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13/16 잭 푸닌

LNCK 2012. 12. 1. 11:42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exported - YouTube

(영한) 새언약은 옛언약보다 월등하다 / 잭푸닌 13 of 16 - YouTube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벧후1:4, 요8:32          영어 

 

※‘새언약’이라고 하니까, 거창하게 들리는데, 신약의 ‘복음’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복음’으로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Zac Poonen 목사님 설교, 13 of 16 

 

 

금년(2009년)은 제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해입니다. 제가 금년에 70살이 되었는데,

제가 거듭나서 크리스천이 된지는 50년이 되었고,

제가 주의 종이 된지 43년이 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50년의 제 신앙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제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들,

제게 특별히 은혜가 된 구절들을 16가지로 정리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은 그 중 13번째로,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비해서 더 월등하다> 입니다.

The New Covenant is far superior than the old covenant.

 

제가 20살에 예수 믿고 거듭났는데, 누군가 이 얘기를 그 때 제게 가르쳐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저는 거듭났지만, 한 동안(16년 동안) 여전히 옛언약에 묶여서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인도는 18세기부터 194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62년 전에, 우리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얻었는데,

오늘날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다시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분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크리스천들도, 옛언약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폐기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히8:6

 

마귀는, 불신자들에게는, 죄의 용서받음을 통한 구원의 도리를 숨기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오늘날에도, 세상의 많은 불신자들이, 구원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새언약의 은총과 축복들을 교묘하게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세상의 많은 신자들이, 옛언약 가운데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새언약의 놀라운 은총을 깨달은 것은,

제가 거듭난지 16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예수를 믿은지, 무려 15년 동안이나, 옛언약 가운데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두에, 이런 원리들을 좀 더 빨리 배웠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었지만,

제 마음속으로는, 그 분이 정말 저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아버지로 믿지는 못하고,

삶의 불안과 초조가운데, 그저 지식적인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만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저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저를, 제 분노로부터, 내 정욕으로부터, 나의 쓴뿌리bitterness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가운데로 들어간 후에야,

저는 그 은총들을 차츰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새언약이라고 하니까, 신유나 물질적 번영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유의 은총이나, 번영의 은총은 구약시대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시103편에서 보듯이, 우리 죄가 사해질 때, 질병도 함께 사해지며,

    다윗도 그런 신유의 은총, 물질적 번영의 은총을 구약시대부터 누리고 있었습니다.

 

새언약이 무엇인지, 이 짧은 시간에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적 내용을 말씀드리면,

구약(옛언약)은 외적 행위에 관계된 것이었다면,

신약(새언약)은 내적 마음/동기/내면에 관계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7:38

 

‘그 배에서’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내면, 마음, 심령을 가리킵니다.

 

즉, 신약(새언약)은, 그 마음 내면이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생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우물 가 여인에게 주신 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수’입니다. 요4:14

 

구약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올발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행위로는 계명을 지키는 척하면서도, 제사를 형식적으로 드리기는 하면서도,

그 내면은 언제나 목마르고, 만족이 없는 답답한 상태로 살 수 있었습니다.

외식적으로, 즉 겉은 곱게 포장하면서도, 속은 썩어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언약은, 내면을 다룹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네 행위에 관계없이, 네 본질인 내면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면이 변화된 자에게는, 거기서 계속적인 생명의 역사가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구약에서 성령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어쩌다가 간혹 한 번씩’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새언약)에서 성령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영속적으로 계속’ 나타납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perpetual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일 동안은, 불평하고, 비난하고, 수군거리며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크게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안식일만 거룩하게 외적으로 잘 지키면, 모든 게 다 OK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일날에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주일만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평일에, 내 직장이나, 내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저 내 육신이 원하는 대로,

그러나 남들 보기에 외적으로 크게 욕먹지 않을 정도로, 그렇지만 남들을 비난하고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게 안식일(주일)만 외적으로 거룩히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Be joyful always

 

내속에서 생수도 계속해서 솟아나고,

주일날 교회에서만 예배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내 평소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외적 행위로, 위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동기로,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며,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자기 내면이 변화된 사람은, 차츰차츰 계명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해집니다.

 

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어기며 사는 것이, 오히려 자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혹시 어기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새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자원해서 지킵니다.

 

주님과 인격적 관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생각해서, 또한 그 삶이 더 편해서 입니다.

 

오늘날 당신이, 남이 쳐다보는 눈에 신경을 쓰면서,

외적으로, 행위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에 힘씁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들고, 멍에와 같고, 족쇄처럼 여겨지십니까?

-그것은 옛언약 아래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8:32

이 새언약(쉽게 말하면 신약의 복음)의 진리를 알기 깨닫기 전에는,

결코 우리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자유하다고 느끼십니까?

만약 아직 그 자유함을 느끼지 못하신다면, 긴가 민가 하는 분은 아직 아닙니다.

그냥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지, 성령의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당시에, 제가 계속 패배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매우 낙심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멀쩡했습니다.

그러나 내 내면, 내 생각은 여전히 더러웠고, 또한 실패를 계속 했습니다.

 

즉, 율법과 계명을 외적으로 지키려고 했는데,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좌절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언약(즉 복음)은, 내 내면을 바꾼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열망해야, 목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말씀드리는 것을 듣고, ‘아, 내가 옛언약 아래서 신앙생활하고 있구나.

아직 복음의 새언약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구나’ 하는 분들은,

자기가 목말라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성경을 읽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새언약(복음)의 은총을 우리 각자에게 주시겠지만,

우리 편에서 간절히 얻기를 열망하는 자세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렘29:·13참조.

 

제가 보기에,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열망하며 찾지 않습니다.

그냥 옛언약 가운데서,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즉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게 정상인 줄로 여기고, 그런 신자들이 주위에 많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시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다가 그저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그건 시간낭비 입니다.

복음(새언약)은,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생활을 시작하는/누리는 것입니다.

영생은, 천국가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땅에서 새언약 아래 들어오자마자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복음의 새언약 아래로 들어오지 못하고,

구약의 옛언약 가운데서 습관적 종교생활을 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영생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계시며,

(우리 각자가 내 상태를 압니다)

 

그것이 위험한 것은,

이런 신자는, 죽어서도 천국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영생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현실에서 영생/천국/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못 누리며 살다가,

죽는 순간, 천국에서부터 누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맛보기로 영생을 누리는 것과, 천국에서 진짜로 누리는 것은 다르지만요)

 

모세는, 구약에서 옛언약의 중보자였습니다.

노예로, 세상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아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대로 방종하며 (결국은 지옥같은 삶을 사는) 이방인들과 달리

10계명을 통해서, 좀 더 차원 높은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언약’이었습니다. 외적인 행동의 깨끗함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이 옛언약보다 월등한 것은,

마치 예수님이 모세보다 월등하신 것과 같습니다.

 

옛언약에서 뛰어난 인물을 들면,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언약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새언약의 월등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1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많이

구약적/율법적/외형적/옛언약적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그들의 눈을 가리웠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신약의 복음, 즉 새언약은, 눈을 떠서 봐야 하는데,

즉 그것은 영안입니다. 성령이 내 영적인 안목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다만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갈망/간절한 기도/구도의 자세입니다.

 

돼지의 예를 들어봅니다.

돼지를 쇠사슬 10개로 묶어두었습니다.  (*10계명을 의미?)

그래서 돼지가 더러운 곳에 가서 자기 몸을 부비려고 하면,

주인이 쇠사슬을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돼지가 자기 몸이 조여서 아프면서, 제어되겠지요.

 

그래서 옛언약 아래 사는 신자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채찍)’, ‘순종에 대한 약속(당근)’

이렇게 채찍과 당근의 원리 가운데, 신앙생활 합니다.

주님과 아무런 인격적/사랑의/친밀함의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오늘날에도,

내가 잘 믿으면, 헌금하면, 봉사하면

직장에서 승진도 되고, 몇 배로 축복 받고.. 이런 것들은 옛언약적 신앙생활입니다.

 

물론 인간의 본능이, 옛언약적입니다만,

새언약의 복음 아래로 들어온 신자는, 그런 give and take의 거래 관계가 아니라,

(만약 그것이 있어도 부차적인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인격적 친밀함 가운데서, 주의 계명을 지킵니다.

근본 동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변화되었거든요.

 

여러분, 새언약 가운데 들어온 신자는, 고양이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는, 아무리 더러운 동네에 내버려두어도, 더러운 곳에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혀로 자기 몸을 핥습니다. 자기 더러움을 닦아내는 것이지요.

항상 스스로 닦습니다. 그게 고양이의 본성입니다.

새언약/복음을 통해, 본성이 변화된 신자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벧후1:4절에, 놀랍고, 위대한 약속이 이렇게 나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새언약에 들어온 자는, 결국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똑같이 될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성공하고 부자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봐야 잠깐이요, 50년입니다.

그러나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영생을 얻는 것은.. 영원한 은총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뭐하러 우리를 구원하시는가요? 그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구약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1:4)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게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약은, 내가 억지로, 용을 쓰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도 않습니다. 본성이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언약, 신약은, 복음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의 내면,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지만,

사랑으로, 인격적 관계로, 친밀함으로, 다시 말해서 자발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게 기쁩니다. 자기 속에서 생명수가 계속 올라오니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는데, 그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축복입니다.

 

부디 여러분이 아직, 옛언약에 머물러서, 율법적인 신앙생활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이 열망하시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새언약,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해 달라고! 그냥 계속 그렇게 10년 이상 다니시면 안 됩니다.

                                                                ☞새언약 관련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