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스스로 계속 일하신다 계21:24, 딤후2:3~4 설교일부녹취
내가 거기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뜻.
(새 예루살렘 성에)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21:24
▶저희 선교 팀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구성되어 있다.
시리아 선교사, 이라크 선교사, 몽골 족, 위구르 족, 타직 족, 카자흐 족,
이렇게 팀을 구성하여 순회하며 선교를 하다가,
저희들이 호텔에서 모임을 가질 때는, 조용히 모임을 갖는다.
나는 그 팀에 포함된 신입생이라서, 고참 선교사로부터 훈계를 들을 때가 있다.
‘넌 네가 가진 것으로, 세계 선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설교를 했겠지만,
이슬람의 지하교회 성도들 몇 명 놓고 선교하는 방식은 다르다. 더 은밀히 해야 한다는 뜻?
너는 이제까지 우리에 든 99마리 양들을 대상으로 사역해 왔겠지만,
하지만 이제 너는, 한 마리 양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는데,
너는 이제까지 네가 해 오던 방식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나는 오늘날에, 이렇게 조용히 좁은 길을 가고 계신 분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런 분들과 함께 사역하고, 교제하고 있음을.. 주님께 감사드린다.
▶여러분, 우리는 많은 경우,
내가 늘 해 오던 방식으로,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선교를 하려고 한다.
한국의 기독교 문화를, 선교지에 똑같이 심으려 한다.
그때는, 여러 가지 충돌과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여러분, 북한이 열려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닫혀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선교’를 생각하면, 북한이 닫혀 있다.
(그러니까 남한처럼 교회 건물을 세우고, 정시에 모이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 등..)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한국 문화적) 기독교를 내려놓고,
복음의 본질을 전하겠다는 생각으로 보면,
북한 선교는.. 문이 열려있다.
이제까지 역사상 단 한 번도, 주님의 복음은,
세상 권세나 체제의 압력에, 굴복당해 본 적이 없다.
인간이 세워놓은 어떠한 국경선에, 하나님의 나라는
단 한 번도 방해받아 본 적이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진행 가운데 있다.
거기에 내가 포함되든지, 안 되든지에 불구하고.. 그 나라는 멈추지 않고,
오늘도 계속 진행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선교’를 내려놓지 못하는 한,
북한은 언제나 닫혀있는 나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북한 체제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선교’에 걸림돌이 되니까,
언제나 기도만 하면, 북한 체제가 속히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제 요지는, 북한 체제가 하루 속히 무너져야 하지만
북한 체제를 유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섭리에 맞춰서, 선교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비정규전(게릴라전) 선교를 하는 것이다. 주1)
저는, 하나님이 저렇게 북한을 오래 존속시키는 이유는,
앞으로 이슬람권 선교에, 북한 성도들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훈련시키는 과정과 기간으로서.. 하나님이 지금 북한을 사용하신다고 본다.
강경 이슬람권 선교는, 통제와 감시 아래 있기 때문에, 은밀히 해야 한다.
그런데 북한 성도들은, 통제와 감시 아래 있기 때문에, 은밀히 신앙 생활하는 훈련을
오래도록 받아왔던 것이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또는 현재 탈북자들 가운데,
이슬람 선교사의 자원들이 무수히 존재한다고 본다.
이슬람권 선교는, 북한의 크리스천이 딱,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섭리를,
내가 이해하고, 거기에 나를 맞춰 나가야지
거꾸로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을, 나에게 맞게 바꾸려 하는 것은.. 어리석다.
‘내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의 경륜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
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가 북한 선교를 한다고 할 때,
교회당을 짓고, 선교센터를 짓고, 거기서 구제사역을 한다고 할 때..
북한은 굳게 닫혀있다. 그리고 북한 체제는 나에게 장애물이 된다.
하지만 그런 내 방식을 내려놓고,
오늘도 ‘북한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흐름 속에 내가 참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을 통치하고 계시오니, 제가 그 통치를 마음껏 누리겠습니다.’
라는 자세를 가지면.. 북한은 언제나 내 앞에 열려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세워놓은 어떠한 체제,
인간이 만들어놓은 어떠한 종교(이슬람),
인간이 만들어놓은 어떠한 국경선이나 정책에.. 묶인 적이 없다.
방해받은 적이 없고, 방해할 수도 없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주님은 자신께서 재림을 스스로 예비하시고 계신다.
이 설교의 주제는 ‘내가 거기에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내가 주인 되려하지 말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
-내(또는 내 교회)가 해야 되는 선교,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사역,
-내 문화 방식의 선교,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자리가 없다.
▶여러분, 이슬람 종교도,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자.
우리는, 이슬람을,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일면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필적할만한 대적은,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께 대적이 될 수 없다. 맞장 뜰 수 없다.
하나님께는, 어떤 대적도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대로, 모든 것을 지금 진행해 나가고 계신다.
이슬람도,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고, 하나님이 허용하신 하나의 종교체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안에서, 지혜롭게 선교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지,
이슬람 자체가 무너뜨려지기를 기다린다면.. 어리석다.
▶중국의 예를 들면, 이해가 한층 쉽다.
약 60년 전에, 중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중국 전체가 공산주의로 뒤덮히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공산주의가 중국을 장악하도록 허락하셨다. 공산화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를
중국의 공산화는, 자기 선교활동에 장애물로 생각했다.
일면 맞다.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성경을 불태우고, 교회당을 폐쇄시켰으니까.
(중국 당국은, 기독교를 외세의 하나로 보고,
모든 외세를 척결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도 함께 배척되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지난역사를 돌이켜보니,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서, 그것도 다 필요했고, 유익한 역사였다.
1)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동북3성에서부터, 서쪽 끝 카슈가르까지
중국 대륙 전체가 북경어(만다린)로 언어통합이 되었다.
이제는 성경도, 북경어 하나로 찍으면 되게 되었다.
이전에는 성경도 50개 이상 부족언어로, 나눠찍어야 했었다.
2)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50여개에 달하는 소수민족들의 인권이나 주권이 다 없어지긴 했지만,
중국 전체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이 되고 나니,
50개 나라에 국경선도 없어지고,
그것이 지금 선교하는 입장에서는, 훨씬 더 유익이 되었다.
(마치 2천년 전에, 세계가 로마로 통일 되어 있어서, 바울이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었던 상황과 같다.)
3) 50여개 소수민족의 부족신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지금 무신론주의가 되었다.
공산주의 정책 중 하나가 ‘미신타파’였기 때문에,
어떤 선교사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공산주의가 해냈다.
(물론 공산주의의 말할 수 없는 폐해가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계속 일하셨던 것이다.
4) 중국의 기독교는, 한 동안 지하로 들어갔다.
공산당의 핍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은, 의외로, 교회가 정화되는 기간이었다.
가라지들이 정리되고, 알곡이 남아서.. 오늘날의 크나큰 중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중국 안에는, 1억4천만의 성도가 있다고 추산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에 보조를 맞추어서, 그 안에서 사역해야지,
중국 공산주의 체제와 맞서서 싸우는.. 그런 방식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중국은 공산주의는 버리고, 사회주의 체제는 유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까지 북한에 공산주의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고,
우리는 그 섭리 안에서, 지혜롭게 선교활동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북한 체제와 맞서는 식의 방식은.. 큰 흐름을 잘못 잡는 것이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교 선교사들은, 오히려 기독교 선교사가 못하는 일들을 대신 해 주고 있다.
이슬람교 선교사들이, 온 세계로 다니면서, 열심히 이슬람교를 전파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주의 재림을, 저들이 대신 준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인도는 힌두권인데, 다신론 문화이다.
인도에서는, 기독교 선교사가 아무리 선교를 열심히 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힌두교의 많은 신들 가운데, 예수도 하나의 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슬람교 선교사들이 인도에 들어가서
사전정지작업(땅고르기)을 해 주고 있다.
-다신론인 인도 문화를, 이슬람의 유일신 문화로 바꿔놓고 있다.
-그 외에도 예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언어를 아랍어로? 통합해 주고 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슬람을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조건 이슬람과 싸우려들지 말고,
그 크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안에서, 지혜롭게 선교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이제까지 나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는 한, 이슬람은 언제나 우리에게 장애물로 보일 것이다.
지금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이슬람교의 포교(선교) 물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선교해 나가야 할지..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우리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슬람교도, 우리의 대적이나 방해물이 아니다.
북한이나, 중국 공산화가 방해물이 아니었듯이.. 그런 면도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이슬람의 활발한 포교가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의 귀환을 그들이 돕고 있다.
온 세계에서, 이슬람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있다.
특히 911이후로, 이슬람과 유대인은 서로 앙숙관계로 완전히 변했다.
그 결과,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속속 귀환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현대판 바로의 군대의 추격’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왕의 군대가 뒤에서 추격해 오지 않았다면,
히브리인들은 어쩌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슬람’이 무섭게 유대인들을 핍박하니까,
(이슬람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온 세계에 퍼져 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9~11장에는,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 예언되어 있다.
유대인들의 귀환은, 예수님의 재림을 재촉하는, 한 가지 신호가 된다.
▶정리하면
단 한 번도, 하나님은, 역사의 운행에 있어서, 어떤 실수를 하신 적이 없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님의 재림을 향하여
거침없이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다.
단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선교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인생,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사역을 못 내려놓고 있으니까,
(내가 사역의 주인이고, 내가 왕이니까)
그것이 내 삶과 진로에 끊임없이 거침돌이 되고 있다. 내가 내 삶에 거침돌인 것이다.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열방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기도는
‘하나님, 내 지경을 무조건 넗혀 주세요!’ 하는 기도이다. *야베스의 기도
저는 그런 기도보다, 이런 복음적 기도를 더 좋아한다.
‘하늘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자에게 유효한 복음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희는 땅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되리라’ 행1:8참조.
열방은 이미 열려있기 때문이다.
선교는 내가 주인된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일례로, 오늘날 많은 지역에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있다.
그러면,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야 한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추방’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선교는 각 지역마다, 특색이 너무 다르므로, 어떤 공식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추방’이 된 경우에는.. 비정규전으로 복음의 본질만 전하라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건물 크게 짓고, 사람 끌어 모으는 식의 선교가 아니라,
정말 일대일 성경공부, 일대일 제자양육을 통해서, 현지인을 전도/양육하고,
건물을 짓고, 사람을 모으는 일은.. 장차 현지인이 하게 하는 것이다.
현지인이 할 경우에는.. 대부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
주1) ▲복음의 게릴라 출처
"너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전쟁에 있어서 적에게 맞서 선전포고를 하고 포를 쏘고 난 다음
보병이 쳐들어가서 점령하는 식의 전투를 정규전이라고 합니다.
그 반면 전후방 구분이 없이 여기저기서 불시에 공격을 하는 것을 비정규전이라고 합니다.
일명 게릴라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월맹군에게 패한 것도, 바로 이 게릴라전 때문입니다.
나는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게릴라식으로 전파된다고 봅니다.
거창하게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모아 잘 준비된 원고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 정규전만으로는, 고도의 사단의 작전에 당할 수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라오디게아교회 시댑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그리스도만 그들의 마음 밖에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듣는데, 그분을 그 마음에 모셔 들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빈방이 없을 만큼 잡다한 교회업무들,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절대 선에 대치할 여러 가지 휴먼스러운 선한 사업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테이 헝그리(stay hungry)해야 할 심령들이
띵띵하게 배가 불렀습니다.
엘리제사장처럼 군인의 장교 복장으로 잘 차려입고 폼생폼사 하고는 있지만
싸움의 실력은 꽝입니다. 도무지 말씀이 없고, 말씀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무엘은 게릴라입니다.
어디 정식으로 전통을 따라 임명을 받질 않습니다. 어쩜 다윗도 게릴라입니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러니 레위지파 제사장도 아니고, 정규 군인이 아닙니다.
초립 목동이, 그것도 존재 가치도 없는 이새의 막내가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심부름을 갔다가
여호와 이름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도, 비정규전입니다.
할례 없는 자가 까부는 것을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물맷돌로 손을 본 것입니다.
게릴라도 그런 게릴라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형식과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전통에 빠져
엘리와 같이, 사울과 같이 소리만 높이고
실제로는 적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복음의 정규군이 아닙니다. 사도로의 부름이 정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복음의 실력과 가진 무기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서신은, 바로 그가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가공스러운 복음의 무기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에게 잡혀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구출하여,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바울 같은 복음의 게릴라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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