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중심의 잘못된 기도 마6:7, 계22:4 12.04.22.설교일부녹취
◑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안다.
▲크리스천 상담가 레리 크랩 박사는
신앙생활을 해 오던 중에,
어느 순간 크게 회심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기쁨과 행복과 신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신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행복과 신비를 발견하고 나서부터,
가장 핵심이 '기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기도가 달라져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면.. 기도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가 되는 사람은,
그 증거가,
그의 기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가 되고,
나 중심의 기도, 나의 필요를 채우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래서 크랩 박사는,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없는데,
그 잘못된 기도를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중심적 기도 생활>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요, 삶이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새벽기도를 안 빠지고 드리고,
금식을 밥 먹듯이 하고, 철야기도를 날마다 드린다고 해도
<자기중심적 기도, 즉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불가능하고,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요, 어쩌면 거의 쓸모없는 기도이다.
▲오래 전에, 제게 기도부탁을 해 오신 성도님이 계셨다.
그 분은 일주일에 사흘을, 교회에 나와서 혼자 철야기도 하시는 분인데,
기도는 열심히 하는 반면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다.
저는, 제가 그 분을 위해 기도해 드려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나님의 길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집안사가 잘 되도록 기도해 달라는데...
그래서 제가 난감한 가운데, 기도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고,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소서!’ 라고 기도해 드렸다. 엡1:17
성경에 보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했다. 요일2:27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교사’를 세워주셨다. 엡4:11
둘 다 필요하다.
-성령님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교사를 통해서 배우기도 한다.
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이 제시되면, *교사의 은사를 가진 목사를 뜻함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각자가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
교사가 가르쳐 주지도 않는데,
성령을 통해서 직접 깨달음을 얻기란.. 대단히 힘들다.
성경을 전혀 읽어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데
성령께서 만약 여러분께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주셨다면
그것은 99% 잘못된 것이다.
반대로 여러분이 성경 공부를 많이 했고, 학위도 갖고 있는데
그렇지만 성령의 비추심이 없으면, 그것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가르침도, 동시에 교사의 가르침도 둘 다 필요하다.
기도를 해 드린 후에, 그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기는 일주일에 3일을, 한 달에 15일을 교회에 나와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그것을 습관적으로 수년간 그렇게 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자기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는데,
‘너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그 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기를
‘자기가 이렇게 까지 열심히 철야기도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도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그럼 제가 신학교라도 가야하는 겁니까?’ 이렇게 생각했단다.
그리고 계속적인 의문이,
‘내가 그렇게 기도하는데, 왜 자기 환경이 안 풀리는지 모르겠단다.’
남편은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않고, 집에서 그렇게 자기를 핍박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저는
안 믿는 남편을 놔두고, 한 달에 절반을 교회에 철야한다고 나오니,
그 남편이 핍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과 전혀 인격적 교제관계 없이
교회 나와서, 마치 치성을 드리듯이, 잠도 안 자고 오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로.. 그렇게만 잘못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주시옵소서 기도의) 삶’을 살고 있는 한,
기도 많이 한다고 주님과 친밀함이 안 이루어진다.
금식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먼저 바뀌어져야 한다.
당연히 기도생활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때로는 금식도 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와 삶으로 바뀐 다음에
그 기도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그대로 살고 있으면서,
기도만 많이 한다고,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래리 크랩 박사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 대신에,
‘나 중심적인 잘못된 기도’라는 표현을 썼다.
표현만 다른 것이지,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박사는 자기 책에서, 그 잘못된 기도의 예를 이렇게 들고 있다.
◑‘나 중심적 기도’의 예
▲1. 기도를 드리지만, ‘주시옵소서’ 식의 기도를 주로 드린다.
즉 ‘자기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제 삶에 만족과, 기쁨으로 넘치게 해 주세요’
소위 가내안전과 사업번창을 구하는 기도이다.
어떤 분들은, ‘그럼 기도가 그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라고 반문한다.
오늘날 정말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지만,
‘뭘 주세요’를 기도라고 생각하고, 그걸 비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 기도를 ‘주시옵소서!’ 밖에 할 것이 없다.
‘해결해 주시옵소서. 풀어주시옵소서, 채워주시옵소서. 들어주시옵소서!’
그런 말밖에는, 더 이상 입에서 나올게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가 뭔지 모르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거나, 그 분의 얼굴을 구하거나,
기도시간에 자기 본 모습을 보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기도밖에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위에서 말한 ‘교사’가 필요하고,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2. 신자가 타인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더라도, 그것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기도가 된다.
우스갯소리로, 처녀가 자기 부모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어머니께 훌륭한 사윗감을 주소서!’ (자기 남편을 달라는 기도) 한다고
우리 모두가 웃는데,
실제로 이런 식의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이 많다.
즉, 자기 남편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위한 기도가 된다.
‘주님, 제 남편이 은혜 받게 해 주셔서, 그래서 내 인생이 펴지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런 식이다.
자기 자녀를 위해서 새벽기도를 날마다 드리지만.. 결국은 자기 체면을 위한 기도가 된다.
이런 기도 역시 ‘주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이다.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기도인 것이다. (중보기도가 아니다.)
목회자를 위해서 중보기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우리 목사님께 말씀의 권세를 부어주소서.’
그런데 이런 기도의 배후에는,
우리 목사님의 말씀이 강력하지 못해서,
내가 교회 올 때마다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신앙생활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자기가 행복한 삶을 사는데, 목사의 설교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 달라는 식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가 <자기를 위한 기도, 자기중심적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손을 구하는 기도이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신자가 자기중심적 기도를 드리는 이유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 설명을 눈여겨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이웃과 교회 지체 관계에도 마찬가지이고,
관계에서 가장 핵심은,
올바른 관계가 되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주님 한 분만으로 풍성하고 만족한 상태에 들어가면,
배우자/부모/자녀/친구/교우.. 누구를 대하든지..
내가 만족하고, 내가 그들을 자유롭게 잘 대하게 된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고,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그 상태에서
내가 남편과 아내를 대하고
자녀와 이웃을 대할 때.. 올바른 관계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내 모든 관계가.. 이기적인 관계가 된다.
즉 내 중심적 (내 이기적) 관계가 된다.
내가 그것을 본능적으로, 나도 모르게 원한다.
이런 상태에서
신자는.. 남편, 아내, 자녀, 이웃, 성도, 목회자 모두가 ..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웃을 위해 기도하더라도..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목회자는.. 만인이.. ‘자기를 도우는 사람’으로 보이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기 위해 세상에 보낸’ 사람으로 쳐다보인다.
그래서 늘 ‘헌금이나 안 해 주나?’ 하고 속으로 바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목회자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자기가 만족하기 때문에
배우자/부모/자녀/친척/교우.. 누구를 만나든지
그의 가련함이 보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를 도와주려고 애쓰게 된다.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친밀히 만나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한 상태에서,
내가 배우자를 대할 때,
그 관계가 원만해지고, 풍요로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부부지간에도, 부자지간에도,
‘저 분은 나를 위해 존재해 주어야 하고, 나를 위해 살아줘야 하는 사람이야..’
아담의 후손은, 타인을 그렇게 대하게 되어있다.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를 위해주는 말을 할 때.. 그들은 선한 사람이요,
반대로 그들이 나의 체면, 내 방향, 내 뜻과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할 때는..
그들은 나의 대적이요, 사탄의 편이라고 매도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될 때,
내가 내 주위의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되지 못하면,
내가 내 주위의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그럴 때는, 나의 기도조차도 모두
내 주위의 모든 사람, 즉 남편, 아내, 부모, 자녀, 이웃, 목회자 모두가,
나를 위한 사람으로 말과 행동을 하도록, 그렇게 내가 이기적으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주시옵소서!’ 기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환경이 편안할 때는, 내 신앙의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는다.
환경이 먹고 살만 하니까, 자기 신앙의 초라함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환경이 무너지면.. 신앙도 같이 와르르 무너진다.
어려움이 없을 때는 신앙생활 잘 한다.
교회에서 성가대, 교사로서 봉사도 한다.
그런데 그러던 신자가, 자기 삶에 큰 어려운 풍파가 닥쳐오면
그동안 자기가 신앙생활 해 온 것이..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자기가 이제껏 믿어왔던 것이, 풍파를 만났을 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신앙이 껍데기뿐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발견하는 것이다.
(그제야 발견하게 되니까.. 좋은 면도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 환경에 의존하는 신앙이 되고, 참 신앙이 아니다.
환경에 의존하는 신앙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된다.
환경이 좋으면 ‘믿습니다.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고
환경이 어려우면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
이렇게 환경에 일희일비 하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니다.
참다운 신앙이 아닌데도, 환경에 별 문제가 없을 때는,
자기가 신앙이 형편없는 줄조차 모른다.
왜냐하면 환경이 잘 되고 있는 한, 자기 신앙이 없다는 것이 겉으로 안 드러난다.
그러다가 환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날,
자기 신앙의 실상이.. 드러나게 되고.. 자기가 모래 성을 쌓고 있었음이 비로소 발견되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자’
즉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관계를 누리는 신자는
환경의 높낮이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의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 한 분과의 교제 가운데 나오는 것이지,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주변사람도 (환경과) 마찬가지다.
내 주변사람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자’는..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내 가까운 사람(배우자, 부모, 자녀, 친구, 교우, 목회자)
그가 어떻게 행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며, 저 상대방은 하나님께 맡긷고
나는 상대방에게 주님께 하듯이 내가 할 도리를 신실하게 하게 된다.
(기대가 없으니까, 실망도 없다. 좋은 의미로.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도와준다. 사랑과 미소와 친절과, 힘이 되면 물질로도)
▲교회를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분들은, 다른 교회에서 은혜도 못 받고, 힘드니까
이 교회에 나오면 은혜 받을 줄 알고, 교회를 옮기기도 하는데
제가 말씀드리지만
여기 온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온다고 해결될 것 같으면, 이 교회가 하나님이란 얘기가 된다.
이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거기서 안 되는 분은, 여기서도 안 된다.
문제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적 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 되고,
여기 와서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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