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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기 때문에 믿고 따른다

LNCK 2012. 9. 26. 09:59

◈거룩하기 때문에 믿고 따른다         눅5:1~11, 딤전6:8     12.07.29설교녹취

 

 

◑비록 불합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용납한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6:8

 

도대체 이 구절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만일 집안에 가장이, 집안 식구들을 다 불러놓고,

‘내가 돈을 많이 못 벌어와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떨어지지 않고 있으니,

우리 식구들은 다 만족하고 살아라..’ 라고 말한다면,

가족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아빠가 최고다!’ 라는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자매에게 청혼하는 남자가

‘제게 시집오시면, 제가 호강을 시켜드릴 자신은 없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을 터이니, 족한 줄 아시면 됩니다.’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누가 그에게 시집을 오겠는가?

 

만일 기업체 사장이, 임직원을 모아놓고,

‘제가 여러분께 더 나은 대우를 못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여러분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임직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노조가 가만히 있겠는가?

아무도 그 회사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장은 탄핵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런 발언을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 머리로는 좀 의아하지만 '말씀이 맞겠지..' 하고  받아들인다.

 

가장이, 기업체 사장이 이런 말을 했다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용납하고 수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대로 실천한다는 말이냐.. 그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가족계획(피임)에 대하여,

가난한 나라에서, 빈부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생기는 대로 낳다보면, 거지꼴을 면치 못하니까,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그래서 피임을 허용하는 방침이다.

 

또 에이즈와 같은 질병의 예방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들도, 피임의 필요성에 대해 찬성한다.

또한 성적자유(방종)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피임에 찬성한다.

 

그러나 천주교회만이 유일하게 가족계획과 피임을 반대한다.

이것이 천주교회의 공식입장이다.

과연 전 세계의 천주교인들 가운데, 몇%가 이 방침에 따르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교회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가 찬성하고 따르는 것은 아니더라도...

성경말씀이니까.. 교회니까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수긍한다.

 

만일 그게 아니고, 교회가 앞장서서 피임과 가족계획을 장려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교회가 너무 현실 적합적이고, 쉬운 말을 한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합리적인 말만 하려고 한다면.. 교회가 아니다.

 

요즘 교회가, 인간의 현실에 더 다가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가르침이 사람의 현실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물타기(희석시키기, 묽게 하기)를 했다.

 

말씀의 거룩함을 상실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세상의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소위 ‘성공의 비결’ 같은 메시지가 그 예이다.

 

    오래 동안 서점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은

    <자기 계발>과 <성공하는 삶의 비결>을 주제로 다른 책들이었다.

 

    굳이 교회를 오지 않아도,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성공의 비결에 대한 노하우는 사방에서 접할 수 있는데,

    그럼 뭐 하러 교회까지 와서,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물타기를 하면서까지..

 

이게 다 인간의 현실에 다가가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현실에, 기독교가 적합하고 도움을 줘야한다는 일면 선한 동기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세상의 지혜, 교훈>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되어버렸다.

 

◑세상과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본문 말씀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온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다음에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했다. 

 

이것은 우연히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누가가, 이것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하다면,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육지, 땅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약간 거리를 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 (좀 멀리 떨어졌다는 뜻도 포함)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생각, 사람의 말과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의견, 사람의 필요, 사람의 입장,

사람의 감정, 사람의 사상, 사람의 욕구,

세상의 인기, 세상의 유행 등으로부터.. 말씀은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성경이 사람의 생각과 욕구와 그대로 부합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현실적 문제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예수님께서는 직장생활에 대한 말씀(교훈)을 하지 않으셨다.

 

결혼생활에 대한 말씀도,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가정의 경제, 국가 경제, 민주주의, 정치, 문화, 예술에 대해서도..

우리가 평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거의 말씀하지 않으셨다. 희한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위생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셨지만,

가난을 극복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경제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아예 개념조차 갖고 계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여성들을 위하셨지만,

여성의 권익, 여성의 지위향상,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당시 로마 식민지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동족의 고통을 이해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 로마에 대한 저항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다.

관심을 갖지 않으시고,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들과, 예수님이 관심 갖고 말씀하시는 것은 달랐다.

사람들은 땅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나라에 관해 선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예수님께 호기심을 가졌다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면서 떠나가는 사람들이 나왔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나 이 세상에 가난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애통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영생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천국과 영생에 관점을 갖지 않으면,

예수님의 대부분 말씀은 우리와 상관이 없고, 우리와 멀고,

우리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말씀이 된다.

 

하지만 현실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우리가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이 된다.

 

죄인인 인간이 실천하기 쉽다면, 그것은 거룩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게 된다.

 

저도 과거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불평이 많았다.

‘왜 그렇게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

뭐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 원수를 사랑하라..

 

여러분 친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하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하물며 원수를 사랑하라니..

그의 얼굴과 마주치지 않는 것만 해도 큰 다행인데..

 

이성을 보고, 마음에 욕심만 가져도 간음을 한 것이라면,

그러면 평생 남자만 쳐다보고 살라는 것인가?

 

왜 이렇게 실천이 불가능한 말씀을 하셨을까? .. 하고 제가 불만이 많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이해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거리.. 거기에 거룩함(=구별됨)이 있는 것이다.

 

이 거리를 자기 임의로 줄이려는 노력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오류를 낳게 된다.

 

여러분, 우리가 좁힐 수 있는 거리가 있고, 좁혀서는 안 되는 거리가 있는데,

빈부의 격차는 줄여야 한다.

남자와 여자간의 격자도 좁혀야 한다.  

 

그러나 거룩함 과 세속함의 차이.. 이것은 줄여서는 안 되고

성령과 육신사이의 거리.. 이것도 줄여서는 안 된다.

거룩함을 보존해야 한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흙이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사람이 하나님을 거룩한 분이심을 알고,

경외하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녀들에게도 <구별>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세상에 어려운 사람 하나 없고,

세상에 눈치 봐야 될 사람 하나 없고,

오만하고 당당한 것만 가르치려 하면 안 된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 그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겸손을 알고, 인내할 줄 알고, 자신을 부인할 줄 알고, 믿음의 신비함을 알게 된다.

 

요즘은, 자기 자녀를 세상에서 제일 귀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녀만큼은 어느 누구도 어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뜻을 주장할 수 있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기죽이지 않고 키우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어느 누구도 존경할 줄 모르고, 자기 의견을 굽히려고 하지 않고,

참을성이 없는 그런 세대를.. 우리가 키우고 있다.

 

 

◑역설적으로 세상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

 

본문에, 예수님이 일부러 육지에서 거리를 띄게 하시고, 거기서 가르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시장터에서 어울리면서 하는 말씀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고상하고 고결한 말씀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와 상관이 없는, 하늘에 속한 말씀 뿐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예수님이 무리를 가르치시고 난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눅5:4

현실에 적합한 말씀을 주신 것이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말은, 비상식적인 말이었지만) 

예수님은 물고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염려에 대해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제까지는 어렵고, 세상과 거리가 있는 말씀을 하셨을지 모르지만,

그 가르침이 끝난 다음에, 베드로의 고민을 아셨다.

그가 밤새 수고하였으니, 얻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의 현실/형편을 모르신 게 아니었다.

 

베드로의 아픔을 아셨다. 그의 빈궁함과 염려를 아셨다.

그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물고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염려에 대해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모르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역사하실 기회를 얻기 전에,

인내하지 못하고.. 단정해 버리고.. 신앙을 떠나가 버린다.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마음을 꺼버린다. 그것처럼 성급하고 미련한 것이 없다.

그것은 교만한 것이다. 우리에겐 좀 더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반드시 현실 적합한 (비상식, 불합리하면서도) 말씀을 내려주실 것이다.

성경은 대부분 역설적 진리이다. 비상식, 불합리하지만, 순종하면.. 내게 복이 된다. 

 

저는 17세에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한 다음부터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풀렸다.

그 이전에는 꿈꿀 수 없었던 일들이, 제가 예수님께 헌신한 다음에, 쉽게 열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 고난도 있었다.

 

반대로 제가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목적을 갖고 살 때는,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다.

성경 말씀 그대로였다.

 

내가 높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이 낮추시고,

내가 낮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셨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면 산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거룩한 말씀,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그럼에도 진리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존중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따라야 한다.

그러노라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신비한 말씀으로, 우리가 인정하게 된다.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유익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에 장족의 발전을 가져다 준다.

이런 과정(불합리한 것에 순종, 그러면서 은총과 축복을 받음)을 되풀이함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에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순종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에게 유익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맛보아 아는 것이다.

 

▲정리하면

1. 하나님의 말씀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국/영생의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현실/세상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현실에 적합하게’ ..

즉, 너무 현실적인 적용을 강조하면 안 된다.

그건 물타기요, 기독교 신앙의 타협이요,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나의 삶에 복이 된다.

내가 ‘천국 말씀에 순종하고자 분투하고, 쓰러지고, 괴로워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신비하게 나에게 은혜, 도움, 축복을 주셔서.. 평안한 삶을 살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또 순종으로 나아간다.

결국은 ‘죽는 것이, 사는 길’이며, 불합리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 비현실적인 천국 말씀이, 나의 현실적 삶에 내게 축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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