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부르심’을 받았다 눅9:10~17 출처보기
▲누가복음의 특이한 배치
본문 눅9:10~17에는 <5병2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연이어서 9:18~21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 저자 누가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 바로 뒤에, 특이하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뜻함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갖다 붙인 의도는 무엇을 말할까요?
특이하다는 것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은 두 사건을 연속해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모두, <5천명을 먹이신 기적>뒤에
<예수님이 풍랑위로 걸어오시는 사건>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이게 실제 발생 순서인 듯합니다. ☞※4복음서 비교표
그런데 유독 누가만,
두 사건을 연속해서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뭔가 누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지요.
▲주제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나온 <5천명>이 바로,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광야에 불러내진 사람’(에클레시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광야에 불러내지지 않고는,
세상 가운데 빠져서는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고, 올바른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 바로 뒤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갖다 붙여 놓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예수님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나옴, 주1)
그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광야로 ‘불러내어진’(‘에클레시아’라는 말의 뜻)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우연히, 어쩌다가 보니, 있을 곳이 없어서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그들을 광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들을 광야로 불러내신 것은,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고, 그들을 '교회'로 부르기 위함이셨습니다.
그 생명의 양식을 제대로 먹으려면.. 일단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무슨 탈속세주의가 아니고요, 세상에서 그대로 살지만,
자기 마음이 세파에 찌들어 있으면.. 결론적으로 ‘에클레시아(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9장은 ‘교회 장’(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성령에 이끌려가는 교회의 역사를,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교회를 염두에 두고서 눅9장을 썼다고 보여 집니다.
누가가 교회를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의 공생애 때 일어난 사건들을
교회의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연결시키며 편집을 했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교회의 태동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교회에 대한 관심이 짙은 사람입니다.
▲부르심의 본질적인 특성
자, 그러면 이러한 누가의 의도 속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부르심은,
무엇으로부터의 부르심일까요?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아이였음을 우리가 염두에 둘 때,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2만 명까지 추산되는 사람들이 빈들에 모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해가 저물어서 이제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먹을 것을 걱정하며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어디서요? 빈들에서.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그들 스스로가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왜 부르심의 내용입니까?
단순히 교회를 출입하는 것으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떠나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떠나야.. 제대로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성도/교회는.. 빈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빈들이라는 것은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현장입니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할 수 없는 곳이 빈들입니다.
먹고 사는 것을 우리가 노력하고 해결할 수 없는 빈들로 우리를 불러내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부르심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정리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제는 먹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생업의 문제로부터.. 떠나와야 된다는 얘깁니다.
먹고 사는 것이 과제가 아닌 상태로.. 부르신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을 내가 애써서 해결해야 되는 지점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생업의 문제를 전혀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하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자기 생업에 충실하되,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마음이, 항상 천국에 1순위를 두고서, 생업에 종사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지요.
▲저주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인들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다 먹고 사는 것을 문제로 삼고, 잘 먹고 잘살자고 얘기하고 있다면,
그건 성경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출애굽을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홍해로 데려가신 이유는,
그게 부르심이에요.
노예로 살면서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살고 있는 모습이 먹고 살기 위해, 이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는 거예요.
창3장에 보면,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의 말을 듣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은,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다,
그리고 네가 수고하여야 겨우 먹고 살게 될 것이고,
흙에서 왔으니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저주를 하나님께서 내리십니다.
즉 우리가 지금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입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들은,
그게 바로 ‘저주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원초적 저주를 극복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그 저주로부터 불러내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저주로부터 불러냈다니까,
‘우리가 부자로 살고, 잘 먹고 사는 일, 이 일을 위해서 오셨으니까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자!’ 이렇게 돼버리면 곤란하다는 얘기에요.
▲불러내진 사람들은,
빈들에서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천국에 집중하는 가운데
먹을 것 걱정 안 하고서,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
이게 바로 ‘부르심’이요,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먹고 사는 것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일에 애써야 되는 그 아담 이후의 저주받은 삶의 모습,
모든 자연인이라고 우리가 이름 붙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
상식적인 삶의 모습,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리는 부르심의 내용은, 몰상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게 부르심인데.
그러한 삶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마음에 ‘내가 어떻게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입어야지?’
그리고 이 몸에서부터 요구되어지는 필요,
심지어는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도,
우리의 몸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직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각자 소명 받은 직업적 일에 종사하지만,
일단은 먹고 사는 이 육체 때문에 생기는 필요에 대해서 반응하며 사는 일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아 그 일로부터 빠져나온 뒤에
영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되는 거라는 얘깁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필요와 요청에 대해서는
주님이 완전히 책임을 지시겠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뿐만 아니라, 몸 때문에 생기는 가정의 일,
친구를 만나는 것, 직장에 나가는 것,
이 세상에서 잘살아보겠다는 비전을 갖는 것,
이 모든 일들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다 빠져나오라는 얘깁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려면, 세상 분주함에서 빠져나와야 된다고 했는데, ☞기도가 되어지려면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살려고 해도,
‘세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흐름은, 또한 신자들에게 환영 받는 설교는,
‘현실 세계에 적합한 기독교 relevant Christianity’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 적합한 기독교.. 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안 되지요.
교회에 나와서도, 자꾸 세상을 쳐다보게 됩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어떻게 입고 살까? 어떻게 더 높아질까?’
이건 부르심을 받는 게 아니에요.
한쪽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부르시는데,
‘일부’ 강단에서 나오는 설교들은
신자들을 세상에 완전히 박히도록 밀어 넣습니다. 빼내고 부르는 게 아니라.
세상에 적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분변하세요.)
‘여러분, 사업 잘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잘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빈들이 아닌 삶의 현장의 이야기를 1차적으로 강조한다면
그분은 바로 진짜 교회를 이끄는 목자가 아닌 것이지요.
교회가 교회다우면.. 그게 처음에는 인기가 없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부흥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적합하게 변모한다면.. 처음에는 인기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쇠락할 것입니다. 지금 쇠락의 징후가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는 말
실제로 내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은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세상을 빠져나와, 빈들로 부르시는 것인데…’
‘나의 힘으로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몸의 필요에 대해서
도저히 노력하고 반응하고 애쓸 수가 없는 빈들로 부르시는 것인데
내 마음이 왜 자꾸 생업의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이냐?’
‘내 마음이 빈들로 가서, 도저히 이 세상의 삶,
몸의 요구에 대해 반응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 집중하자!’
이것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응답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아버지, 빈들로 불러내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셔서,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임했던 저주 속에서, 우리가 빠져나와
주님의 부르심에 바른 응답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주1)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눅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아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에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표현은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평행구절 마태복음에 의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이
되어진 것으로 가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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