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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LNCK 2012. 5. 18. 16:39

www.youtube.com/watch?v=6sGA1BhsJnU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히3:7~10         설교일부녹취

 

▲서론. 낯설지만 중요하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이라고 말하면,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반응한다. 자주 들어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컴퓨터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란 단어를 치고 검색해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얼굴’ 이란 단어가 성경에 제법 많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많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란 용어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교해서 보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을 구하는 삶’과 대조해서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였다’는 표현도 성경에 나온다.

  즉, 뭔가 얻기를 바라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뭐고,

또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뭐냐고 질문하실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세, 다윗, 바울 그 외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대표적 인물들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을 구하는 삶’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출애굽 백성들과, 모세는, 환경적으로 같은 상황(광야)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확연히 달랐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지만.. 즉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임재를 구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했다.. 즉, 하나님의 축복, 음식, 풍요를 구했다.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본문 히3:7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했다. 히3:15, 17

그리고 하나님을 40년 동안 시험했다고 했다. :9

 

그들이 하나님은 안 믿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구한 것이었다.

 

 

◑적용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내 신앙이

환경에 따라 바뀌는 줄 알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유명한 교회에 나가면,

심지어 저희 교회에 오시면 신앙생활을 잘 할 줄 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 교회에 오기만 하면, 그 자체로 신앙생활 잘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성경적 판단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보시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와 계셨을 때도,

예수님을 직접 따르면서

그분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그 분께 직접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도 수없이 많았는데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따랐다고 해서,

다 자동적으로 변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볼 때

오늘날 어떠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 어떠한 위대한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종을 따라다닌다고,

내가 그 교회에 이적해서 다닌다고 해서

내 삶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고 훌륭한 교회 나간다고 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신앙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선한 영향력은 받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똑같은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고,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은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그들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업도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기에 달려있다.

즉, 본질적 신앙생활을 하느냐/ 피상적 신앙생활에 그치느냐.. 거기에 달려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도.. 내가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다. ← 하이라이트

예배 시간이나, 집회 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서 운행하시는 곳에 우리가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어떨 때는 우리에게 은사가 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언 은사가 임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환상도 보이고 성령의 감동도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게 은사가 임해도

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지 않고,

그래서 실제로 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내게 열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때

환상도 보이고, 감동도 주어지고, 그럴 수 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고, 내게 어떤 감동들이 주어지면서,

환상도 보여서, 그들을 위해 예언도 해 준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서면 캄캄해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환상이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은 안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에, 즉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이도,

그냥 은사가 나타나서, 내게 그런 감동들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은사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관계에 있는 줄로 착각한다. 남다른 은사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지 않으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아무리 신기한 외적 은사가 나타나도,

그것들을 다 무시해야 한다.

 

언제 내 삶이 변화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이 보여야.. 내 삶이 변화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친밀함 가운데 있다는 싸인 중 하나는,

(은사의 나타남보다) 자꾸 내 죄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를 들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섰을 때,

자기 모습, 자기 죄악이 보였다는 점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니라.’

그는 이렇게 절망하며 애통했다.

 

이사야는 정말 한편으로는 거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그 영광의 임재 앞에 갔을 때,

자기 입술이 부정한 죄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사야처럼 이렇게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니까)

은사가 나타나기 이전에, 자기 죄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죄가 보이지 않고, 자기 본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은사만 계속 나타나는 것은,

심각한 자기 성찰과 조심을 요한다.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인데..

(광야에서 모세가 그렇게 했다)

 

그런 상태에 들어간 사람의 증거

자기의 본 모습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을 때..

그 분의 영광, 그분의 관점, 그 분의 기준이 보이고

그 앞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진정한 회심이 되어진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없으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 죄악된 모습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땐,

이런 환상도 보이고, 저런 감동도 주어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실상, 자기 죄에 대한 회개가 안 나오는 것은,

그가 현재는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과 예언이 자기를 통해 주어지니까

자기가 꽤 신령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물론 그가, 이웃에 대해, 환상과 예언을 말하므로, 신령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환상과 예언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은사의 나타남만으로, 그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자기 본 모습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성화(회개)의 과정이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모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만.. 보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갔을 때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령사역을 하지만,

정작 자기 삶은 어느 수준에서 멈추어져 버린다.

이것은 스스로 시정되어져야 한다.

 

지금이 2012년인데,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최초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약20년 전인 1991년부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이상 동안 수없이 이 부분을 나누고, 많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했다.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 대해 설교한 것도 이제까지 수 백 번 될 것이다.

 

그런데 제가 그 많은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 죄가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영적 성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고.. 이런 일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 교회에 다니면, 당신은 변화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건 미혹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분투노력해야 한다.

즉, 경건의 훈련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을 직접 따르더라도

그냥 자동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이 교회를 다니느냐, 저 교회를 다니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다니신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 교회가 아주 연약한 교회라 하더라도)

내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이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게 되고

점점 놀랍게 변화된다.

 

이런 영적 성장, 신앙 성숙의 과정이 (저는 본격적으로 약 20년 되었는데)

혹시 아직 여러분께 일어나지 않아서,

그저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고, 내 직분이 OO이다’ 라는 사실로 만족하고 계신다면,

 

그런 허상에서 속히 깨어나서,

진정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이 되도록,

주님께 심각하게 기도로 요청하게 되시기 바란다.

반드시 주님이 도와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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