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 계2:18~23, 왕상18:26~29
계시록 20강 녹취
............< 서론 >...........
◑2:18절, 전체 주제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7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관한 묘사’는 7교회마다 각각 다른데,
그 각각의 묘사는, 각각의 편지 내용/주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담고 있다.
눈이 불꽃같다.. 심판주를 의미한다.
발이 주석 같다.. 심판주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석은.. 쉽게 말하면 놋이다.
빛난 주석은, 번쩍 번쩍 광이 나는 놋이다.
놋의 특징은 ‘단단함’이다. 심판주의 엄격함을 나타낸다. *냉면 그릇이 놋그릇
그래서 서두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통해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의 전체 주제를 살피면
‘심판주의 엄격함’이 되겠다.
◑2:19절, 칭찬
19 내가 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풀어서 쓰면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낫다’는 뜻이다.
참고로, 19절 서두의 ‘사업’은 ‘행위’와 같은 말이다.
헬라어로 ‘에르곤’인데, 사업business도 되고, 일works도 된다.
같은 말을 19절 서두에는 ‘사업’으로 번역했고, 나중에는 ‘행위’로 번역했다.
에베소교회와 대비된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행위가 더 많았다.
여기까지 칭찬이고..
........... <본론> .........
◑2:20절, 책망,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아내인데, 두로왕의 딸이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시집을 왔을 때, 바알과 아세라의 여선지자로 자처하면서
열심히 북왕국에, 바알 신앙을 퍼뜨렸다.
원래 왕비인 이세벨이 선지자인 이유는, 아래 구절에 나와 있다.
왕하9: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 idolatry 과 술수 witchcraft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여기서 ‘술수’는 마법, 점치기 witchcraft, sorcery 이라는 말이다. *케쉐프
이런 마법을 행하는 자들을, ‘술객’이라 불렀는데, 출7:11
마법사, 또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란 뜻이다.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였다.
그래서 계시록 본문에 이세벨을 ‘자칭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 가운데, <이세벨의 가르침>에 넘어간 자가 있음을 책망하셨다.
계2:20b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위 구절에 보면, 당시 초대교회에 <이세벨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항해서 싸우던 장면을 보면,
당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의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1.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18:26,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바알 선지자들은, 그들의 제사를 축제처럼 드렸다는 것이다. 뛰놀더라
물론 교회도 ‘예배는 잔치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즐겁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등, ‘잔치’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잔치이며, 누구를 위해 뛰노는가?’ 에 달려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말 그대로, 어린 양을 위해서 축제를 해야 한다.
예배는..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잔치는 아니다. 부수효과는 있더라도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예배는..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쁘고, 내가 위로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은연중에 ‘사람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자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도, 이제 거의 ‘내가 듣고 보기에 좋았다’는 뜻이 되어 버렸다.
예배에 밴드를 동원하는 것, 또한 발을 구르며 찬양하는 것,
그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만약 그것이 ‘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제단 앞에서 뛰어논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세벨의 가르침에 감염된 것이다.
요즘 청소년 집회에는 드라마, 멀티미디어가 종종 동원된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또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
참석자들이 ‘재미있게 뛰어논다면’ .. 그건 바알의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배가 지루하더라도..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져야 한다.
즐거우면 더 좋겠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쁨이 충만할 경우도 있다.
여러분, 예배는,
거기에 모인 참석자, 회중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들에게 뭔가 유익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 아니다. 그런 부수효과가 있겠지만.. 혹시 없어도 무방하다.
때때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 각자의 죄가 양심에 드러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불편해져야 된다.
때때로 우리는, 말씀에 나를 비추어, 통회하는 슬픈 심령이 되어야 한다.
물론 너무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격해서..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발을 구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젊음과 춤 실력을 발산하기 위한
‘뛰어노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 계시는지, 온데 간데 없고,
우리들끼리만 모여서 뛰고 굴리는 잔치.. 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예배는, ‘예복’이 필요한 잔치이다. ‘의의 옷’을 뜻함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격식 있는 formal 잔치라는 것이다.
▲2. 큰 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더라
왕상18: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은, 자기 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큰 소리로 외쳐 부른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면, 혹시 깰까봐..
즉 이 말은, 바알 신은, 인간이 고안해낸 신이라서,
인간과 비슷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면.. 깨어나는 신’
오늘날 교회에도,
예수가 누구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항상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하게’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도 싫어하는 줄로 여긴다.
물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공통분모가 많이 있지만,
‘인본주의적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요즘 ‘가요 콘서트’에 가서, 열광하고, 감동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무슨 가수 콘서트에 가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차고,
‘나가수’ 경연장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는데,
이들이 감동 받는 것은 ‘큰 소리로 열광’하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은 주로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큰 음향’이다.
거기서 소곤소곤하면.. 아무도 감동 못 받는다.
물론 우리가 성령이 감동하시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소곤거리는 소리에도.. 반응하신다.
보통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때는,
큰 소리로 부르짖기 보다는, 소곤소곤하게 주님과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세미한 음성
주님이 내 가까이 계시는데, 큰 소리로 외쳐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때는 서로 소곤거린다.
▲3. 자해
왕상18:28,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바알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으니까, 자기 몸을 자해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해서, 신을 협박하는 것이다.
‘규례를 따라’ 했다는 것은.. 그게 그들의 관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자기 몸을 자해하는 일을, 제사 드리면서 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1백년 만에 급성장한 이유는 ‘새벽기도’였다.
한국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새벽마다 기도하던 것이, 전통신앙이었다.
그것이 ‘새벽기도’로 자연스럽게 대치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복 받는다’는 민간신앙도, 고스란히 그대로 옮겨졌다.
원래 기독교 신앙과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강조하는데,
그 원래 목적은 퇴색되고 ‘자기 소원을 간절히 기도해서, 받아내는’
그런 새벽기도로 변질된 때가, 과거에 한 때 있었다.
새벽기도는, 성경에도 나오고, 아주 꼭 필요한 것이고, 적극 권장해야 하지만,
오직 자기 소원/야망의 성취를 위해서
‘새벽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 이것은 타종교와 똑같은 무속신앙일 뿐이다.
동남아의 불교, 도교, 힌두교 사원에
새벽이나 아침마다, 무슨 꽃과 음식까지 싸들고 가서 펼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 종교성과 열심히 대단하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자기 욕심과 소원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비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기도와 반드시 달라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헌신이지만,
신자가, 무슨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금식을 하거나 집을 파는 것은..
죄송하지만 그것은 자해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이 거의 다 없어졌지만,
‘큰 꿈을 품으시오. 그리고 당신의 그 꿈의 성취를 위해서
이것도 드리고, 저것도 아낌없이 바쳐보시라!’ 이건 투기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바알 종교요, 이세벨의 가르침(자해로 요구 관철)인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와 인격적 관계를 먼저 원하시며,
그런 ‘투기와 뇌물’에는 오히려 벌을 내리신다.
물론 순수하게 십일조와 헌금과 구제를 드리고,
그래서 복을 받는 경우도 반드시 있다. 그러므로 헌금은 가급적 드릴수록 좋다.
또한 주님은 반드시 갚아주신다. 혹시 현세에서 안 갚아주시면, 내세에서 갚아주신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네가 뭘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지혜를 원합니다’고 대답해서, 지혜를 받았다.
이 내용을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솔로몬이 지혜 이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내 소원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히 받기 위해서,
일천번제단을 쌓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 원해서, 일천번제 할까?
(소원성취 목적의) 새벽기도, 백일작정기도.. 이건 다 불교적 기원을 갖고 있다.
이걸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는 것이다.
자해와 비슷하다. 자기를 괴롭게 해서, 신의 긍휼과 응답을 받아내는 행위다.
삼보일배, 1천배(1천 번 절하기).. 다 그런 식이다.
그런데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면.. 결국은 망한다.
계속되는 2:21~23절에 그 내용이 나온다.
▲4. 진언 (미친듯한 예언)
왕상18: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진언은 frantic prophesy 미친 듯한 예언이다.
제 멋대로, 제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뇌까리는) 것이다.
대체로 보면, 예외도 있지만
참된 예언은.. 공명현상을 일으킨다. 듣는 사람이 다 그 권위에 압도되고, 수긍한다.
거짓 예언은.. 자기 스스로 권위를 세워야 되니까.. 광란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명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듣는 사람에게 아무 감동이 없다.
▲정리하면,
위에서 ▲1~▲4.까지 살펴보았는데,
이런 <이세벨의 가르침>이.. 당시 두아디라 교회에 많이 침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든 시대에, 같은 경고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면.. 결국은 망한다.
그 내용은 ☞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를 꼭 보세요.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자기 소원 성취>를 근거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자기 소원 성취>를 근거로 하는 신앙은
동남아/남미/아프리카의 신앙이.. 형태는 달라도.. 속 본질은 다 그것이다.
사원에 헌금을 듬뿍 하더라도.. 속 본질이 ‘소원 성취’이다.
기독교는.. 그런 ‘바알 신앙, 이세벨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우상>이 되면,
그 <자기 성공>이란 우상을 위해서, 하나님을 자꾸 이용하려 든다.
또 교회도, 일단 가시적 성과(교회성장)를 내기 위해서
신자들이 <자기 성공>이란 우상을 위해서, 하나님을 자꾸 이용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과 같아서,
결국은 다 망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자의 결말은.. 멸망인데..
그것이 구약성경(사사기, 룻기, 역사서, 예언서)의 반복되는 메시지인데,
오늘날 신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경을 못 배워서 일까?
◑2:21~23절
아래 구절들에 대한 해석은 ☞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를 보세요.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계시록을, 일차적으로 구약의 인용이라고 볼 때,
우상숭배를 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아합과 이세벨은
결국 그 아들(요람) 대에 이르러, 예후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때 아합의 70자녀가 하루만에 몰살당했는데, 왕하10:1~7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구절은, 일차적으로 그 사건을 가리킨다.
그것을 두아디라 교회 및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우상숭배자들 및 그 자녀들은.. 결국 완전히 패망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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