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 탄식, 초청, 경고 사1:1~20 인터넷에서 스크랩
이사야는 BC 8세기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 유다도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가?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는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만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심판을 통해서 그들을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는 <심판의 책>임과 동시에 <구원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이든/ 구원이든..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속 깊은 사랑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는 전체가 66장으로서 성경 66권과 숫자가 일치합니다.
이사야를 두 부분으로 나누면 전반부 1-39장까지가 심판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구약성경의 책 수인 39권과 일치합니다. 내용도 구약과 비슷합니다.
후반부인 40-66장은 27장으로서 신약성경의 권수와 일치합니다.
내용도 은혜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서 신약성경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가리켜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이사야서를 가장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신약 전체는 시편이 가장 많이 인용됨)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수난당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 부활 등,
예수님의 생애가 다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서를 가리켜 <제 5복음서>라고 합니다.
이사야서는 수많은 복음의 진리가 알알히 숨겨져 있는
진리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장은 이사야 전체의 서론으로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사1장에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3단어로 축약할 수 있는데.. 탄식, 초청,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1. 탄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첫째가 뭐라고요?.. 탄식입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향해서 탄식하고 계십니다.
4절에, “슬프다” 탄식하십니다. 이는 원어로 ‘호이’인데, ‘아이고’ 하는 곡소리입니다.
‘아이고, 하늘이여, 좀 들어보소, 땅이여 좀 들어 보랑께’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처럼 탄식하며 통곡하고 계십니까?
2~3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 보면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소망가운데 양육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온 세계 위에 뛰어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계명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시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보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만홀히 여기고, 멀리 도망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배은망덕합니까?
▲소나 나귀는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주인을 거역하는 법이 없습니다.
저도 어려서 시골에서 소도 키워보고 개, 돼지, 염소, 닭, 토끼 다 키워 보았지만
주인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하는지 모릅니다.
소에게 명절이라고 무슨 특식을 준 적이 없습니다.
냇가에서 풀 뜯어다가 구유에 던져 주면서 “먹어” 하면, “뿌우” 하면서 잘 먹습니다.
개에게 생일이라고 무슨 케이크 사 준 적 없습니다.
밥 먹다가 생선 뼈다귀만 던져 줘도 잘 먹습니다.
“저리 가” 아무리 야단쳐도 주인에게 대들거나 주인을 무는 법이 없습니다.
주인이 어디 갔다 돌아오면 주인왔다고 꼬리치며 달려옵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어떠합니까? 다 죽어가던 사람 구원해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키워줘도 은혜를 모릅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반발하고 대적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내게 해 주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옆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우리는 요 모양 요 꼴입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아버지께 섭섭한 마음을 품습니다.
▲이처럼 배은망덕한 인생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4절을 봅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슬프다”(호이).. “아이고~” 하나님은 분노하시기보다 먼저 탄식하십니다.
그 탄식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입니다.
여러분, 분노와 탄식은 다릅니다.
사람이 분노하면 다른 사람을 때리지만.. 탄식할 때는 자기를 칩니다.
자기 가슴을 치잖아요.
분노는 미움에서 나오지만.. 탄식은 안타까움에서 옵니다.
안타까움은 애닳은 사랑입니다. 가슴 아픈 사랑,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안타까움, 애닳음, 탄식.
즉,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랑’이 바로 탄식입니다.
▲저희 형제간이 7남매입니다. 그 중에 항상 말썽피우는 분이 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 형제 찾아와서 돈 달라고 손 내밉니다.
정말 얄밉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돈도 없으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돈을 마련해서 몰래 도와줍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십니다.
가슴을 치며,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를 모르고, 자행자지하고 제 갈 길로 갈 때,
그냥 미워만 하지 않으십니다. “슬프다”(호이) “어찌할꼬”
우리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탄식> 관련글 모음
성령 하나님의 기도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함부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멀리 나가지 못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합니까?
6절에 보면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로 병들고 사단에게 얻어 터져서 온통 상처투성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이 쳐들어 와서 성읍은 불타고, 토지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그렇게 영광스럽던 시온이
이제는 다 쓰러져가는 과수원의 원두막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패역했으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10
그렇게 부르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이스라엘백성의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예배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11,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들은 월삭과 안식일, 대회, 성회, 각종 절 기등은 잘 지켰습니다.
그때마다 살진 짐승과 제물을 풍성하게 가져다 바쳤습니다.
실제로 유월절이 되면 하루에 186,000마리의 양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이 내게 무엇이 유익이뇨, 나는 그런 것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가증한 것들이다. 내게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물만 갖다 바치지 마음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지, 진심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생활을 가리켜 “마당만 밟는 신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면, 어찌 성전 마당만 밟고 갈 수 있겠습니까?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하나님과 연합되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게 보통 일입니까? 우리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복중에 복이요,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마당만 밟아서는 안 되죠. 주님께로 가까이 가야죠.
진정한 예배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더 뜨겁게 더 간절하게 더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는 것. 그래서 주님을 닮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
내 평생에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당만 밟고
“하나님 저 왔다 갑니다” 얼굴도장만 찍고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사는 있는데 예배가 없었습니다. 제물은 있는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이제 얼마 후면 추석이 다가옵니다.
어떤 자녀가 명절이라고 부모님에게 비싼 선물 박스를 보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절대로 부모를 찾아오는 법이 없다고 합시다.
더구나 부모님께 비싼 선물들 보냈으니까 자기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합시다. 부모가 그런 자식을 좋아 하겠습니까?
“슬프다! 아이고! 동네사람들! 내 말 좀 들어 보소. 뼈 빠지게 일해서 키워놨더니
애미애비도 몰라본다요. 세상에”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원하는 것은 넘쳐나는 선물이 아닙니다.
직접 찾아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밥 먹으며 대화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자식 손자, 손 한번 잡아보기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행사가 아닙니다. 화려한 공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정성, 우리의 사랑, 감사, 진솔한 회개와
헌신과 찬양과 경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기뻐하고 함께 기뻐하고 감격하는
축제의 장이 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영적 축제의 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뜨거운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나의 예배를 진지하게 체크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배는 공연이 아닙니다.
예배는 observer로 참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주일날 눈도장만 찍는 Sunday Christian이 되지 맙시다.
매일 매일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Everyday Christian이 됩시다.
우리가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리는가에 따라서 내 영이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됩니다.
개인/가정/공동체 예배가 살면 삶이 살아납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삶이 거룩해지고 역동적이 됩니다. 사단이 심는 두려움과 염려, 근심과 걱정 등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고 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소홀히 했을 때,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졌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니까 세상과 가까워지고
죄를 짓고 삶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15
이는 실제 삶 속에 죄가 넘쳐난다는 뜻입니다.
부정과 부패, 무정 무자비, 음란과 탐욕의 죄가 넘쳐났습니다.
과부와 고아 등 약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압제했습니다.
악한 행실로 인해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끝났다. 더 이상 너희와 상대하기 싫다. 저리 가라” 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
◑2. 속죄를 위한 초청
우리 다같이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우리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두 번째는, 속죄를 위한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오지 마라” 하시며 쫓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쉬운 쪽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하나님이 오히려 아쉬운 듯이 말씀하십니다.
“오라! Come now, 지금 와라. 와서 서로 변론하자”
이것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것입니다.
한번 시시비비를 가려보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합리적으로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대화를 나눠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한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칙적인 분이시라면 당장에 심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 지금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가슴을 열고,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눠보자고 하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초청입니까? 하나님과의 대화는 영혼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지난 주에, 한국에서 쉬고 있는 아프리카 J선교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더 이상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오라”고 해서, 와서 만나서 목자님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같이 공부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이 열리고 얼굴이 환해져서 방향을 잡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같이 만나서 터놓고 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고 나무 뒤에 숨었을 때도 하나님이 찾아가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아담아! 제발 나와서 대화를 하자꾸나”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심판하시기보다, 대화를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꾸짖으시러 아담을 찾으셨다고 하는데,
원래는 아담과 하와를 회복시키시러, 찾으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서로 변론해서 그들의 죄가 발견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법대로 죄 값을 치루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18b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는 너무나 파격적인 판결입니다.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으면 당연히 중형을 선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친히 씻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눈과 같이 하얗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 값을 치뤄라” 이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이 짓는데, 그 대가는 하나님이 치루시겠다.
그래서 정결케 해 주겠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삼하15장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향해서 반역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와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 시켜서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합니다.
결국은 왕권을 탈취하고 아버지의 첩들을 백주에 강간합니다.
세상에 그런 죽일 놈이 어디 있습니까?
당장에 군대를 풀어서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식과 싸우지 않고 피신을 갑니다. 나중에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도
압살롬을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몰라보고 요압이 압살롬을 죽여 버립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 :33)”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등에 칼을 꽂은 자식을 가리켜서 어떻게 다섯 번이나
“내 아들, 내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비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이요, 대속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압살롬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은망덕한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처벌하시기보다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그의 정결한 피로서 우리의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에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비록 염치없지만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초청에 감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할 때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추하다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과거의 수치, 허물을 다 말소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딸로 맞아 주십니다.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찬양합니다.
▲가만히 보세요. 인간의 역사는 죄로 말미암아 그 손에 피가 가득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그 손에 십자가 보혈로 가득한 역사입니다.
인간은 이기심과 탐심으로 다른 사람의 피를 피흘리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으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십니다.
피는 다 피로되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십자가에 못 박힌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내가 너희 죄를 씻어주마 너희의 허물을 가려주마. 너희의 상처를 치유해 주마”
우리가 우리를 향해 두 팔 벌리고 계신 주님께로 뛰어 가야 하겠습니다.
더욱더 가까이 적극적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나의 죄를 회개하므로
어떤 진홍같이 붉은 죄도 씻음 받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진정한 교제가 있는 삶, 주님과 하나되는 감격스런 예배가 있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3. 경고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세 번째는 경고입니다.
사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언제까지는 두 팔 벌리고 기다리시는 무골호인이 아니십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오라 오라” 초청해도 응하지 않습니다.
“주님! 나중에 갈께요” 어떤 사람은 “임종하기 직전에 갈께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면
주님께서 땅의 아름다운 소산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교만하여서 끝까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에 삼켜진다고 했습니다. ↖
이는 멸망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 당장 주님께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마치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탄식과 초청과 경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랑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에 불과합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탄식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초청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무섭게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문밖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나아가므로 그 내면이 정결케 되어서
본래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주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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