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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한 음성

LNCK 2012. 5. 29. 09:42

◈세미한 음성                 왕상19:11~12, 벧전2:4~6          인터넷설교스크랩, 편집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지며, 생기가 잃어버린 삶을 살게 됩니다.


특별히 사역자는,

세미한 음성 inner voice을 시시때때로 들어야,

역동적이며 활발한 사명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엘리야의 영적인 회복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러,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9

아마 햇볕이 너무 강하고 더우니까, 서늘한 곳을 찾아갔겠지요.


엘리야는 그릿 시내에서, 떡과 고기를 먹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육의 회복만으로는

진정한 영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엘리야가 영적으로 회복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만 내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으로 가서 여호와 앞에 서 있어라. 이제 곧 내가 지나가겠다.’

그러고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여호와 앞에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지진 속에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지진이 물러간 뒤에는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불 속에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이 지나간 뒤에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왕상19:11~12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 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위를 부술 만큼의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큰 불이 났습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지진, 불이 지나간 뒤에 세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바람/지진/불의 세 가지 현상(기적)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하실 때마다 나타났던 기적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엘리야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세미한 음성’은

엘리야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셨습니다.  (실제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작고 세미한 소리’

이것은 어쩌면 엘리야에게, 매우 생소한 방식의

하나님의 임재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그저 하나님의 임재는

바람/지진/불의 역사로만..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탈진한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바람/지진/불의 외적이며 기적적인 역사보다도,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시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깊은 절망가운데 빠져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작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회복을 필요로 하는 엘리야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큰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한 때, 하나님의 때에 주어지겠지만, 그것과 아울러)

엘리야에게/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작고 세미한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기적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만,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바람/지진/불’같은 큰 기적은 10년에 한 번 일어나든지, 일생에 몇 번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나 ‘세미한 주님의 음성’은

매일 들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과 그 원천은,

어쩌다가 한 번 일어나는 ‘갈멜산의 기적’이 아닙니다.


내 힘과 생명의 원천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 사람은,

즉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되는 사람은,

힘과 생명력이 넘치는 삶과 사역을 해 나갑니다.


반대로,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되고.. 결과는 ‘힘 빠진’ 사람이 됩니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은,

아주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 혼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역자마저도 ‘세미한 음성’을 못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게 큰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러 스포츠 경기 내용을 훤히 꿰고 있고

여러 연속극 내용을 줄줄이 보고,

매일 인터넷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이에


즉 생활이 너무나 바쁘고,

생각과 머리가 산만한 가운데서는

주님이 말씀하셔도.. 내가 도저히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삶을 단순화 시켜야 하며, 또 단순화 시킬 줄 압니다.


내 삶이 단순해져야 하고..

만남과 모임을 단순화 시켜야 하고..

말이 단순해야 하고 (친구와 대화가 몇 시간 길게 되면, 영성이 상실되기도 합니다.)

사역도 단순해져야 하며  (주님과 교제가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취미와 잡기생활마저 단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할 때.. 또는 성경 볼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지,

안 그러면,

내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봐도.. 집중이 안 됩니다.

집중하고 마음 가다듬는데.. 최소 30분이상이 소요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크시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작고 세미한 소리로,

그에게 임재해 주십니다.


이러한 개인적이고, 친밀함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켜 줍니다.


혹시나 탈진하고, 지쳐있더라도

그 세미한 음성이 들리면,

그는, 본문의 엘리야처럼, 벌떡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엄청난 기적을 연이어 체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엘리야처럼!


오히려 큰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더 크게 실망감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을 지탱해 주는 것은, 작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친밀한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인격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한단다.’

‘나는 네가 이런 일을 해 주기를 원한단다.’

‘네게는 이런 잘못이 있구나!’


이런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거듭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쓰러지지 않습니다. 쓰러져도 다시 회복됩니다.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면.. 결국 쓰러지게 됩니다.


그 세미한 주님의 음성은 (개인 경건의 시간+조용하고 단순한 삶)

내 신앙의 근본을 지탱해줍니다.


나의 신앙의 근본이.. 지금 안정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까?


※같은 본문의 다른 설교 보기 ☞ 개인적인 은밀한 신앙 John Ryle

 

...............................


◑어제 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편집자 글)


벧전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산 돌’이란 단어가 나오면, 뭔가 꽉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살아있다’는 개념과 ‘돌’이라는 개념이 서로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약간, 머리가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enlightened


‘돌’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은 건축을 원하신다는 뜻이고,

‘산 돌’이라는 말은.. 그 건축은.. 벽돌로 지은 집이 아니라,

      ‘영적인 집’.. 쉽게 말하면 ‘우주적인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세워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산 돌’로서, 그 ‘영적인 집’의 기초석이 되셨고,

우리 각자도 ‘산 돌’로서, ‘우주적인 교회’의 요긴한 일부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벧전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6,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돌(기둥의 기초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우리 모두는 건축을 좋아합니다.

집을 세우고 짓는 것은, 대단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눈에 보이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신령한 집'을 세우기 원하십니다.


그 기초석은 ‘예수님이 산 돌, 살아있는 모퉁이돌’로서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그 위에 ‘산 돌’로 올려지고, 세워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를 통해서, 세워질 것입니다. (현상)

그러나 동시에 이 교회는, 비가시적인 invisible 교회를 통해서, 세워집니다. (본질)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는 ‘신령한 집’이 세워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벧전2:5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invisible 교회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교회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나는 ‘신령한 집’을 세우고 있습니까?

과거에 세운 적이 있습니까? 그걸 주님이 인정해 주십니까?

앞으로 어떻게 그 집을 세워나갈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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