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는 이 길은 삼상6:7~15 11.01.30.설교스크랩
▶본문은 빼앗긴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수레에다 싣고는
그 수레를,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국경도시)로 향하도록 하지요?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오늘날의 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법궤를 끌고 가는 ‘암소 두 마리’는..
말씀을 갖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우리가,
그 말씀대로 따르기 위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는 어때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 법궤 끌 소를 찾을 때,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삼상6:7
▶왜 하필 젖 나는 암소를 택했을까요?
힘으로 따지자면 숫소 즉 황소를 택하는 게 옳잖아요?
무거운 수레를 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 좋은 황소가 제격입니다.
그런데 수레를 끌기 위해 선택된 것은, 황소가 아니었습니다.
또 법궤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서 순결함과 정결함이 필요했다면
아마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송아지를 선택하는 게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송아지도 배제되었습니다.
뭘 말하려는 것이겠습니까?
굳이 젖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해서인 겁니다.
그것은 아픔입니다.
이제 막 새끼를 낳아서 사랑으로 길러야 할 어미 소가
자기 분신과도 같은 새끼와 생이별을 해야 하는 것,
그건 뭘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 아픔이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구제역 때문에 수많은 소가 속절없이 죽어나갔습니다.
당시 수의사들이 주로 하는 일은, 소에 주사를 놓아서 죽이는 일이랍니다.
그 일이 너무 괴로워서, 수의사 된 것을 후회한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수의사가, 강원도 횡성의 한 농가에서 이런 일을 겪었답니다.
어미 소를 안락사 시키기 위해서 근육이완제를 주입하는 순간,
어린 송아지 한 마리가, 젖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하더랍니다.
일단 소에다 주사를 놓으면, 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0초에서 1분 사이에 다 죽는답니다.
그런데 이 어미소는,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3분간을 버티더니
새끼소가 젖을 떼자, 그제야 털썩 쓰러지더랍니다.
젖을 먹은 송아지는 영문도 모르고, 쓰러진 어미 소 주변을 계속 맴돌았고,
이것을 본 현장요원들은 다들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동물 역시 사람만큼 자기 새끼에 대한 사랑이 강하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런,
동물의 새끼 사랑을 직접 보신 분이 있을 겁니다.
개가 자기 새끼 강아지를 보호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새끼 낳고 그 며칠은 그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합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아지는 난 지 10분도 채 안 돼서 걸어 다닙니다.
그러면 어미 소가 그 새끼가 사랑스러워서 긴 혀로
온 몸을 구석구석 핥고 빨아줍니다.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송아지들을 어떻게 합니까?
‘집에다 가뒀습니다.’ :10
그래서 두 암소가 벧세메스로 갈 때 어떻게 했다고요?
‘울었습니다.’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2
여러분! 이 소가 왜 울었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새끼와 생이별 하는 게 슬퍼서 울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는 자기가 도살장에 가는 것을 알더라고요.
그러면 아주 슬프게 웁니다.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소가, 그 새끼와 생이별을 하는 겁니다.
새끼를 두고 가는 생이별도 아픔이지만, 그 길이 ‘죽음의 길’입니다.
(소나 개는.. 자기가 죽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 아픔 때문에 울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문은 그 암소의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받아야 될 메시지가 뭐겠습니까?
법궤 즉 말씀을 갖고, 말씀을 지키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큰 슬픔과 아픔이 동반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은 정말 힘듭니다.
외롭습니다. 괴롭습니다.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모든 괴롬과 희생과 슬픔과 아픔의 강도가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겁니까?
마치 갓 낳은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이나 저는
그 아픔에서 이미 벗어날 수 없는 궤도에 들어섰고,
더욱이 앞으로 그 아픔은 갈수록 작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커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그 아픔은,
젖 먹는 새끼와 생이별 하는 것만큼이나, 아프고 고통스러울 거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가 ‘축복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들이
많은 사람들을 입교로 안내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역시 계속해서 그런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평소 아는 기독교의 상식과 반대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라고 오늘 이런 말씀 전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게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든, 슬프게 하든, 맥 빠지게 하든..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픔이라는 겁니다.
▶정말 말씀은, 아픔 그 자체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런 아픈 말씀에 용기를 얻고, 치유가 될까요?
내가 아파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가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생활을 해 나가고, 목회를 하면서,
교회 때문에 아파하고, 성도들 때문에 아파하는 것은
제가 '궤도를 제대로 가고 있구나!' 싶으니까.. 오히려 위로가 되더라는 겁니다.
▶과거에 한 여집사님이 자기 남편 때문에 속상해 하면서
제게 의논을 해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명색이 집사인데,
주일만 되면 낚시에 빠져서 낚시터에서 사는 겁니다.
여집사님은, 자기 남편한테
제발 주일에 좀 교회에 나오라고.. 저보고 권면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남편 집사님에게 그렇게 권했습니다.
몇 번 권했더니, 정말 어느 주일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간 나온 뒤에 제가 그 남편 집사님께
“이렇게 주일마다 나오시니까 좋지요?” 물었더니
그 분 대답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목사님! 낚시터에 있을 때는.. 교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교회에 나오니까.. 낚시터 생각이 나던데
어느 쪽이 좋은 겁니까? 괴롭습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사실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두 경우 다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없는 것보다는 좋은 징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이런 갈등과 선택의 괴로움은
그 집사님 뿐 아니라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결국 참 신앙인은,
본질적인 것들을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판납니다.
당연히 갈등이 오고, 그 갈등은 결단으로 가는 시작이기 때문에
살다보면 겪게 되는 ‘신앙의 갈등’은.. 좋은 징후입니다.
▶여러분, 신앙문제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과 아픔을.. 지금 가지고 계시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것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더 심한 아픔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과 현실 속에서 오는 끊임없는 갈등들,
그리고 세상의 소리들 틈으로 들리는 십자가의 음성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이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는 한,
우리는 도저히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 아픔이 싫으면 말씀을 버려야 합니다.
이 아픔을 거부하고 싶으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니이다”(시119:105) 고백하면서
말씀을 순종한다면,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함께 수용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도 무조건 집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어떤 결단이 필요하고.. 그것은 그만큼 아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때까지 밥줄이었던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생업을 접고, 공부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어떤 결단이 필요하고.. 그것은 그만큼 괴로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자신은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딤후2:9
(법궤를 멘 암소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플수록.. 우리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가 갈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암소의 최후
▶그렇다면 그렇게 산 사람들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거기에 대해서, 본문은 충격적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암소들의 최후를 보십시오. 어떻게 됐지요?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4
자식들을 떼놓기까지 하면서, 수고한 암소들은
큰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즉 말씀 따라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의외로 영광이 아닌.. 비참한 최후라는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말씀을 굳게 잡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이들과 헤어지는 아픔까지도 참으면서 주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대합니까?
이제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을 것을 생각합니다.
즉 말씀을 따르는 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희생을 알면서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을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주의 일을 한 후의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영광이 아닌 바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으로 죽임을 당하고, 몸은 조각 조각 각이 떠지고,
마지막엔 불에 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영광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
희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우리 삶은, 애당초 영광을 받는 삶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 썩어지고, 더 희생하고, 그래서 결국은 제물 되는 순간까지 봉사하는 것,
이것이 말씀을 품고 사는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주시는 진정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한 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대접받기를 원하는 게 사실입니다.
이제 그런 우리의 체질은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는, 오늘 말씀은 우리 것이 될 수 없습니다.
▶1840년 9월 4일 웨일즈 리야드란 곳에서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중국 선교에 관심이 많던 이 젊은 목사는 24세 청년으로
신혼의 신부를 데리고 중국 선교사로 건너 오지요.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벌이기도 전에,
풍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린 부인이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이것을 견디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 온 김자평, 최선일 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서, 많은 한문 성경을 공급받고는,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그게 1865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렬 셔면 호를 타고 (통역사로) 조선으로 오게 되지요.
그러데 강화를 따라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 못 들어, 북상해서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부근이었는데,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강 모래 뻘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그때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바로 그 대동강변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7세로,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1866) 선교사로서,
한국 땅의 첫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 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또 성경을 뜯어서 벽지로 발랐던 영문 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자가 되고, 그의 집은 ‘널다리교회’가 됩니다.(장대현교회의 전신)
또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신앙생활은 아픔입니다.
신앙생활은 희생입니다.
내가 복음을 붙들고 죽어야.. 그 복음은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끝은.. 멸시와 조롱이었고,
제자들의 끝은.. 곧 순교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게, 오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가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픔 그 자체요,
그 결과는.. 풍요보다 오히려 가난이요,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기가 질리는 여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쯤에서 신앙생활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정말 아픔과 슬픔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파할수록, 우리가 슬퍼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만족스럽고 기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기쁨의 샘을 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가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그 샘은 더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로 죽은 두 암소처럼,
우리 선배들은 그렇게 기쁨으로 죽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들이 한 일이 뭐였습니까?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은 거저 살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픔을 당하고 괴롬을 당하고 슬퍼해야만..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그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쁨의 샘물은.. 펑펑 솟아났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파하고 슬퍼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이 모습이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아픔의 흔적으로만이 아니라.. 환희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모습을 마음의 영상으로 떠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희열을 아십니까?
목이 잘려 죽는 사도 바울의 그 기쁨을 아십니까?
인도의 한 이름 모를 땅에서, 창에 찔려 죽는 도마의 그 환희를 아십니까?
X자 형 십자가에서 온갖 회유를 거절하며 죽어간 안드레의 그 기쁨을 아십니까?
자기가 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폴리갑의 그 희열을 아십니까? 3차원이 아니라, 신비한 4차원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이름 모를 조선의 한 강변에서 참수형을 당하는
토마스 선교사의 그 환희를 아십니까?
우리 역시 그렇게 장엄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내가 말씀으로 인한 고난을 당할수록.. 그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면서 아픔을 느끼시면 됩니다.
이 길이 바로 우리가 가는 길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인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고통이 오고, 그 말씀을 따르느라
내가 점점 없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 기쁨의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더 아파하고 슬퍼하십시오!
그럴수록 여러분 영혼의 꽃밭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것을 선물로 받아, 그 향기로 평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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