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면 네 탓, 못 되면 내 탓 모두 스크랩 글, 정리
◑귀인 방식 출처
달리는 지하철 객차 통로 한가운데서 용변을 본 한 여성을 두고서
네티즌들은 그 여인을 가리켜 일명 ‘분당선 똥녀’라고 이름 붙였다.
며칠 후 그 당사자가 분당 노선을 자주 이용하는
40대 정신지체 여성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당시 네티즌들은 그 여인의 행위 자체보다도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의 행위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한 원인으로는 ‘개념이 없는 사람’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의 행동’ ‘술 취해서?’ ‘얼마나 급했으면..’ 등등이었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어떤 행동에 대한 원인
혹은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어떻게 추론하느냐를
심리학에서는 ‘귀인’이라고 한다.
여기서 원인을 추론한다는 것은, 객관적 원인이 아닌,
불분명한 원인을, 자기 주관적으로 지각한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주로 원인의 소재, 안정성, 통제 가능성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귀인을 분류한다.
그 중 ‘원인의 소재’ 차원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원인의 소재란..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원인을 자신의 내부요인으로 돌리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여건 등 외부요인으로 돌리느냐이다.
자녀가 공부를 못할 때 혹은 성적이 떨어졌을 때
부모는, 두 가지로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부모가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길들여주지 않아서’
혹은 ‘공부하는 방식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해서’라고 내부요인으로 돌리는 경우와,
그와는 달리 선생님이나 자녀에게, 즉 그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혹은 ‘노력이 부족해서’ ‘공부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 같아서’
라고 원인을 자신의 내부요인으로 돌리는 경우와
‘선생님이 공부를 잘못 가르쳐주어서’ 혹은 ‘친구 때문에’라고
외부요인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원인으로 귀인 하느냐에 따라
자기의 감정이 달라지며, 후속 행동과 그 대처방식까지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만일 부모가 자녀의 성적이 떨어진 것을, 부모 자신에게로 돌린다면,
미안한 마음과 함께, 어떻게 자녀를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자녀가 ‘노력을 하지 않아서’라고 원인을 돌리거나
혹은 ‘선생님의 지도방식이 좋지 않아서’라고 선생님에게 돌린다면
자녀나 선생님에게 화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녀도 원인을 자신의 내부요인으로 돌리는 경우와
선생님이나 부모 혹은 친구 등 외부요인으로 돌리는 경우는
그 감정과 행동과 대처방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은 자명하다.
▶분당선 전철 객차에서 용변을 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인을 ‘개념이 없어서’라고 돌릴 경우 분노나 개탄을 할 것이나
‘다급해서’ 혹은 ‘정신지체 때문에’ 등 어쩔 수 상황으로 그 원인을 돌릴 경우
어느 정도 납득을 할 뿐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귀인이론은 여러 가지 면으로 적용해볼 수 있다.
교인 간, 혹은 목회자와 성도 간 갈등이 발생했을 시
목회자는
그 원인의 소재를 자신의 교회운영방식의 미숙이나
지도력의 미숙 등 내부요인으로 돌리는 목회자가 있을 것이다.
반면 외부요인인 성도들의 신앙 탓으로 돌리는 목회자가 있을 것이다.
원인의 소재를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목회자의 감정과 행동과 그 대처방식은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목회자 자신에게로 돌릴 경우..
자신의 목회방식이나, 가르침, 혹은 스스로가 본이 되었는지 등을 점검할 것이나
성도들에게로 돌릴 경우.. 불평과 원망만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선 당장은 마음이 편할지 모르나, 발전은 없을 것이다.
▶갈등이 아닌 성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장의 원인을.. 목회자 자신에게로 돌릴 경우
자부심이 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나
자칫 우쭐한 마음이 생겨 거만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에게 공을 돌릴 경우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잘 되면 네 탓이고, 하나님의 은혜다)
성도가 예배에 불출석했을 경우도 적용해볼 수 있다.
A는 ‘권사이면, 집사이면, 성도이면 당연히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혹은 ‘그 한 시간도 못 낸단 말인가?’라고 귀인 할 것이다.
반면 B는
‘그 성도님에게 무슨 급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라고 귀인 할 것이다.
어떻게 귀인 하느냐에 따라
그 성도에 대한 감정과 후속행동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내 경우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자와 같이 귀인 했으나
지금은 후자와 같이 귀인하고 있는 편이다.
▶귀인방식은 대체로 성장과정에서 부모 등의 양육자로부터 학습된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학습한 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나 타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역기능적인 귀인방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인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변화를 위해서는 두 단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자신의 귀인방식을 탐색하고 또한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역기능적인 귀인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비난이나 비판이 아닌 ‘내가 지금껏 이런 방식으로 귀인하고 있었구나’하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지금까지의 방식과 다르게,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이 되는 방식인 기능적인 방식으로 귀인을 해본다.
그렇게 하다보면 점차 기능적인 귀인방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펀 글)
◑복의 통로를 존중하십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니라’(창15:1)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며, 복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그 당시에 복을 얻으려면, 아브라함과 가까이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 당시에 ‘복의 통로’이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에 그런 ‘복의 통로’가 많이 등장하지만,
사도바울의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딤후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through me'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모든 이방인이 복음의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당시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가장 중요한 통로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 ‘곁에 서셔서’ (그냥 섰다는 뜻을 넘어서, 그 편이 되어주셔서)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고 말씀합니다. 딤후4:17b
‘복의 통로’인 바울을 해치려고, 사자처럼 활동한 무리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복’의 가장 큰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열매가 있게 되고,
그 잎이 항상 푸름으로.. 복이 있는 자가 됩니다. 시1편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세상에 나누어주는 분들은, ‘복의 통로’들입니다.
비록 내가 직접 말씀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받은 말씀을, 내가 전달 받아서, 내 것으로 만들면 됩니다.
(과거에 선진국의 신기술을 전수받아서, 우리가 더 좋은 신제품을 만들듯이 말입니다.)
그 말씀을 내가 전달받아서,
내가 매일 그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고,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다보면,
그 말씀을 통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괄시하면 안 됩니다. 나를 위해 평강을 빌 수도 있고,
티끌처럼 떨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10:12, 14
나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 수도 있고, 요20:23
내 병을 위해, 하나님 앞에 대신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약5:16, 요일5:16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
그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자를 유심히 살피십시오.
그게 바로 당신의 ‘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펀글 정리)
◑반역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조심하기
성경에 보면, 좀 심하다 싶은 말씀이 있는데, 이단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이 1: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딛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아니, 길에서 만나면 인사도 하지 말라니..
인간존중과 사랑을 기본 모토로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아주 극단적인 반대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심하다 싶을 정도의 경고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말고, 짐승 취급해라’는 뜻이 물론 아니고,
‘그의 이단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내 이웃집에 살고 있어도, 친절하게 서로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단적 영향력만큼은 지극히 조심해야’합니다.
※명백한 이단을 뜻함. 자기 마음에 좀 들지 않는다고 ‘이단’으로 찍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비록 ‘이단’은 아니지만,
‘반역의 영/비판의 영’도
그 파괴적 영향력은.. 대단히 강력합니다.
내가 접촉하기만 하면, 쉽게 거기에 전염된다는 뜻입니다.
단지 전화로 한 번 통화한 것만으로도
그러한 영이, 내게 전이transfer되는 경우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결말이 ‘멸망’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반역의 영/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과는
마치 이단을 대할 때처럼, 내가 지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쉽게 전염되어.. 결국 내가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역의 영/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과는
마치 ‘이단에 속한 자를, 멀리하고 피하듯이’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기에 동참하는 것도,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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