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성화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 잭 푸닌 5 of 16

LNCK 2012. 12. 9. 22:30

www.youtube.com/watch?v=f7qinwXbtFY

www.youtube.com/watch?v=X2114zekf-A

◈성화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히4:15~16, 12:1~2           영어

       Holiness comes by looking unto Jesus

 

Zac Poonen 5 of 16           ※◑2. 단락은, 처음 배우는 개념입니다. 대단히 훌륭합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어느 한쪽에서만 강조된 명령이 아닙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이, 하나님의 요구인 것을, 부인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거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는 자기들의 삶이 거룩하지 못한 것을,

즉, 하나님이 명령하신 수준만큼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늘 부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신자가 어떻게 거룩해지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신자들이 가지는 갈등과 딜레마를

성경적 원리를 통해서 한 번 풀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자신이 거룩하게 살아보고자 스스로 몸부림치고,

사력을 다해 노력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또 실패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좌절에 빠집니다.

 

제가 보기에, 많은 신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의 의지로 율법을 지켜서, 거룩해지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또한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저도,

한 때는 그런 식으로 거룩해지고자, 성화되고자 무지하게 노력했었고,

수년을 애써 보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거듭난 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즉, 새언약을 깨닫기 전까지)

제 스스로 무지하게 이 문제를 놓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에 ‘거룩, 성화’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 책은,

모조리 다 구해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대부분,

뭔가 명확하게 제게 ‘죄악을 버리는, 성화의 길’을 확실히 가르쳐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제 삶은, 마치 ‘회전목마’를 타는 것 같았습니다.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듯이, 회개하고 또 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는 삶을

계속 반복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어떻게 거룩해 지는 것입니까?

신자는 어떻게 성화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1.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내가 거룩해 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습니까?

모든 종교에서는, 무슨 행위를 하라, 물질을 바쳐라..

무슨 희생을 바쳐라, 자기 몸을 상하게 하라.. 그러면 네 죄가 용서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을 행위로 얻는다’는 이런 개념은, 모든 거짓 종교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은 행위로가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일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얻는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손에 가져갈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내 빈손으로 나아가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이루신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신 것은, 내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것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으신 것은, 죄인인 나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은,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한 번 바라보고 끝내지 마시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 내내.. 계속 그 십자가의 예수,

나를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내 죄값을 대신 치르신 그 예수를,

우리가 계속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구원의 길뿐만 아니라, 내 성화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구약의 방식과 신약의 새언약의 방식이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장1~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의 신앙 방식을

구약과 대비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run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면서 계속해서, 예수를 바라보며, 이 믿음의 경주를

자기 남은 생애동안 계속 달려 나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신앙생활이란,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일평생 계속 달려가는 길인데, 어떤 사람도, 어떤 다른 것도 쳐다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앞서 달려가신 예수만 바라보고,

그 분이 달려가신 발자국, 그 분이 앞서가신 그 뒷모습만 바라보고

계속 달리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요, <성화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앞서 달리신 자 forerunner’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뛰어가신 분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그 분을 뒤따라서, 그 분이 가신 길로, 뛰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히6:20, 그리로 앞서 (달려)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where Jesus has entered as a forerunner for us, having become      a high priest forever according to the order of Melchizedek.  NASB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앞서 달리신 자,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거의 희박합니다. 여러분도 거의 못 들어 보셨지요?

 

구원자, 선한 목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문이신 예수, 주님이신 예수 등

예수님에 대한 이런 여러 가지 개념을 갖고 있지만,

‘앞서 달려가신 자 forerunner 예수’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가, 개념이 아주 희박합니다.

 

앞서 달려가셨다는 것은, <우리가 달려갈 길의 본을 보이셨다.

또는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먼저 앞서 가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가보지 않으신 길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전혀 가보지도 않으시고, 신자들보고만 그 길로 가라고 내모시지도 않으십니다.

앞서서 달리시며, 본을 보여주시며 내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이런 저런 죄를 짓지 말라. 그러면 너희가 성도가 되리라..’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너희는 성도가 되었으니.. 이런 저런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도가 된 후에는, 변화된 심령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완벽주의 perfectionism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씀은, 세상과 구별되라, 다르게 살아라는 말씀이고,

‘하나님처럼 되라’는 말씀은, ‘성숙한/ 장성한 신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주2)

 

그리고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지,

아래 설교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녹색은 편집자 註)  주3)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대신에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모든 부끄러움과 경멸을 참으시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히12장2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치욕, 그 고통, 그 대속(대신 값을 치름), 그 사랑은

우리가 그저 예수 믿을 때만 한 번 바라보고, 그 후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3분, 5분, 10분 계속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앞서 달려가신 분’으로서의 고난의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고 묵상할 때,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혹시 내게도 십자가의 고난이 도전해 올 때, 나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참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풍성함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으로 내 내면이 충만하다 보면..

죄악이 내 삶속으로 들어오는 틈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4)

 

딤전3장16절에 보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씀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여기서 ‘비밀’이란 말은, 비결 secret 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경건케 되는 비결이 뭐라고, 위 본문에 설명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끔찍한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 사실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가 죄를 함부로 또 지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달려가시면서,

우리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히4장15

 

우리가 예수님처럼 비록 완벽해지지는 않겠지만,

우리도 유혹을 받을 때마다 넘어지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유혹을 받아도, 죄를 짓지 않는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수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12장2절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영광의)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주5)

 

 

◑2. 은혜 아래 머물 때, 거룩해 집니다.

 

저는 오래 동안, 긍휼 mercy와 은혜 grace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아래 구절에서, 긍휼과 은혜가 같이 나오고 있는데요..

 

히4장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두 개념이 비슷한 것 같지만, 물론 다릅니다.

긍휼이 구약적 개념이라면, 은혜는 신약적 개념입니다.

 

긍휼은..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죄를 극복overcome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롬6장14절에, 네가 은혜 아래 있을 때,

죄가 너희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약에서 성도는,

under mercy가 아니라, under grace에 있습니다.

 

히4:16과, 롬6:14 두 구절을 연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긍휼(즉, 죄의 용서함)만 받는 것이 아니라,

히4장16에, 은혜까지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긍휼 mercy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는 개념보다는,

보다 더 적극적인 개념이죠?

죄의 용서받음 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죄를 극복한다,

죄가 우리를 아예 지배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의 수난,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깊이 묵상할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지배’ 하에 놓이는 것입니다.

 

히4:16에 은혜를 말하면서, 특별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때’가 무슨 때를 말합니까?

앞선 15절과 연관해서 볼 때, 그것은 ‘죄의 유혹을 받을 때’입니다.

즉,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시험과 유혹을 받아서 넘어지려 할 때,

십자가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에 어떤 힘이 있다고요? 예, ‘유혹과 죄를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심지어는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실 때, 그것을 극복하는데 은혜가 필요하셨습니다.

저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그 분이 세상에 사실 때에는, 하나님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으로서 신성으로 사시기를 일관하셨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 삶에 모델이 되실 수 없습니다.

 

눅2장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제가 예수 믿고 나서, 패배를 거듭한 후에, 깨달은 진리입니다.

제가 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승리하는 신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장40

The grace of God was upon Jesus!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 위에 부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롬6장14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죄가 그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그가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죄가, 예수님을, 다스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내 위에 머무르게 될 때..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묵묵히 가실 수 있으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히2장9에 이렇게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2:9

 

이 구절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실 수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눅2장40과, 히2장9절을 함께 보십시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죽으실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으시되, 죄를 짓지 않으셨고, 히4:15

더욱이 자기의 그 어려운 사명을, 즉,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 똑같은 은혜를, 오늘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은혜’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그저 ‘나의 공로 없이, 그저 얻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창조된 것도.. 우리 공로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도 ‘은혜’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은혜’라는 말에는 ‘우리의 공로 없이 그저 얻는 것’이란 뜻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죄를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요, 그래서 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세계는, ‘은혜’의 일부분만 이해하고

핵심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의 주제가 ‘성도가 어떻게 거룩해지는가?’입니다.

성도는, 자기 결심으로, 어떤 율법을 억지로 지켜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 때, 거룩해 지는데,

그 은혜 아래에 머물려면,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힘써 나아가는 것입니다.

 

롬8장2절을 봅시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원래 ‘죄와 사망의 법’의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실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가 죄의 매력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죄의 매력에 끌리지 않는데, 거기에 끌려가서 죄를 지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죄의 유혹을, 다시 말해 죄의 매력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 ‘생명과 성령의 법’의 힘이, 더 강할 때입니다.

 

(지금 저는, 위에서 말한 ‘은혜’의 개념을,

그것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생명과 성령’의 개념으로 설명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 예수님이 새 언약 아래서 주시는 성령의 매력이

죄의 매력보다 더 강력할 때,

우리는 죄의 매력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동물이 아니라, 존귀하고 고귀한 인간(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동물에게는 없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는 방종하라고 주신 게 아니라, 존귀한 자에게 주시는 고귀한 특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자유의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의 도움으로써,

은혜의 지배 아래서, 하나님을 자원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위 2가지 원리로, 제가 실제로 한 번 살아보았습니다.

이 원리가 실제로 ‘성화에 이르는 원리’임을, 제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믿지 못하시겠거든, 제가 숙제를 드릴 터이니, 한 번 해 보십시오.

 

여러분 각자도, 자기 아킬레스 건이 있으실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가 연약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압니다.

정욕이든지, 분노든지, 원수를 용서하지 못함이든지,

 

여러분이 그런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이를 악 물고 ‘그것을 참고 견뎌야지, 내가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면, 결국 실패합니다.

 

그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가 은혜 아래 머물게 하옵소서. 제가 지금 넘어지려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제가 지금 나아가게 하옵소서.’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 하다가, 파도를 보고서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때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여, 주님이 그를 팔로 잡아주시자,

그는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때 당신은 놀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지?’

그것은 당신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또는 생명과 성령의 힘이.. 당신을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작은 승리가, 계속 반복 되면, 그것이 삶의 습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그 죄가, 크게 유혹이 되지 않는 수준까지, 여러분은 성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 문제로 크게 갈등하지 않는 단계까지 성화의 수준이 올라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라이프(삶)입니다.

 

 

..............................................................

 

주2) '완전하라'의 의미 (강추)

 

주3) ☞날마다 십자가를 보라 (강추)

 

주4)

우리가 잘 쓰는 예화로, 지하에 매설된 수도관이 단수가 되면,

그 속에 수압이 없어질 때는, 땅속의 지하수가 그 관의 부식된 틈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래서 단수 후에, 수돗물이 다시 공급되면, 흙탕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그 수도관 속에 수돗물이 잘 공급될 때는,

그 수돗물의 압력에 의하여, 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해져 있으면,

그 압력으로, 죄를 지을 유혹이 틈타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 때,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그것도 압력입니다.

 

어쨌거나 죄에 맞서거나, 죄를 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것은 구약 율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하고,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께 감동되고,

예수님이 주시는 신비한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다보면..

‘부수효과’가 얻어지는데.. 그것은 죄가 들어올 틈을 안 주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우심과, 그 수난의 신비와, 그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묵상하는데..

 

그러다보면,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쳐다보면 닮게 되어 있잖아요)

덩달아 죄악이 틈을 탈 여유까지 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론이요, 원리입니다.

여러분이 각자 실천해서, 이 이론과 원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보다 완벽하게 잘 가르쳐 보십시오. (편집자 註)

 

주5) Beholding Glory and Becoming Wh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