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43:1~21 인터넷에서 스크랩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예정된 70년의 포로생활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바벨론 하도록 해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이 일이 이루어질까?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심기 원하셨습니다. 비전을 심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이 과연 누구신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맺어져야 믿음과 신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슨 일을 행하기 원하시는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일을 행하기 원하시는가?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가?
그리고 나를 통해서 무슨 일을 이루기 원하시는가?
깨닫고 우리 마음에 소망이 불타오를 수 있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이 행하실 <새 일>
▲그러면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행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19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이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 일은, 과거에 출애굽 때 행하셨던 하나님의 일과 대비해서, ‘새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 보면 출애굽역사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열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를 박살내셨습니다.
애굽이 자랑하던 최정예군대를 다 홍해바다에 수장시키셨습니다.
홍해바다를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8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과거에 그 출애굽역사를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출애굽역사가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루실 출바벨론의 역사, 그리고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출애굽 역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출바벨론때는 모세같은 지도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사왕 고레스를 구원자로 삼으셔서
신기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명을 내립니다.
고국에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고 재료까지 다 제공해 줍니다.
이것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고레스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자 고레스가 모든 것을 다 배려해 줍니다.
44:28절에 보면 고레스를 ‘내 목자’라고 하십니다.
45:1절에서는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고레스가 그리스도처럼, 출바벨론의 구속역사를 감당할 주역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 정말 놀라운 새 일 아닙니까? 이방인인데, 한 번도 성경공부 해 본 적도 없는데
그런 고레스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 새 일이 아닙니까?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 했던, 꿈꿀 수도 없었던 엄청난 일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새 일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십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탄생하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사7:14)”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 이것은 정말 새 일입니다.
어떻게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아들을 낳습니까?
인류역사 속에 한 번도 없었던 새 일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몸 찢고 피 흘려서 돌아가십니다.
이로써 그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서 죽이고 그 피를 뿌려서 죄를 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점 없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 또한 새 일입니다.
이 역사가 너무나 신비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예수의 영이 들어와서, 새 창조(새 일)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자
그 두려움 많던 제자들이, 담대한 말씀의 종요, 복음의 투사들로 변화됩니다.
새 일입니다.
이 예수님은 또 마지막 날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1: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새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새 일의 연속입니다.
그 새 일이 지금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구태의연하게, 과거의 일을 반복하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주의 일은 항상 새롭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우리 인생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얼마나 놀랍고도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까?
죄 때문에 원치 않게 미움에 포로 되고, 음란에 사로잡히고,
시기심과 두려움, 절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비참한 인생을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죄의 세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한 구원의 고속도로를 뚫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한 인생목적을 가지고 힘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출애굽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자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라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앞으로 펼쳐질 새 일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거에 얽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잊어버리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 미래 지향적인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말씀이,
출애굽 때도 되지만,
바벨론 포로로 고생하던 일들도.. 역시 ‘이전 일’입니다.
예수님도 눅9:62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꾸 뒤를 돌아보고 과거에 얽매인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에 잘 했던 것, 과거에 힘들었던 것,
과거의 영광과 상처, 아픔 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잘 했던 것이던 못했던 것이던 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3:13에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일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인생,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도전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누가 새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친히 행하십니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이 어찌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운데 새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사모님들이 월화수 모여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우리가운데 기도의 불, 전도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의대 땅에 길이 열려서, 양들이 오고 있습니다.
요즘 보면 양들이 양들을 데려오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요나단 목자가 신입생들 온다고 전도 나오라고 해도
목자들부터 나오지 않아서, 요나단 목자가 씩씩거리며 혈기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시면접 때부터 목자들이 몰려가서, 대대적으로 fishing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전에는 피싱하면, 학교 교직원들이 우리UBF를 쫓아내었는데
이번에는 보니까, 직원아저씨가 나와서 좋은 일 한다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것 정말 새 일이 아닙니까?
▲저는 요즘 OOO 목자님의 변화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분은 지난 9년 동안 게임과 주식옵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몇 달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죄문제에 대해서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하시고
게임과 주식옵션을 딱 끊게 하셨습니다. 지금 2달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술이나 담배 끊은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캠퍼스에 올라가서 신입생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신입생 전도를 얼마나 붙임성 있고 재미있게 하시는지, 제가 옆에서 한 수 배우고 있습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새 일입니다.
“보라! 새 일을 행하리니 OOO 목자가 위대한 1:1 성경선생이 되리라.”
주님이 반드시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찾아보면 얼마든지 길이 있습니다.
광야에도 길이 있고 사막에도 생수의 샘이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어떻게 하면 학생들과 접촉해서
이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을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언어교육원에 들어가서 학생들과 함께 영어공부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들과 공부하면서 이들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저보다 20살, 25살 어린 학생들이지만
마음을 낮추어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영어도 공부하면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호주 시드니에서 어학연수를 했는데
멕과리대학 옆에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들이 멕과리대학을 개척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러냐고 해서 대화가 되어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호주에서, 그리고 군대에서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마땅히 나갈 교회가 없어서 못 나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오라고 했더니, 이번 주부터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박OO 목자가 중심이 되어, 네이버 카페를 통해서 온라인 fishing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피싱했던 신입생 양 50명이
전도지를 보고 우리 카페에 들렸다 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시대이기 때문에, 사이버 상에서 길을 놓아주면
그 길을 통해서 양들이 오게 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20절에 보면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깜짝 놀래서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광야와 사막의 생태는 사람보다 들짐승이 더 잘 압니다.
쓰나미가 오면 짐승들은 어떻게 알고 다 미리 피한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들짐승조차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 앞에는 깜짝 놀라서
하나님을 존경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의외의 일이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UBF가 지난 50년 동안, 광야와 같은 캠퍼스에, 길을 내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전 세계 90개국에 1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서
사막과 같은 세상에 강을 내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경한 일이요 앞으로 더 많은 나라에
더 많은 캠퍼스에 길을 내시고 강을 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 양들을, 우리 자녀들을
이 역사에 주의 증인들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말고 옛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펼쳐질 새 일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전진하는 인생, 도전하는 인생,
개척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1. 하나님과 우리의 <새 관계>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관계가 어떠한가 살펴봅니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는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부르는 자상한 음성과 같습니다.
“애야, 내가 너를 창조했단다. 나는 너를 지었어.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단다.”
실제로 6b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아들, 내 딸들, my sons! my daughters!’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1:4에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1:10에서는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아주 호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완악하고 음란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가장 저주스러운 말로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 동안이나 포로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훈련기간이 끝났습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위로하시고 아들로 딸로 다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너를 지었고 내가 너를 구속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속 깊은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실제로 부모도 그렇습니다.
자식들이 나쁜 짓을 하고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지기까지 야단을 치고, 심지어 벌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부모의 본심은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4a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요’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배’로 이름 짓는 부모가 있는데,
‘김/이/박보배’만 보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께는 최고로 보배로운 존재들이요, 존귀한 자들입니다.
저는 요즘 가봉에서 온 애디 형제와 매주 수요일마다 1:1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까만 흑진주처럼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보배롭게 여기셨으면
애굽과 구스를 속량물로 삼으시면서까지 그들을 구원하셨겠습니까? 43:3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롬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자를 내놓겠습니까? 그것도 십자가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고국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안전하게 귀국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물 가운데 지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타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의미는 일차적으로, 천국 귀환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세력도,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요일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마음에 파고드는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출바벨론 하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 개척하고 도전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43:5~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땅 끝에서 끌어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생생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기 원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땅 끝에 있을지라도,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증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인생이 극적이라는 것입니다. 드라마틱합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세요. 모세의 인생을 보십시오. 다윗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다니엘, 에스더, 모르드개.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옵니다.
또한 영광스럽게 됩니다. 이들의 인생이 모두 극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극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하시고, 나일강에 빠뜨리기도 하시고,
사자굴에 던지기도 하시고, 수많은 전쟁의 위기를 당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승리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극적인 것을 좋아하셔?
스릴 넘치는 드라마 작가처럼? 왜 그렇게 하십니까?
43:8절 말씀처럼 ‘사람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막히고 귀가 닫혀 있기 때문에 밋밋해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뭔가 드라마틱한 전환이 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잖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인생에 한편의 드라마를 제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작품의 주인공들입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죽는 것 보셨습니까?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수많은 위기가 있을지언정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땅 끝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끌어 모으시고 건져 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조금 힘들다고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 끝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승리로 마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승리하리 우리 승리하리 우리 승리하리라 주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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