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세겔과 옷 한 벌 P1 삿17장 출처보기 P2 P3
화면 맨 아래 있는, 동영상을 녹취했습니다.
-녹취록을 읽으시면, 전체 내용을 쉽게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동영상 재생이 안 되는 외국에서도, 내용을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Paris Reidhead (May 30. 1919 - March 23, 1992)
was a Christian missionary, teacher, writer, and advocate of economic development
in impoverished nations.
설교 <10세겔과 옷 한 벌>은, 패리스 라이드헤드의 설교중에
가장 충격적인 설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패리스 라이드헤드 목사는
수단 선교사와 뉴욕의 복음 장막교회 목회자로
그리고 90개 선교단체가 모델로 삼은Institute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의 책임자였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삿17~18장입니다.
삿 17장에, 에브라임 지파사람 미가가 나옵니다.
그는, 은돈 2백개를 내어서, 우상 둘을 만들어,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17:4
또 그는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대제사장의 예복인 에봇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없어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습니다. 17:4
레위인 한 청년이, 자기 살 곳을 찾아다니다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미가가 그에게 ‘우리 집의 제사장’ 되어주기를 요청했고,
보수로 매년 '은 10세겔과 옷 한 벌', 약간의 음식을 약속했습니다. 17:10 ←설교 제목
그래서 레위인 청년은, 그 집 가정 제단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미가는 ‘레위인을 내 제사장으로 삼았으니,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겠지’
기대했습니다.
삿18장에, 단 지파가 정착할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가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단 지파의 무리 6백인은,
미가의 집에, 에봇도 있고, 제사장도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에봇 : 제사장의 예복
그들 단지파는, 미가의 집에서, 에봇과 우상을 빼앗고,
레위인 청년 제사장도 같이 데려가 버렸습니다.
레위인은
‘한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좋다’는 요청에
덜컹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단지파와 함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삿18:19
나중에 미가가, 단지파를 뒤쫓아가서, 자기 소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단지파는, 미가의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단지파는 라이스에 정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녹취 시작)
레위인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기에
위험해질 수 있는 전방이나 후방 대신에, 단 지파 군인들 중간에 서서 걸어갔습니다.
미가가 사람들을 보내서 잡으러 올 경우를 대비해
군인들 사이에서 걸어간 것입니다.
◑본문 삿17~18장을, 오늘날 우리 상황에 적용해 봅니다.
▲본문과 관련해서
실용주의적인 종교에 대해 잠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체험주의적인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인 기독교
또한 내 삶에 유익한 하나님 등 useful God
사사기 시대에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다시 말하면 제멋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주요한 철학은, 실용주의 (프래그마티즘)입니다.
실용주의란, 간단히 말하면, 생산적이면.. 그것은 진리이며,
괄목할만한 결과를 산출한다면.. 그것은 무조건 선한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관습이든, 원칙이든, 진리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생산적/성과적/실제적 결과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용주의도 장점과 유익한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을 배제한 실용주의(인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서, 실용적으로/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다만 실용주의가 전부가 아니라, 다른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용주의적 관점으로만 평가한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하게 생각했던 성경의 인물들은,
그 시대의 가장 큰 실패자가 됩니다.
예를 들면, 노아는 평생 배를 만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를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평가해 보면,
아주 철저하게 실패한 종입니다.
120년 동안에, 그가 개종시킨 사람은,
자기 아내와 세 명의 자녀들과 그 아내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효과적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보면.. 그는 실패한 사역자입니다.
선교위원회는, 이런 사람은 강제퇴직 시켰을 것입니다.
배는 잘 건축했지만, 설교자로서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한 번 보십시다.
그는 매우 효과적으로 설교사역을 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매우 비효과적이었습니다.
설교(예언 선포)의 내용이나 그 노력에 비교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가.. 아주 미미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의 사역의 성공여부를,
통계학적으로 계산해 본다면,
별로 큰 점수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평민에게도, 귀족에게도 인기가 없었고,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결코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꼭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 사명감당의 측면에서는, 훌륭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가시적인 결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기쁘시게 한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외에는, 아주 분명하게,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잘 알려진 실패자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모든 기준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분은 교회나 교파를 조직하지도 못했고, 학교도 세우지 못했고,
선교회를 조직하지도 못했고, 책도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수천 명을 치료하고, 수천 명을 귀신에서 자유케 했지만,
한 번도 유용한 기술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유익한)
그런 기법을 만들어 내서, 대중화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3년의 사역이 다 끝났고, 부활 후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때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120~500명 정도였습니다.
주님이 붙잡히실 즈음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려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현재나 과거의 기준으로 봐도,
우리 주님은 실용주의/성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실패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성공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우리의 사역의 가치를 평가할 것인가?’
당신이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신가, 아니면 나의 소원을 이루는 수단인가?’
이 질문은,
신자가 신앙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아주 초기부터
분명히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목적이신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신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위 질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든 상관없이
성공한 사람은, 모두 존경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삶의 목적이든, 수단이든 그건 개의치 않고,
그가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가시적 결과를 만들어 냈으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본문의 미가는, 또한 레위인 자칭 제사장은
하나님을 자기 삶의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시절에,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에도, 미가나 레위인처럼,
하나님을 자기 수단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렇게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자기 명예를 위한 수단을 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가 성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를 무조건 존경합니다.
이게 실용주의적 관점의 영향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미가나 레위인 제사장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연봉 10세겔과 옷 한 벌’을 위해 ←설교 제목
하나님을 섬기는 직업적 레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진정한 레위인이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본문 삿17장에서 이 레위인은,
자기가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위치를 찾고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자리, 자신의 세속적 가치관에 따라 자신을 빛내줄 위치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레위인은, 자기 직업이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일 말고는, 다른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보수, 자기 사회적 지위.. 이런 것을 고려해서 목회지를 선택하는 것은,
또한 분명한 사명감 없이 목회지를 옮겨 다니는 것은.. 사사기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그 레위인은, 레위인(성직자)의 사명을, 그저 직업의 하나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직으로 쉬고 있었는데, 마침 미가가
자기가 임의로 만든 제단에 제사장으로 청빙하고,
거기에다가 임금까지 준다고 하니..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레위인은, 자신이 무직으로 노는 것 보다는
연봉으로 은10세겔(약 5천만원)과 옷 한 벌이라도 받고,
비록 가정 제단이지만 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그 돈만 준다면, 아무나 섬길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사람들(단 지파)이 나타나자
이 레위인은, 그 날에 당장 자기 직장을 옮겨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제까지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자기의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돈만 많이 주고, 대우만 잘 해 준다면..
묻지마 식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처음에,
미가가 자기 집에 만든, 사설 우상의 제단에
약간의 연봉을 받고
그 집의 제사장으로 일한 것부터가, 제 소견대로 행한 잘못이었지만, 삿17장
거기서 단 지파로 옮겨서,
더 많은 회중들(단 지파)가운데서
(미가가 만든 우상과 에봇을 훔쳐가지고)
제사장으로 자처하게 된 것은.. 더 큰 잘못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삿18장
제 소견대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독교가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직업적 종교인들이 양산되면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종교인들이 목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실용주의적으로 변화하게 된 역사
▲진화론이 그 단초
우리는 100~150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때 기독교에 있었던 갈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이란 책을 통해, 진화론이라는 가설을 발표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진화론을 철학에 적용했고,
신학자들은, 성경에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이
‘고등비평’이란 이름으로 유럽에서 일어났습니다.
반대로, 이 시기에 기독교계에서도 (역)부흥이 일어났는데,
찰스 피니의 대부흥입니다. 이때 성령이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놀랍게 부어졌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교활하게 공격해 왔지만,
<종의 기원> 즉, 진화론의 발표 후부터는
‘공개적으로’ 교회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프랑스의 볼테르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성경이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서나 찾아보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대담하게 선언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강력하게 논증을 제시해서
성경을 완전히 무너지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게 되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가져온 영향력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부터 철학이.. 인본주의가 유행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휴머니즘)란,
모든 것의 궁극적 가치와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 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에서 최대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인본주의(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와 구원의 목적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문제는, <하나님 중심적인> 기독교와 삶의 가치관이
인간 중심적인 기독교와 가치관으로.. 점점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내가)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 중심이 되면서, <하나님 중심>을 점점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인본주의가 득세한 가운데서,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권력을 가져야 하고,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다 동원하게 됩니다.
이런 철학은, 나중에 히틀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히틀러는, 니체의 철학을 자기 삶의 원리로 삼아서, 큰 재앙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휴머니즘)가 유행하게 되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 존중되면서,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실존주의로 발전되었고,
미국에서는 끔찍한 관능주의로 발전되었습니다.
독일에서 니체는 ‘권력’이 행복이라고 했고,
프랑스에서 철학자들은 권력보다는 ‘내 현실’의 실존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쳤고,
미국으로 건너간 휴머니즘은 ‘관능주의’적 행복을 유행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미국 교육도, 인본주의가 그 바탕입니다.
미국 교육에 영향을 준 철학자인 존 듀이는
교육자들을 다음과 같이 설득했습니다.
교육에,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으며,
아이들을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맞추어 양육하면 안 되고,
교육의 목적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하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행복을 찾는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리 미국도
이런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고,
또한 인본주의가 교육계를 장악하고, 학생들을 그렇게 교육을 시킨 결과,
지금 미국은 문화적으로 사사기 시대처럼 방종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인본주의 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법과 진리를 더욱 거부했고,
성경은 평가절하 되었고, 금지되었으며, 성경에 대한 반론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축출했다고 말했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화이거나, 아니면 그저 한 인간일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고,
개인이 행복의 기준을 정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종교도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류 없음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예수님을 꼭 믿어야 하는가? (0) | 2012.07.05 |
---|---|
십 세겔과 옷 한 벌 P2 / 패리스 라이드헤드 (0) | 2012.07.05 |
하나님이 나를 복주시는 방식 (0) | 2012.07.03 |
십자가 길의 여정 (0) | 2012.07.01 |
레너드 레이븐힐의 생애와 그의 기도 Ravenhill (0) | 2012.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