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LNCK 2012. 9. 17. 21:55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사49:1~26         10.12.26.설교스크랩, 출처 

 

사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장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포로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영적으로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주1)

 

14절,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나를 잊으셨다”   :14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일이 잘 안 풀리고 너무 힘들 때마다 생각되는 것이

“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혹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너무 무관심하시다. 나를 버리셨다.

그래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그렇게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깊고 차원이 높습니다.

 

1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하나님은 결코 나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나를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아시고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도 가정에서 보면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사랑이 약간 다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선이 굵고 은은하면서도 무게가 있죠?

반면에 어머니의 사랑은 섬세하고 따뜻하고 자상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견책하며 훈련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어머니의 사랑은 약점을 감당해주며 보살펴주는 사랑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저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사랑을 묵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여기서 ‘나’는 궁극적으로 메시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사야 선지자등 메시야적 사명을 감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가리킵니다.

 

우리 목자들도 생명구원역사를 섬기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부르시되 그 입을 날카로운 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왜 하필 날카로운 칼입니까?

죄로 가득한 인간내면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기 위해서는 날카로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내면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gentle하고 nice합니다.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kind하고 sweet합니다.

그래서 아주 믿음이 좋고 훌륭한 사람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 깊이 들어 가 보면 온갖 세상욕심과 인본주의, 연애감정의 누룩들이

누렇게 떠 있습니다.

 

저도 겉보기에는 건강한 것 같지만

이번에 옆구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X-ray를 찍어보니

신장에 작은 돌이 9개나 박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돌 하나가 요로에 내려와 있어서 그렇게 아팠던 것이었습니다.

물을 많이 마시고 운동을 해서 빼야 하는데

만약에 안 되면 예리한 칼로 째서 빼내야 하겠죠.

 

외과의사인 곽목자님에 의하면, 외과의사들은 수술할 때

매스를 한번 쓰고 버린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칼이 조금이라도 무뎌지면 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들은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영적의사들입니다.

우리가 1:1 말씀을 공부하고, 파트메시지, 수양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말씀의 메쓰로 사람의 병든 부분을 수술해서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자가 바로 일대일 성경선생입니다.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직분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양들을 도울 때에, 적당히 강의안만 읽어주면 안됩니다.

먼저 간절히 기도하고 나부터 말씀 앞에 회개하고 심령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내 안에서 세력을 얻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양들의 심령골수에 새길 수 있습니다.

 

어떤 양은 목자님과 말씀공부를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답답한 속이 펑 뚫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목자가 그 만큼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말씀의 칼을 갈고 닦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깊은 맛을 보고 생수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또 양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가장 적절한 말씀으로

가장 정확한 카운슬링으로 양들을 돕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목자는 양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잠자는 영성을 흔들어 깨우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 목자의 영성이 녹슬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딘 부엌칼처럼 자신의 내면을 전혀 갈지 않았기 때문에

양들의 문제를 뻔히 보고도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목자로서 큰 직무유기입니다.

 

우리가 2011년 새해에는,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말씀의 칼을 갈고 닦아서

어떤 죄도 분별하고 어떤 양들도 치료하고 살려내는, 영적 명의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마귀 사단의 심장도 관통할 수 있는 마광한 화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칼은 가까운 적을 상대해서 싸우는 무기이고

화살은 멀리 있는 적들과 싸우는 무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근거리에 있는 적도 있고, 원거리에 있는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본국에 있는 사단의 요소와도 싸워야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지에 대적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 시대는 글로벌 시대이기 때문에 본국 뿐 아니라

선교지에도 도움이 필요하면 즉시 날라 가서 도울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학실력도 갈고 닦아야 합니다. 빼어난 성경선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자고 났더니 빌리 그래함 같은 말씀의 종이 되었더라.

어느 날 자고 났더니 입에서 술술 영어 중국어가 나오더라.. 그런 법 없습니다.

매일매일 꾸준히 일용할 양식을 하고, 소감을 깊이있게 쓰고,

성경을 읽고, 어학공부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명검, 보검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좋은 칼, 좋은 화살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수없이 뜨거운 풀무불이 들어가서 녹아져야 합니다.

차디찬 물속에 들어가서 담금질을 받아야 합니다.

 

헤머로 수없이 두들겨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탄소와 불순물이 제거되어서

부러지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탄력성이 좋은 칼이 만들어집니다.

 

화살도 수없이 숯돌에 갈고 또 갈아야 끝이 뾰족한,

어떤 갑옷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명품 화살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저는 언젠가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들을 훈련시킨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코치는 강인한 체력을 키우도록, 선수들로 하여금 쇠조끼를 입히고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스케이트를 타도록 했습니다.

 

양궁선수들은 밤에 공동묘지를 뛰어갔다오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력을 키우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쓰실만한 여호와의 종도, 하루아침에 급조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품은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몇 시간 마다 찍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습니다.

그 내면에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 영이 순수하고 거룩한,

영성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데는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빚어지는데 25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성장하는데 40년의 광야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릿 시냇가에 가서 까마귀에게 얻어 먹으며 훈련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훈련 없이 좋은 군인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훈련 없이 좋은 하나님의 종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5:4~5절에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30년동안 밑바닥에서 연단을 받으시고 준비하셨습니다.

목수이신 육신의 아버지 요셉 밑에서 배우셨습니다.

 

성전에 가서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면서 배우셨습니다.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실 때는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하면서

사단과 전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사야도 영적 소경이요 귀머거리같은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부패한 내면을 정결케 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되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무시 받는 훈련, 낮아지는 훈련이 그때 당시는 힘들지 모르지만

그런 훈련을 통해서 그들은 영적인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 갈고 닦은 화살로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입니다.

무조건 감당해주고 봐주지 않고 쓸만한 사람이 되도록 연단하는 사랑,

훈련하는 사랑은 얼마나 수준이 높고 깊이가 있습니까?

 

그러나 훈련을 받는 당시는 그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 훈련과 연단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훈련의 결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을 때,

나의 수고와 헌신이 당장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푸념을 늘어놓게 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이사야는 60년 동안이나 사역하였고 3년 동안은 벗은 몸, 벗은 발로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사20:3)

그런데도 백성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은 쇠의 힘줄처럼 질기고 이마는 놋처럼 단단했습니다. (사48:4)

 

예수님도 3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지만,

사람들은 단물만 빨아먹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온 정성을 다 쏟아서 키운 제자들마저

다 제 갈 길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우리도 몇 년 동안 온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쏟아 부어서 키운 양들이

도망가 버릴 때에 허탈한 마음이 듭니다. 손해의식이 듭니다.

 

1, 2년 도운 양이 아니라 7년, 8년, 10년 도운 양이 떠나가 버릴 때는

한쪽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차라리 그 시간에 속 차리고 자격증이라도 더 따 둘걸”

“재테크를 해서 돈이라도 더 벌어 놓을 걸”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런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였습니까?

4~5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참으로 나의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하나님께 있느니라.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이시오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이사야는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큰 위로와 힘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의 판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이사야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의 수고와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2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쓴 이사야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설교하시면서 이사야서를 가장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제가 국회도서관에 조회해 보니까

우리나라에서만 이사야서로 쓴 논문이 3000편이 넘었습니다.

그가 그처럼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뇌하고 고통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의 글이 깊이가 있습니다. 심오한 하늘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섬기기 위해서 헌신한 수고,

양무리들을 돕기 위해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 이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때가 되면 주님께서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를 통해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일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것이 매우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장차 여호와의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는데

어디 말씀을 읽습니까? 이사야서 53:장을 읽습니다.

빌립이 그 이사야서 말씀이 예수님을 의미한 것을 가르쳐 주자 회개하고

그가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이디오피아는 아프리카 나라중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방의 빛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 한 사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양 한 사람 제자로 키우기 위해서 아등바등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우리를 들어 이방의 빛으로까지 삼기 원하십니다.

 

우리 민족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50~6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최고 빈민국 중에 하나였습니다.

지난주일 성탄극 앞에 나온 영상을 보니까, 6.25때에 우리나라는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연극 첫 장면에 나온 것처럼 미군들 쫓아다니면서 ‘Give me a chocolate’ 하던 나라였습니다.

미신이 들끓고 우상숭배와 노름과 질병이 창궐하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수 십 년 만에 이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한 일이요,

전 세계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사들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게 하셨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한국에 와서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들이 많고 선교에 대한 열정이 많은 나라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UBF 모임도 보면 50년 전에 시작할 때는, 작은 셋방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95개국에 1700여명의 선교사들을 이방의 빛으로 파송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 UBF 모임을,

우리 각자를 앞으로 더 놀랍게 축복하시고 쓰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의 때에 우리 민족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지난 5천년동안 연단하셨습니다. 우리 각자를 그동안 연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더 크게 쓰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더 큰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준비하고

스스로를 연단하고 마음을 넓혀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사랑입니다.

 

15~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고 있는데 주님은 도대체 뭐하고 계시는가?

우리에게 관심이나 있으신가? 주님은 우리를 잊으셨다. 버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택한 자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잊을 수가 없고 버리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자기 몸에서 낳았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아들이 잘 났건 못 났건,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긍휼히 여깁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리면,  

10년이 넘도록 자식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밥이 제대로 넘어 가겠습니까? 잠을 제대로 잘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가슴은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집을 나간 자식은, 부모를 잊을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손바닥에 새겨놓고 가슴에 묻어놓고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입니다.

 

요즘은 가끔 못된 여인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고아원에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5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자신의 손바닥에서 새겼다고 말씀 하십니다.  :16

 

하나님은 손바닥에 썼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조각칼로 손바닥을 파서 이름을 새겼다는 것입니다.

조각칼로 파서 지워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손바닥이 대못에 찔리시고 파이셨습니다.

우리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기 위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야 했습니다.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별로 잘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깊은 상처만 남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미워하거나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더 깊이 깊이 마음에 새기십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15절 말씀처럼 ‘긍휼;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 보면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식을

아버지는 분명히 징계해야 마땅합니다.

탕진한 재산을 배상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지같은 아들을 품에 안고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난 자식을

집안에 있을 때보다 더 뜨겁게 맞아주고 사랑을 베풀어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긍휼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에 뜨겁게 맞아 주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내가 잘났건 못났건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택하셨기 때문에 결코 잊지 않습니다.

 

2010년 한 해를 돌아 볼 때 우리는 마음에 안 들고 아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은 시험에도 합격하게 하시고, 양도 제자로 세우게 하셨는데 나는 뭔가?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섭섭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너를 잊겠느냐?

다른 사람은 다 너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다 손바닥에 새겨놓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나의 고뇌와 아픔, 슬픔과 절망을 다 기억하시고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계시록 3:5절에 보면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여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다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포로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다 돌아오게 하십니다.

12절에 보면 동서남북에서 돌아오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8절에 보면 그들이 사방에서 모여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오되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신부처럼 장식하고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22절에 보면 깃발을 들고 아들을 품에 안고 딸들을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자식들을 품에 안고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게 됩니다.

 

우리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반드시 아름답게,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많은 환난과 연단을 통해서 날카로운 칼이요 갈고 닦은 화살처럼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요

장차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셔서 땅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세계적인 인물들로 쓰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강하게 연단하시는 아버지 같은 사랑과

손바닥에 새기시고 기도하시는 어머니 같은 사랑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현재 주시는 연단을 기쁨으로 받고 감당합시다.

2011년에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방의 빛으로 쓰임받고자 하는

소망과 비전을 붙듭시다.

그리하면 반드시 우리인생을 영화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 

 

주1)

본 구절이, 이사야 당시 (히스기야 왕 당시) 쓰여진 예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하나님께 고통을 불평하게 될 것을,

이사야가 생전에 예언한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따라 행하라  (0) 2012.10.10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0) 2012.09.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0) 2012.09.08
하나님의 마음.. 탄식, 초청, 경고  (0) 2012.09.05
영적인 비밀  (0) 2012.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