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양을 불러내신다 요10:3~5, 요일4:2~3 스크랩 글, 편집
◑서론/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구원
구원이 뭐냐?
예수님에게 귀속하는 겁니다.
이걸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자아(自我)가 해체당하는 겁니다.
“난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죄는 항상 “나 있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은 항상 ‘나를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고의 중심에 나를 두고 있어요.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종교!
나를 위한 교회!
나를 위한 직장!
나를 위한 배우자, 자녀!
이런 자아 중심의 사람을 죽이고..
예수 중심의 인간으로 만드는 게.. 구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원이란.. ‘난 죽었습니다!’ 고백하는 사람이 얻는 것입니다.
‘난 없는 자입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이걸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에요.
이렇게 되면, 신앙의 싸움이, 자기 부인으로 늘 나타나야겠지요.
‘성령의 소욕’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고
‘육신의 소욕’은 자기를 시인하라고 합니다.
마귀는 ‘넌 참으로 괜찮은 인간이다!’ 라고 하고,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넌 죽은 자!’ 라고 합니다.
그래요.
죄는 항상 자아 확장을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도, 나를 위한 예수님이 되고, 내 꼬붕이 되고 말아요.
결국 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구원을 받으면, 내가 예수님에게 복종하지요.
◑본론/ 자기 양을 불러내는 목자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pen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양들을 찾아내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이 비유를 생각하면, 뭔가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 생각엔 ‘우리 안에 있는 양’은
‘다 구원 받은 목자의 양’이라고 생각하는데.. 본 비유에선 아니라고 해요.
우리 안에 구원 받은 자기 양이 따로 있다고 해요.
우리 안에 구원 받지 못한 남의 양도 따로 있고요.
이 비유를 알려면, 먼저 이스라엘이 양치는 모습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주로 하면서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양을 기릅니다.
알다시피 양은 꼴(풀)을 먹고 삽니다.
꼴은 집에 있지 않고 산과 들에 있어요.
그래서 목자들이 봄~가을철에는, 꼴을 찾아서 집을 떠나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몇 개월씩 양을 방목을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각각의 양떼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나서, 야영을 하게 되어요.
목자(동네 사람)들은, 각자의 양들을,
낮에는 넓은 들에 방목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방에 흩어져 있는 양들을 한 우리 속에 모읍니다.
들에 있는 우리는
돌담을 쌓아서 양이 담을 타 넘고 도망하지 못하게
가시나무와 같은 것으로 돌담 위에 울타리를 칩니다.
이는 양이 이탈하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이리가 침입하는 것도 막기 위함입니다.
들판에 있는 양의 우리는 ‘공동 우리’에요.
동네 사람들이 함께 만든 ‘우리’입니다.
동네 사람의 모든 양들이 다 함께 들어가 있어요. 물론 밤에 말입니다.
낮에는.. 각각의 양들을 목자들이 몰고 나가서 각자 꼴을 먹이다가
저녁이 되면.. ‘우리’로 돌아와서, 공동 우리 속에 가둡니다.
그리곤 밤에 이리가 와서 양을 헤치지 못하도록
목자들끼리 순번을 정해서 보초를 세워서 지키게 하지요.
아침이 되면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 자기 양들을 불러내면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자기 양들만 목자를 따라 나서게 됩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양과 우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를 구원과 연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스라엘엔 두 가지 “양의 우리” 가 있어요.
하나는 집에 있고, 하나는 들판에 있습니다.
들판에 있는 우리는 ‘임시적인 우리’에요.
조금 전에 말한, 겨울이 오기 전까지, 방목을 하면서 사용하는 우리입니다.
본문에서 비유하는 우리는, 들판에 있는 임시적인 우리를 말합니다.
들판에 있는 임시 우리에는, 집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온 동네 양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공동 우리 속에는 여러 집에 양들이 같이 섞여 있어요.
밤에는 네 것, 내 것을 구분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자기 양을 공동우리에서 빼내서,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목자가 봐둔 초장으로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쉴만한 물가로 가든지.. 자기 생각에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본문의 비유의 핵심은
목자가 섞여 있는 우리에서 자기 양을 찾아(빼내) 간다는 겁니다.
공동 우리 속에서, 자기 양들만 빼내서 찾아가는 이야기에요.
구원론 적으로 말하면, 공동 우리 속에 있던 것을
주인이 '양의 이름을 불러내어' 찾아가는 것입니다. 요10:3
(양들이, 자기 이름을 알아 듣는다고 하지요?)
자 여기서 예수님이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양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자기 양들이 임시 우리에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양들을 데리고 갈 우리는.. 영원한 우리에요.
이걸 이 세상과 천국으로 표현해 봅시다.
이 세상은 ‘임시 우리’에요.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세상에 있는 자기 양들을, ‘공동 우리’에서 빼내어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임시 우리=공동 우리
▲이 비유의 핵심은
‘공동 우리’ 속에 ‘자기 양’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는 셈이지요.
맞아요.
양들 속에.. ‘자기 양’이 있고, 또 ‘다른 양’들이 있어요.
바울은 이를 “표면적 유대인” 과 “이면적 유대인” 이라고 했어요.
‘표면적 유대인’은 공동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양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모든 이스라엘이이요.
혈통으로 난 자는 모두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나 ‘이면적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양이에요.
‘이면적 유대인’은 혈통으로 난 자가 아니고, 언약으로 난 자들이에요.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에요.
‘공동 우리’속에 함께 가두어져 있으니까, 다 똑같은 양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그 중에 ‘예수님의 양’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하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은 두 계통이 있어요.
아브라함 혈통으로 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언약으로 난 이스라엘이에요.
광야에 같이 출애굽했지만,
그 중에 혈통적 유대인과, 언약의 후손인 유대인이.. 섞여 있었다는 겁니다.
여호수아, 갈렙 같은 이는.. ‘언약의 후손’이었죠.
모두 다 ‘언약의 후손’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한 가지 섬뜩한 것은,
‘언약의 후손’은 언제나 소수minority였고, ‘혈통적 후손’은 다수majority였습니다.
또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처럼,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보다.. 보통은 힘이 세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도 그러하도다’ 라고 말씀했지요! 매 시대마다 그렇다는 뜻입니다. 갈4:29
이런 구도는 이스라엘 내내 있어 왔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어요.
지금 교회 안에도 있어요.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자들을.. 예수님이 찾아내시고자 하는 겁니다.
겉보기엔 다 이스라엘 족속(신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혈통(육)적 이스라엘과.. 언약(영)적 이스라엘로 달라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언약적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이에요.
▲본문의 요지는,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 / “은혜 안” / “성령 안”이라고도 하는 ‘우리’에 있어요.
그저 육적인, 외적인, 어떤 그룹 안에 있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본문 요10:16절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다고 하지요.
‘이 우리’란.. 유대인들을 말해요.
그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란? ‘이방인 중에서 구원 얻을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유대인 중에서도 자기 양을 찾아내고
이방인 중에서도 자기 양을 찾아내서
예수 안에서 하나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인도하여서 율법(혈통, 전통)이라는 우리에서 끄집어 낸 양들과 함께
은혜라는 한 우리에 두어서 한 무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교회”라고 합시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양들이 있겠지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예수 아래 있는 성도’가 있겠지요.
예수 아래를 은혜 안에, 또는 언약 안에, 또는 성령 안에라고도 합니다.
그럼 ‘성령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
◑성도가 성령 안에 있는 증거들 요일4:2~3
사단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고, 흉내 내려고도 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만이 만들어내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참조해서,
참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증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증거1.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고전12:3, 마10:32, 롬15:9, 빌2:11
▶2. 죄에 대한 각성과 참회
사도 요한은, 참된 영과 거짓된 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을 이렇게 대조시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요일4:4~5
성령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여, 세상의 영을 이기고,
반대로 이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 즉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을 따르며,
즉 세상에 속한 말을 듣습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는 일에, 절대로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죄의 무서운 본질에 대해 느끼게 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죄 때문에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태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면,
그는 ‘예수님 안에’, ‘성령 안에’ 속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 것 없이, 무조건 복음 안에 약속된 ‘현세적 축복’만 추구한다면,
그는 ‘예수님께 속한 양’이 아니요,
‘육체를 따라 난 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3.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그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령 아래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일4:7절-21절까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누가 참된 영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표지로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시는 사랑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이 내 영혼에 보배로운 분으로 여겨지며,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끌려가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그분들의 임재와 교제, 교통을 갈망하고,
그분들을 따르기를 갈망한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요,
그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 맞습니다.
▶4. 성경과 진리에 대한 높은 관심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사람들이 성경을 매우 존중하게 되고, 성경의 진리와 신성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면,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 영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줍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해 주신 말씀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공부하게 만듭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몇 시간씩 보내거나 혹은 밤을 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3년 동안 매일 같이, 말씀을 강론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평양대부흥 때에도,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아주 열성적인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였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을 더욱 더 가까이 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났던 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아주 강렬한 관심과 신앙 고백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은 곧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참된 신자로 하여금, 성경에 기록된 주요 진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떤 체험과 기적에만 집착하고,
진리에 대해 관심이 지속적으로 없다면,
또는 ‘진리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식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
◑양의 문 요10:7
※성경에 <문>이란 표현이 종종 등장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요10:7
천국(새 예루살렘 성)에도 12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계21:12
<문>은.. 성도가 그 문을 통해서, 천국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어떤 <소통의 통로, 교제의 통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만 잘 알고 있는데,
'길'뿐만 아니라, 같은 의미로
요10:7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문'도 있습니다.
'길'이든지, '문'이든지.. 예수님의 중보적 사역을 잘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같은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다른 '길', 다른 '문'을 통해,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다른 '길' 또는 '문'은 모두 '절도'나 '강도'입니다. 요10:8
더 나아가 '양의 문'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양의 문으로 통하지 않고, 월담하는 것은 '율법을 통한 구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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