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산 자의 하나님

LNCK 2012. 9. 25. 20:37

◈산 자의 하나님         막12:18~27               12.07.08.설교스크랩


막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서론/ 생명이 소중합니다

 

가끔 식당에 가 보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꽃이 꼭 살아 있는 생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조화입니다.

그 꽃이 생화가 아니라 조화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실망하고 맙니다.


그 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고 그럴싸해도, 그 꽃에서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꽃에서 생기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지 않는 꽃, 죽은 꽃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볼 때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여도,

그 내면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감동도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계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겉모습은 그럴싸하고,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믿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 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전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막12:27

 

◑본문 설명/ 생명이 죽어있었던 현실주의자 사두개인들


본문에 보면 말은 잘하고,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오직 ‘현실’이 중요했습니다. 자기가 현실에 성공한 것은, 잘 믿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6:19~20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렇게 내세에 대해서도 설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5:29절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기들의 신학에 도전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개인들은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 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막12:20~23,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 가정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장남이 결혼했는데, 신혼여행갔다 오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는데 회 먹다가 비브리오 패혈증으로 죽고..

일곱째는 등산 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7형제가 다 죽고 여자만 남았는데

나중에 부활하면 누가 여자의 남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 할 때 한 여자를 두고 일곱 형제가 싸우게 되니

차라리 부활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수준이 낮고 유치합니다.

소위 당대를 대표하는 고매한 신학자들이, 겨우 이 정도의 말 밖에 못 합니까?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매사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요?”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지금도 복음과 천국 영생을 부정하고,

부활과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하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불행하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놓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도, 제목을 붙인다면 얼마나 슬프고 운명적입니까?

‘일곱 번 결혼하고, 일곱 번 장례 치룬 여자,’


스토리를 만들어도 왜 꼭 이런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상상을 합니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어둡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1. '산 자의 하나님'을 믿으면.. 생명감 넘치게 삽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생명의 기운을 받은 성도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이지만

인생을 어둡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인생을 희망차게,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브라질 대통령이었던 룰라에 대해서 알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오지에서 8형제중 7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티셔츠 하나만 입고, 닭장차 같은 트럭에 실려 13일 만에 상파울루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7살 때 거리를 떠돌며 땅콩과 오렌지를 파는 거리의 소년이요, 구두닦이였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여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14살 때 선반공으로 취직했습니다.


18살 때 선반기계에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가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 때 그는 직장 없는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다가 간염에 걸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얼마나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입니까?


그러나 그는 운명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습니다.

다시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가 후에 금속노조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계에 투신하여 세 번의 도전 끝에 2002년, 브라질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노동당 당수이기 때문에 빈민층을 대변하다가

브라질 국가경제가 아르헨티나처럼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빈민층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을 돌아보고,

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되,

자녀들이 학교에 많이 결석하면 지원을 보류하는 강경책을 썼습니다.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리더십으로 백성들을 아우르고,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들의 교육열이 높아지고, 빈부격차가 줄자, 경제가 살아나서

그가 퇴임하던 2010년에는 브라질이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는 지지율이 67%였는데, 퇴임할 때는 87%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를 역대 세계 대통령 중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 중에

한 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는 인생의 시련의 때마다 기도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캠퍼스에서 만난 한 형제는 대학 2학년인데, 장래 희망을 물어 보니까,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부도 꽤 잘하는 장학생인데, 제가 신기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가 왜 그런 꿈을 갖게 되었는지..


그는 네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재혼하셨는데

의붓 아버지도 문제가 있어서 금방 이혼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새벽마다 그를 업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를 주님의 종으로 키워 달라고.


그래서 그는 일찍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오직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서 주님께 드리기로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불량 청소년이 되고, 삐뚤어질 수 있는 학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운명이 변하여,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저주와 미움을 불태울 수 있는데, 오히려 자신의 생을 불태워서

예수님 사랑으로 세상을 녹이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똑같이 인생 스토리를 써 가는데도

어떤 사람은 불행한 인생조건도 희망으로 바꾸는데,

사두개인들은 괜한 여자의 일생을, 그다지도 슬프게 비비꽈서 비극으로 만들어 버린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허무하고 염세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니까

그렇게 슬프고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들은, 어차피 세상은 이처럼 비극과 우연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 땅에서 누릴 만큼 누리자, 즐길 만큼 즐기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그것이 그들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이 되어서,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2.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현실을 살지만, 내세신앙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창조신앙, 부활신앙을 갖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내세, 천국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저 관념(생각)에 치우칠 뿐이고,

    실제 현실은, <오직 현실>위주로 사는 사람은.. 현대판 사두개인이 맞습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4~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칩니까? 창조를 가르쳐 주십니다. 구원을 가르쳐 줍니다.

부활과 영생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7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출3: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모든 시대에 항상 현재로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롬4:17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들은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재단하는 것입니다.


27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두개인처럼 죽은 생각을 하고,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결탁되어서, 그 믿음이 살아 있고,

생명력이 충만하고, 절망하지 않고, 두려움을 모르는,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까지도 뛰어넘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크게 오해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두개인들 처럼 반쪽짜리 신앙, 오해하는 신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죠.

이왕 믿으려면 제대로 된 믿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 죽은 자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항상 스피릿이 충만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조같은 믿음의 용사,

그야말로 그는 산 자였습니다.


그가 그처럼 산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에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저는 몇 주 전에 소천하신 박자매님 어머님을 찾아뵈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분은 폐암으로 인해 이제 이 땅에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아셨지만

조금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땅에서 헤어지지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하니

전혀 슬프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너무나 행복하고 기쁘니 찬송을 불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 분은 산 자였습니다. 가족들도 다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입관예배 때도 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박자매님도 관에 뉘인 어머님을 보고

“엄마, 예쁘시네, 나중에 천국에서 보십시다” 하였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저 보다 더 믿음이 좋아서 놀랬습니다.

산 자는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소망으로 충만하여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장차 주님나라에서 받을 상급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더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여름수양회를 앞두고도 죽은 자는 벌써부터 절망하고,

아무런 기대도 없이 시간만 보냅니다.


인생소감을 쓰다가도, 죽은 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은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문제에 빠집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니라!”

 

(나는 지금 살아있다. 너희도 지금 살아있기 원한다.

나는 너희가 살아있어, 너희 산 자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 등등 계속 묵상해 봅시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꾼 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주님의 능력이 2012년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놀랍게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