욱 친해져요.
안 그러면 어색합니다.
예수님의 진짜 하늘나라의 모습을 만나게 되면 어색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소원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 예수님과 그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는 거예요, 만나지도 못하는 거라고요.
근데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소원,
마음이 끌어당기는 걱정 근심들 다 죽고,
자꾸 마음이 천국으로 천국으로 올라가서
그 천국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느끼고 좋아하기 시작하잖아요?
이때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나와 대화 하십니다.
이 땅에서 이루셔야 될 하나님아버지의 계획을 놓고
나와 대화하실 정도로 친해진다는 거예요.
마치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사건을 논의 한 것처럼,
이 땅에서 일어나야 될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들이,
나와 예수님 간에 대화가 될 수 있다는 얘기지요.
기도/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통하여
보좌 앞에 계신 영화로운 주님의 모습, 아주 친밀한 관계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발돋움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서두에 전략한 일화/ ‘어색한 관계’ >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에 처음으로 수원에 있는 어느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교회를 봉사하게 됐습니다.
토요일 날 가서 청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거기서 자고,
그 다음날 주일날은 교회학교에서 교육전도사로 봉사를 하는데,
그 교회에 그렇게 교육전도사로 부임한지 몇 달 안돼서, 교회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를 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사임을 하셨어요. 그래서 후임이 오시기까지, 제가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요기도회 설교와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제가 다 하게 됐습니다.
문제는 설교라는 걸 그렇게 정말 교인들 앞에 서서 정식으로 하기는 제가 처음이에요.
그런데, 제가 하려는 얘기는 장로님들이에요.
교육부장 장로님이 계세요. 젊으신 데다 대머리에 아주 인상이 좋으십니다.
그래서 주일 날 아침에 만나 뵙게 되면, 밝게 웃으시면서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
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 주시고..
다른 장로님, 수석 장로님으로부터 해 가지고 장로님들 대부분이 서울농대 교수이십니다.
교수님들이 많으셨어요.
그런데 주일 저녁에 처음으로 설교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설교자가 문 앞에서 인사를 하잖아요, 교인들 갈 때.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장로님들이 수석 장로님부터 거의 90도로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 전의 교육전도사가 아니에요.
특히 교육부장 장로님은 가관이세요. 얼굴이 굳었어요, 완전히.
어깨 두드리며 열심히 하시라고 격려하던 그 교육전도사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히 친밀했지요, 교육부장 장로님 하고.
그런데 대예배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모습을 딱 보고 나니까
태 전도사의 다른 모습을 본 거에요.
그러니까 그 교육전도사와 관계를 맺었던 그 친밀함이 유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어색한 관계가 돼버렸어요.
장로님들이, 당회원들 전체가 저를 초대 했습니다, 집사람하고 같이.
그리고 상석에 앉혀 놨는데, 이거 뭐 저하고 집사람이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영적성장
그 농대 학장 하시던 수석 장로님도 거기와 앉아 계시고, 머리가 히끗히끗 하신 분이.
아! 어색했어요, 아주 어색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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