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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할 말

LNCK 2012. 9. 26. 19:36

◈설교자의 할 말                   고후4:5            12.09.09.설교녹취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 종된 것을 전파함이니라.’  고후4:5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하여, 자기의 경력이 많아지고 또 경험이 많아질수록,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경향이 많아진다. 자기 경험담, 자기 성공담을 잘 늘어놓는다.

예술가도 그렇고, 기업가도 그러한데.. 목회자도 그런 것 같다.


설교자의 경력과 위상이 높아질수록, 설교에 자기 이야기의 비중이 많아진다.

자신의 목회 성공, 자신의 현재 위상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자기의 믿음을 인정한 증거라고 보기 때문에,

자기의 성공 간증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설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일부 설교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과거에는 이렇게 가난하고, 이렇게 무명인이었는데,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지금 이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이만큼 유명해지고,

과거에는 교회가 이렇게 작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성장을 했고,

과거에는 우리 집사람이 싸구려 파마를 했는데, 지금은 얼마짜리 파마를 한다면서..

그렇게 성공한 신앙적 원리가(비결이) 다음과 같다.’는 식으로 설교한다.


어쩌다가 한 번 나누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입만 열면, 종종 자기 업적을 나열하듯이 하는 것을 듣다보면.. 중보기도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는 신자들도 많다. 솔깃해서 듣는다.

왜냐하면 ‘성공’처럼 설득력있는 증거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자기도, 저 메시지를 잘 따라하면,

저 성공한 목회자처럼, 자기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반 직업인이든, 목회자이든,

성공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요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해야지,

<자기 성공담>을 전하는 식으로, 설교를 대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성공담>은.. 결코 서로 비교될 수 없고, 대체할 수도 없다.


본문에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 종된 것을 전파함이니라.’ 라고 말했다. 고후4:5


‘우리를 전파하는 것’을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훌륭함이 여기에 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경력이 가히 어마어마하다.

1940년에 사역을 시작해서, 반세기 이상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므로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할 말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내가 언제 어디가서 집회를 했는데, 사람들이 몇 명이나 모였고,

-그 나라 대통령이 참석했고, 국회의원 몇 명이 나왔고,

-모인 사람들 중에 몇 명이 결신했고, 어떤 기적들이 일어났더라..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다면, 수도 없이 하실 말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그런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어디를 가든지, 복음만을 선포하신다.

(성공한 자신의 스토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신다.


그리고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것을 종용하신다.

그것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의 명성과 인기가.. 그의 메시지를 변화(변질)시키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본보기를 따라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은사운동이 범한 실수가 바로 이것이다.

은사운동을 통하여, 성령이 행하시는 역사를 많이 경험하기는 했는데,

간증메시지가 되어서, 성경말씀을 대체해 버렸다.  


그래서 은사주의 설교자들이, 성경구절을 형식적으로 읽기만 하고,

그리고 자기의 경험담 위주로 설교를 한다.

자기 경험이 복음의 메시지를 대체해 버렸다.


-누가 어떤 병이 나았다느니

-누가 어떤 복을 받았다느니.. 다 좋은 말이지만,

그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들을 때는 재미있는데.. 끝나고 나오면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런 메시지를 듣고, 성공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관점이 아니다.)

심령이 거듭나거나, 변화되어짐을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성령의 경험이든, 축복의 경험이든,

심지어는 (인생의 성공자와 반대로) 고난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자기 얘기는, 가급적 조심해야 한다. 어쩌다가 한 번은 괜찮겠지만..

 

고난.. 고난이 유익하기는 하다. 그러나 고난이 자랑할 만한 벼슬은 아니다.

내가 받은 고난을, 남에게 자랑해서는 안 되고, 자기 훈장으로 여겨도 안 된다.

(이 설교문의 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지, 다른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고난’이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당신의 고난에 대하여 별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거의 유일하게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신 것’뿐이다.


그것도 도마가 그것을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러셨다.

그 외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당신의 그 엄청난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일절 말씀하지 않으시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복음을 전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성공이 좋고, 성공이 최고이며,

잘 믿어서 내가 목회에 성공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면,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할 말이 별로 없어진다. 별로 간증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건을 별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가난했고, 고독했고, 두 번이나 감옥에 갇혔고,

여러 번 죽을 위기를 겪었고, 늘 핍박에 쫓겨 다녀야 했고,

그의 몸에는 육신의 가시가 있었고,

이방인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동족 유대인에게도 핍박을 받았다.


만일 바울이 자기 이야기(성공담)를 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사람들이 그의 간증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지리 고생한 이야기들.. 누가 그걸 듣고 싶어 하겠는가.


실제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

자기가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을 하느냐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렇게 장황하게 하소연식으로 늘어놓지 않았다.


물론 반대로, 그가 삼층천을 갔다 온 경험이라든지,

그런 신비한 체험도.. 슬쩍 언급만 할뿐, 장황하게 자랑하듯이 나열하지 않았다.


제가 과거에 선교사님들의 선교보고를 들을 때마다,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대부분 선교사님들은, 선교지에서 얼마나 많이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날씨도 덥고, 사람들은 안 모이고,

선교비는 부족하고, 자녀교육은 안 되고.. 그런 어렵다는 얘기들을 했다.


제가 그런 간증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에 가졌던 질문은

‘그럼 왜 그 일을 하시느냐? (하지 마시지)’


물론, 그런 고생보다, 사명 감당에서 오는 기쁨과 보람이 더 크기 때문에,

그 힘든 일을 계속한다는 내용인데, 시간이 모자라서 그런지,

‘고생한다’는 내용만 말하다가, 설교를 끝내버리고,

선교사역에서 오는 ‘보람과 감사와 감격’은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을 보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성공이든, 자신의 고생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가 본문에서 보고자 한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주력했다.

본문 5절 말씀대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 종된 것을 전파함이니라!


다시 말하면, 내가 전파하는 것은, 내 메시지가 아니라,

(내가 사도이고, 하나님의 종임을 떠나서, 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전파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설교자의 인격이요, 양심인 것이다.

이것(복음)은 자신의 위상과 경력에.. 비교될 수도 없고, 견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다짐


그런 의미에서 저희 교회 창립 12주년을 맞이해서,

제가 제 자신에게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답하는, 자문자답 형식으로,

제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1. 당신은 스스로를 성공했다고 생각하시는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문자답 형식이다)


숫자나 규모 상으로 봐서는 대형교회에 비교해 볼 때 성공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소정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있어서는..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성공한 사람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성공이 앞으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앞으로 갈 길이 멀고, 최종적인 평가는 예수님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내가 성공했느냐/ 성공하지 못했느냐를 염려하는 것처럼 무익한 일은 없다고 본다.

주님에게 최종적인 평가가 있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가면 된다.


2. 당신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저는 아직 제 목적지가 어디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 본론도 시작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제가 스스로 생각한다.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은데, 아직 속도를 내지 못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4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은, 인내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3. 당신은 하는 일에 대해서, 행복한가?


예. 저는 행복하다. 티를 안 내는 것 같아도,

저는 제 삶과 사역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4. 당신의 목회가, 당신의 신앙을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는가?


제 목회 경험이, 제 목회 실력(기술, 테크닉)을 향상시킨 면은 있다. 설교하는 법,

기도와 찬양을 인도하는 법, 성경말씀에 대한 이해의 폭,

신학적인 소양을 향상시킨 면이 있다. 적어도 저는 목회초년생은 아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신앙은.. 별개 문제이다.

제 개인의 신앙은, 제 목회 경력에 비례하지 않고, 제 개인의 경건생활에 비례한다.


목회 경험과, 개인의 경건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목회 경험이 많다고, 그가 자동적으로 개인적으로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 경건은, 개인의 기도/말씀/순종의 삶, 개인의 성화의 추구를 통해서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봉사를 하면, 신앙이 성장하겠지..

내가 설교를 하면 내 신앙이 자라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우리 개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자기 개인적인 경건의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


목회자에게, 목회의 은사는, 목회를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목회를 할 때,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신다.

목회를 할 때,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성령의 은사도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회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신앙성장을 위한 것은 아니다.


서두에서, 자기가 성공한 개인 간증을 가급적 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목회 경력, 목회 은사와.. 자기 개인경건은.. 어쩌면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비례할 수도 있겠지만!


특히,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다음부터는,

자기 개인경건의 성장이 멈추는 경우가.. 아주 많다.


제가 설교할 때는, 말을 침착하고 의연하게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할 때는, 말을 더듬을 때가 많다.


예배를 인도할 때는,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또 숨겨진 것을 알게도 하시지만,

제 개인의 삶을 살 때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다.


저도 믿음으로 살아야 되고, 인내해야 되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를 써야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로서는 어른일 수 있지만, 개인 인격으로는 아직 청년일수도 있다.


▶5. 당신은 후회하는 것이 없는가?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이후는, 제 삶이 제 삶이 아니었다.

목회자가 된 다음부터는, 제 삶이 전혀 예측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게 자연스런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인도하실수록, 내가 생각하지 않던 방향으로 인생이 흐른다.

만약에 내가 젊었을 때 계획하던 대로, 내 인생이 흘렀더라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틈을 드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면서,

‘내가 이렇게 애썼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요, 무의미한 일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6. 당신은 은퇴할 때까지, 이 목회를 계속할 것인가?


내일일은 우리가 장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축복하신다면, 그렇게 계속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목회 이외에는, 제게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교회가 크거나/작거나를 떠나서,

은퇴할 때까지 목회를 평탄하게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 자체로서 존경할만 하다.


그 자체로서 위대한 것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나를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7. 당신은 어떤 상급을 받고 싶은가?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으려는 사람은, 목회를 하면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으려는 사람은, 목회를 즐기지 못하고,

목회에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목회를 올바로 하지 못할 것이다.


주의 종이 받는 가장 큰 유혹은,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자세이다.

그 유혹 때문에, 곁길로 빠진다.

주님의 복과 보상은, 하늘나라에서 주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인의 장례식에, 어느 정치인이 조문을 하러 왔더라,

어느 기업인이 왔더라.. 이런 것 자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상급을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천국의 소망을 두지 않는 것이다.


명예든, 부귀든, 세상에서 상급을 받아서,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가장 큰 상급은, 하늘에서 주신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의 입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말씀만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상급이 된다.


‘잘 하였도다’가 영어로 Well done! 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스테이크를 먹을 때도, ‘웰던’으로 드셔야 한다.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정말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으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 대단히 의심스럽다.

‘내가 너를 모른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믿음을, 예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고, 일평생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 믿음이다.


우리 인생의 성공이든, 실패이든, 신앙의 공로든, 열매든

그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가끔 어떤 분들이, 저의 목회 비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저도, 제 자신에게 스스로 반문해 본다. ‘내 목회 비전이 뭘까?’

그런데 하나님은,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그런 비전을 주시지 않는다고 본다.


설교자는 설교로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속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줄기차게 (설교) 말씀을 주신다는 뜻은,    *설교를, 위로부터 받아서 하는 경우임. 

우리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길을 알려주시니까!

 

여러분, 광야 40년 행진할 때, 처음부터 모든 경로를 다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니다.

한 지점에 이르면, 그 다음 지점을 일러주신다.

 

항공기가 항로를 따라가지만, 사정에 따라 가는 길을 잠깐 잠깐 이탈하거나 변경한다.

기상 상황 등을 고려해서, 또한 지상 관제탑을 지시에 따라

잠깐 변경하지만, 곧장 다시 제 길로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따라가면, (이건 일관적으로, 줄기차게 따라갈 때 가능하다.) 

그것이 교회의 갈 길이요, 제가 갈 길이요,

여러분의 갈 길이 된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따라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그저 교훈이 아니라, 거기엔 교회가 나아가야할 '하나님의 길'이 담겨 있다.

내가 어떤 비전(꿈)을 딱 정해서,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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