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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만약 살아 있다면 3600

LNCK 2012. 5. 14. 20:53

◈루터가 만약 살아 있다면         고전3:16         11.11.06.설교스크랩, 축약


 

유럽은 곳곳에 세계사적인 격전지나 시대의 역사를 바꾼 현장이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곳을 갈 때마다 감회가 새롭고, 깊은 감동을 받고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크게 기대를 하고 갔다가

너무나 초라해서 오히려 실망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제가 6~7년 전에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갔을 때가 그랬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자기가 가르치던 대학의 정문에다 95개조의 논제를 붙인 그 현장

즉 종교개혁의 발상지를 갔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면 소재지 정도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얼마 안 가 다시 큰 감동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전 유럽에 진리의 소용돌이를 치게 했던 현장은, 그럴 듯한 장소가 아니라,

아주 볼품없는 곳에서 시작되었구나!’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든 그렇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대단한 곳에서,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기나긴 중세의 암흑을 깼던 종교개혁의 발상지 비텐베르크 대학은

요즘 각 동네마다 있는 초등학교보다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타오른 개혁의 촛불은

전 유럽을 휩쓰는 거대한 불길로 번졌던 겁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는 1517년 당시처럼

다른 외부(신흥) 세력에 의해 개혁 당할 것입니다.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개혁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오늘 살아 있다면

지금 돌아가는 세상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뭐라고 그럴까요?


오직 말씀으로!? .. 요즘처럼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사는 때가 있었던가요?

오직 은혜로!? .. 그 동안 우리가 누린 은혜를 말로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직 믿음으로!? .. 너무 지나쳐서 기도 한 번 하면, 심판 끝!

                  그러면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정도 아닙니까. 

 

그렇다면 세상은 밝고 아름답고 은혜로워야 되는데,

지금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이 극단의 포악과 악행과 기근과 이기심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래서 루터는, 또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종교개혁의 강령을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제 밤, 저는 주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냥 혼자서 깊이 묵상했다는 뜻입니다. 무슨 신비적 체험은 아닙니다.)


이 휘어진 상황을 어떻게 바로 잡아가야 될 지 앞이 보이질 않아서

주님께 제 답답한 심경을 털어 놓았지요.


“주님! 지금 지상에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후로

엄청나게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엄청나게 많은 교인들이 생겼는데

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는 걸까요?”


주님께서 잠깐 생각을 하시더니, 한 마디 이런 생각을 넣어주시더군요.

“다들 교회를 다녀서 그래!”


“예? 교회를 다녀서 그렇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것도 몰라? 요3:16절은 기억하면서 왜 고전3:16절은 잊어 먹고 있지?

다시 읽어 봐”


(여러분 같이 한 번 읽어 보실까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여러분! 무슨 얘기일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교회래요.


그러니까 나 자체가 교회인데, 교회가 교회될 생각을 안 하고,

건물인 교회로 가서 거기서 뭘 얻을까만 생각한다는 거예요.


내가 교회인 걸 깨닫지 못하고,

내 자체가 성령의 전인 걸 알지 못하는 이상,

평생 교회를 다녀도 사람 자체는 달라질 게 없다는 거예요.


교회를 물론 열심히 다녀야지요.. 히10:25

그런데 ‘나 자신이 진짜 교회가 될 목적으로’ 교회를 다녀야지..


‘교회만 다니면 면죄부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교회를 다니면..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세기에, 신자들이 돈으로 면죄부를 사고/팔아서, 교회가 타락했다면,

21세기에, 신자들은, 교회 다니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둘 다 ‘면죄부를 쉽게 얻겠다’는 방식에선, 공통점이 많습니다.


묵상을 하는 시간 내내,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오늘날의 개혁 모토


만약 루터가 살아 있다면

또 한 번의 개혁을 요구할 텐데, 어떤 식의 개혁일까요?


원래 개혁改革이란 한자는 가죽을 몽둥이로 쳐서 쓸모 있게 만든다는 뜻인데,

우리도 스스로 몽둥이질을 해서 펴야 되는 걸까요?


이제 교단이나 선교단체나 교회 같은 큰 단위의 교회는 시스템 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교회인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교회답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가 된 교회만이 진짜 교회가 될 뿐,

그 외 다른 길은 없습니다.


즉 사람 하나 하나가 변화된 그 모임만이

진정으로 시대가 바라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날 마르틴 루터가 만약 살아 있다면

내 놓음직한 모토를 다시 내 놓습니다.


지난 시대의 귀한 유물인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라는 모토는,

오늘날 더 작고, 더 개인적이고, 더 내면적인 모토로 바뀌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의 모토를 만들어보십시오. 저/설교자는 이렇게 만들어 봅니다.)


Sola simplicitate ! (오직 단순함으로!)  

Sola sinceritate ! (오직 진실함으로!)

Sola iactura! (오직 희생으로!)

 

이것의 오늘 우리들의 새겨야 될 미션이고,

이것이 교회된 우리 각자 각자가 다시 회복해야 될 목록이 될 것입니다.


▲ Sola Simplicitate! (솔라 심플리치타테), 

교회된 우리는, 보다 단순해져야 합니다. 

단순함이란 순수한 것, 핵심적인 것, 간결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는 모습도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성경의 위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것은 금방 확인됩니다. 

집중해야 될 것 몇 가지만 제외하고는, 다 가지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단순함의 최고 기준을 어디에 두었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사무엘, 다니엘, 다윗 이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 일이 뭐였지요?

어디를 가든 이 사람들은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기 삶의 중심을 항상 예배에 두었고, 그렇게 평생을 예배자로 살았습니다.


평생 예배자로 사는 것!

이게 바로 단순함의 극치라는 겁니다.


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뭔가를 느끼지 못하면

크리스천의 충전은 어디서든 이루어 질 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된 우리 각자 각자가

예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작금의 교회들이 부패해져 가는 것을 향해 비난할 게 아니라

성령을 모신 예배처소(교회)로서의 나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는 얘깁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롬12장에 나오는 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실은 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핵심이 예배니까 그것을 위해서

다른 부분들은 다 간결하게 처리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단순함이란, 예배의 삶을 위한 굵은 가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쳐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제도와 직분과 성장이 예배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의 교회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맘몬에 잔뜩 물들어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가 물질에 물들고, 명성에 물들고,

“야! 저 교회 대단해!” 하는 세상의 인정에 자만한다면

그게 어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교회로서, 예배자로서 단순해지십시오!

삶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먼저는 여러분의 환경을 예배에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십시오!

무조건 교회에 나오라는 뜻이 아니라, 평소 삶에서, 가정에서, 또는 어디에서든지

먼저 신실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생각, 습관, 일 이 모두를 예배를 위한 시스템으로 다시 포맷 하십시오!

그러면 단순해 질 것이고, 그 단순함은 생각보다 여러분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이 단순함의 은혜로 늘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Sola Sinceritate! (솔라 신체리타테) ‘오직 진실함으로!’

영어로는 sincerity 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sincerity’라고 하면 거기엔 우리말의 성실과 진실,

그리고 정직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믿는 사람에게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겁니다.

지금 한국 신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이 진실성에 관한 겁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에,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저리를 치신 적이 있지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보니까

양심이 빠지고, 마음의 진정성이 빠지고, 희생이 빠진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한 마디로 진실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거짓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예배드리지 말라!’ 그러지요?

‘괜히 성전 뜰만 밟고, 그냥 돌아가느냐!’는 겁니다.

 

지금은.. 교회가 사람이건 사회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길을 일방독주 합니다.


마치 요나의 상황과 똑같은 겁니다.

요나가 탄 배에 폭풍이 몰아치자 선원들이 제비를 뽑지요?

그리고 바로 요나가 재앙의 원인제공자인 걸 밝혀내고 한 마디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지금 누가 누구에게 야단을 치고 있지요?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믿으라고 책망해야 할 텐데,

거꾸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야단 치고 있는 겁니다.


서두에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 당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런 일은, 역사상, 언제든지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요나는 나중에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스스로 바다에 빠집니다.

진실을 향한 몸부림이 조금은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 부모들이 많이 계신데,

자녀들에게 가장 비중있게 가르쳐야 될 것도 이 부분입니다.

이 sincerity가 없으면, 다른 게 아무리 뛰어나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잘 나가는 것 같지만, 최고 정점에서,

그 진실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부메랑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 후배 전도사들에게도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안수 받기 전인데, 이 진실 부분에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른 길을 한 번 찾아 봐라”


물론 저도 부족하지만,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이상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심정에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진실함 sincerity이란,

있는 그대로,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경건이 없으면 없는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채로 그냥 나갈 때

주님은 우리를 진실하게 봐 주십니다.


그리고 웬만큼의 훈련기간이 끝나면

우리에게도 진실의 왕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향해 노력하는 것은, 결코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직 시작도 못한 신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저 교회에 안 빠지고 다니는 것으로.. <진실함의 경건훈련>을 대체해 버리려 합니다.

교회에 안 빠지고 다녀야지요. 그러나 그 목표는 <진실함의 경건훈련>에 초점을 두고서,

교회 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로서 진실함을 회복해서,

세상 사람에게나 하나님 앞에 진실함으로 서기까지 애쓰고 노력하고,

또한 주님의 성령님이.. 우리 각자를 그 길로, 계속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Sola Iactura! 오직 희생으로!

이 시대에 루터가 살았다면, 가장 크게 바랬을 강령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따로 떼어서 드려야 될 말씀입니다.

단순성이나 진실성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희생은..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사랑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반드시 희생이라는 자양을 먹어야만 자라는 풀입니다.


요12:24~27의 말씀은, 밀알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가 무슨 얘깁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할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겁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한 알의 밀을 안전하게 보존해 보십시오.

그 밀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 밀이 열매를 맺는 경우는 단 한 경우 밖에 없습니다.

차가운 땅에 떨어져서, 무덤 속에 매장되는 것처럼, 그 곳에 묻힐 때입니다.

그래야만 싹이 나서 거기서 줄기가 올라오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뭐니뭐니 해도 경쟁력에 관한 것일 겁니다.

무엇이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필요한 것에 집중 투자하는 것을 봅니다.


학교를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떠나고,

또는 기업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서, 공짜로 몇 달씩 일해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역초기에, 당신 사역의 경쟁력을 숙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외국 연수는 못 가셨지만 대신 40일 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확실한 경쟁 아이템을 정하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면서 그것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랬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로 사람을 꾀는 짓은 하지 않겠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는 절대로 하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

-내가 선교하고 요구하는 신앙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절하지 않겠다.


여러분! 이 세 가지를 한 번 쥐어 짜 보세요! 뭐가 나오지요?

십자가입니다. 또한 희생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길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 가장 큰 경쟁력은 십자가인 줄 아십시오!

희생인 줄 아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훈련원 원장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초기 때 강원도 철원 지방에서 활동하셨던

Miss Cate Cooper 라는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자리를 잡게 됐을 무렵,

하나님께 이끌려 한 선교단체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으로 파견이 되었습니다.


낯설고, 물 다르고,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그것도 환경이 아주 열악한 시골에서 열심히 선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한테는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오던 연인이 있었습니다.

이 미스 쿠퍼가 한국으로 온다고 할 때도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만

그 결심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 청년이 자기 애인을 한국으로 보내고 너무나 보고 싶어서 기다리다 못해

한국으로 달려 왔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기애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한 얘기가 뭐냐 하면

‘자기랑 같이 미국으로 들어가서 결혼해서 거기서 전도하자’는 거였습니다.


미스 쿠퍼가 그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 청년이 며칠 동안 고민을 하더니 최종적으로 결론 내린 게 뭐냐 하면

"조국은 잊을 수 있어도 당신은 잊을 수 없노라" 얘기를 하면서

"당신과 함께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겠다" 그렇게 말했답니다.


그때 미스 쿠퍼가 그런 얘기를 했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이미 한국과 결혼했습니다.

한국이 제 신랑이고, 저는 그 신랑 하나 만을 섬기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분은 말년에 병을 얻어서 미국선교본부로부터 강제송환을 당할 때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교자들이 피를 먹고 자란 것입니다.

 

이런 희생을 이제 우리가 회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향해서든, 이웃을 향해서든, 세상을 향해서든

이제는 우리가 희생을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교회는 밀알입니다.

밀알은 땅에 묻혀서 썩어져야만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그 씨는 죽지만 죽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열매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변화되는 게 진정한 이 시대의 종교개혁 아닐까요?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부르는 것은, 우리 하나 하나를 교회라고 부를 때입니다.


▲마치는 말

실로 우리 각자는 교회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를 탓하기 이전에,

우리 각자로서의 교회를 탓하고,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제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이 계시는 그 성전이 몹시 혼탁해져 있습니다.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가야’ (Reformation이란 말의 뜻) 합니다.

루터가 진정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은 494년 전에 자기가 했던 일이 아닐 겁니다.

이제 그것은 뒤로 하고 다시 진정한 개혁을 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개혁이란, 자기 때처럼 체제를 바꾸는 거대한 개혁이 아니라,

교회 자체인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작고도 조용한, 지극히 사적인 개혁입니다.


오늘 그래서 단순, 진실, 희생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 부분을 회복하는 것, 아니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우리들의 진정한 종교개혁일 것입니다.

이 개혁이 이제 우리 각자 자신들에게서, 열정적으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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