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란..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 막11:1-10 출처보기
우리는 종종 ‘예수 믿고 변화되어야 한다’
또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다’라는 등
변화라는 말을 잘 씁니다.
이 변화라는 말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면,
세상에서 →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
현세적 관점의 세상에서 → 천국 시민의 생활로 이사 가는 것을 뜻합니다...
◑나귀타고 입성의 의미.. 새로운 나라의 도래, 시작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뭡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독교인조차도
예수님 믿고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밖에는 다른 세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처럼 직장 구하고 결혼하고
누가 으뜸이 되느냐...
이런 경쟁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냥 살 수밖에 없다고,
다른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 안에 머물면서 믿는 거예요.
그거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신대륙을 발견해내고 살아가는 게 예수 믿는 거예요.
똑같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8장에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면서
빌라도와 대화를 하시는 가운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만약에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여기서 이 세상, 내가 직업을 구해야 되고, 돈을 많이 벌어야 되고,
높아져야 되고, 권력을 가져야 되고, 일등 해야 되고…
하는 그런 부담과 책임을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었다고 그러면
‘나의 부하들이 유대인들이 나를 넘겨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로마와 치고 박고 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에요.
(그 이야기를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해주시는 겁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내가 왕이다’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왕이 다스리는 그 새로운 나라,
새 왕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라는 얘깁니다.
보통 왕은 말을 탑니다.
특히 정복하고 승리를 이끌어낸 왕이 타는 말이 백마에요.
이렇게 말을 타든지 아니면 말이 끄는 마차, 황금마차를 타든지
그래서 이사벨라 여왕의 깃발처럼 깃발을 달고 창검을 번쩍거리면서
보무당당하게 위용을 나타내면서 걸어가는 게 이 세상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데 힘과 정복을 상징하는 말이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다는 것은
나귀새끼를 타도 왕이 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지금 이 땅 위에 임할 거라는 얘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바로 그런 나라,
나귀새끼를 탄 자가 왕이 될 수 있는 그런 나라,
이 나라는, 힘과 경쟁과 정복을 통해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귀새끼를 탄다는 것은
그런 싸움이 없고, 경쟁이 없는 나라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게 되면 종말에 임하게 될 메시아왕국이 아니라도
이미 이 땅 위에서,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았다 할지라도
새로운 나라를 살게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경쟁이 없는 나라, 나를 해치려는 원수가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서 갖고 싶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그런 나라,
돈, 황금, 명예, 인기 높은 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그걸 갖고 싶어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그런 나라가
내가 살고 있는 동안에 임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의 의미입니다.
새로운 나라, 평화의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 나라의 왕으로서,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니엘이 말한 70이레의 성취 ☞ 70이레는 ‘예수님의 구속’을 예언
◑변화란..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는 것
▲우리는 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 열두제자, 스데반, 빌립집사 같은 분들을 보면서
성령 받아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인격이 변화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각도로 설명해 봅니다.
그들 개인이 변화되기도 했겠지만,
이 사람들이 다른 나라 Kingdom of God 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열두제자는 모두 다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누가 영의정이 되고, 좌의정 우의정이 되느냐, 이걸 놓고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죽을까봐 무서워서 다 도망갔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계기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열두 사도와 열두 사도에 의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느냐? 이제는 유무상통 합니다.
그렇게 돈, 돈, 하며 살던 사람들이
오순절 사건이 지나면서 자기 지갑을 열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다 똑같이 살게 돼버립니다, 이거 무서운 변화죠.
그리고 그렇게 무서워서 다 도망갔던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내일 목 베임을 당할 것이 분명한데도
발로 옆구리를 차도 깨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 한 마디,
분노 한 마디를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용서를 합니다.
이 모든 변화가.. 우리는.. 그 개인들이 성령 받아서
변화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씨가, 복음이, 성령이 내주하시면,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변화’말고도, 다른 각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이사 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나귀타고 입성하시게 되고
왕으로서의 선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냐?
공생애 시작부터 ‘회개하라. 찬국이 가까이 왔다’며
천국을 선포하시다가,
이제 정식으로 ‘천국/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취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입성’은, 그 뒤 즉시 일어날 십자가 사건과 다 한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마다
바로 이러한 왕국에 들어가서 살아간다는 얘깁니다.
경쟁이 없는 세상,
그 전의 세상은 돈이 좋고, 황금이 좋고,
인기가 좋고, 많이 모아야 좋은 이런 세상을 살았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서 전혀 그런 경쟁과 다툼과 원수,
이런 게 없는 나라가 된다는 거예요.
물론 사도들은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눈으로 보기에는 원수가 있는 겁니다만,
그들이 순교를 당할 때,
베드로나 스테반이 죽음 앞에서 보였던 그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육체를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빼앗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고,
스테반과 베드로가 자기가 목 베임을 당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에서, 자기가 잃어버리는 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서,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들은,
내가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잃어버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내 목을 쳐도, 그들에 의해서 내가 잃어버릴 게 없어요.
상실감이 있을 수가 없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수도 없지요, 내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서 그가 내 원수가 될 수는 없어요.
내 마음에서는 그에 대한 원망이 전혀 안 생깁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전혀 안 생깁니다.
내가 목숨을 잃어도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빼앗긴다, 억울하게 상실한다’는 느낌과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지금 현재 교회(우리 각자)의 눈에 가려져 있습니다.
전부 ‘이 세상 나라가 전부다’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지만 우리가
‘현실은 현실이다, 열심히 벌어서 먹고 살아야 되고 취직해야 되고,
취직 잘하려면 좋은 대학을 들어가야 되고,
좋은 대학 들어가려니 공부 열심히 해야 되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누가 과장으로 빨리 승진하느냐 싸워야 되고,
사업을 하려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업체들끼리 경쟁을 해서 이겨야만 되고…’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현실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암만 잘 믿어도 ‘no more ahead’, 주1)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이유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다윗의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어떻게 이 나라로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항해를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항해를 해 들어갈 것입니까?
어떻게 이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겠습니까?
바로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더 이상 몸과 묶여서 사는 내가 없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내게 있어서.. 세상이 끝이 납니다.
콜럼버스가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갔을 때
지중해 중심의 세상이 끝나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을 때.. 내 마음은 세상에 대해 죽는 거예요.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내 가정을 말합니다, 내 가족을 말합니다,
내 직장을 말합니다, 내 인생과 미래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이 뭡니까?
무덤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죽었으니까 관심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에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성령님께서 오셔서 내 마음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천국을
내 현실로 느끼게 해줍니다.
천국이.. 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됩니다.
그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내보다 남편보다 자식보다 부모보다
먼저 앞서서 첫 번째 관계의 대상이 됩니다.
천국이 첫 번째 현실이 될 때에 내 마음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안전한 충족감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 이럴 때 여전히 내 몸은 남아있어요,
이제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나라 안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내 몸으로 아직 이 현실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늘나라에 가 있어요.
몸으로 이 세상을 살 때에 몸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다윗(예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2년 대한민국 땅, 혹은 미국 뉴욕 땅, 아니면 호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반드시 십자가 항해를 해야 합니다.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반드시 ‘십자가’문을 통과해서, 세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즉, 세상에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갈2:20
▲십자가 항해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콜럼버스의 항해에 비유한 표현)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나라로
내 마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들어가 버리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이 몸으로 이 세상을 살 때
베드로처럼 내일 목 베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도 걱정이 안 되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 잘못 없이 돌 맞아 죽어도
나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에게 전혀 미움이 생기지 않는..
그런 나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장 내일 먹을 끼니거리를 살 돈이 없는데도.. 걱정이 하나도 안 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아버지가 다 있어야 될 줄을 안다’는.. 그런 나라로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정말 내가 무일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뜻이 아니니까, 돈도 안 주어지고, 일도 안 되는 것이지요.
뜻이 아닌 것은 이룰 필요도 없고, 이루고 싶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이런 나라가 임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세계는 ‘일등 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입니다.
여기서 승자가 있고, 낙오자가 있고, 우등생이 있고, 열등생이 있습니다.
으뜸경쟁, 모든 분야에서 으뜸경쟁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서 몸담고 있으면서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이 없다,
no more ahead, Ne Plus Ultra’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 다른 세상이 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기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말 탄 자가 왕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새끼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 으뜸경쟁이 전혀 없는 나라,
원수가 있을 수 없는 나라, 전혀 걱정이 없는 그런 나라,
예수 믿으면.. 그 나라가 내게 임한다는 거예요.
그 나라로 들어가는 항해는,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내가 죽음을 통과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콜럼버스가 되지 아니하면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서
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믿’자도 아직 맛을 못 보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콜럼버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서, 신대륙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그저 으뜸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세상만이
예수님을 암만 잘 믿어도, 유일한 세상인 줄 알고, 내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너머에 몸으로 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게 해주셔서, 십자가 항해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다 그 신대륙을 발견하는 영적 콜럼버스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주1) ‘no more ahead’
더 이상의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ne plus ultra’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당시 15세기에,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 바깥에는
‘더 이상 땅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492년에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라가 콜럼버스의 후원자가 되어서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과 선원 88명을 제공을 하게 됩니다.
니나 호, 핀타 호, 그리고 산타마리아 호, 이 배 세 척을 끌고 스페인에서 출발해서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갈 때, 이 배에 달았던 이사벨라 여왕의 기(旗)가 있습니다.
그 깃발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가 하면 라틴어로 ‘네(Ne) 플루스(Plus) 울트라(Ultra)’
영어로 번역하면 ‘no more ahead’ 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no more ahead’, 더 이상의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 ‘ne plus ultra’
그러면 이사벨라 여왕의 그 깃발에 왜 이러한 모토가 쓰여 있었겠습니까?
이 말은 ‘이사벨라 여왕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땅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no more ahead, 더 이상 나가서 발견할 땅이 없다,
이사벨라 여왕의 통치력이 세상 끝까지 지배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콜럼버스가 증명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 표현을 따온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치 천국이 없다는 듯이, ‘no more ahead’, ‘ne plus ultra’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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