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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함으로 대해야 / 잭 푸닌

LNCK 2012. 12. 10. 15:58

https://www.youtube.com/watch?v=b1y-pztQ-Tw&t=17s 

https://www.youtube.com/watch?v=HGk96ck2UWo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약3:8~10, 욥36:5, 벧전3:15          영어 

We must treat every human being with dignity.

Zac Poonen 4 of 16

 

 

◑1. 언어로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혀는 나의 신앙 성숙과 비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나에게 자유를 주셨다면,

하나님이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도, 나처럼,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에게 복음 안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도 사랑하신 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성숙할수록, 다른 사람을 정중하게, 존중하며 대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차별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태도입니다.

 

야고보서3: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절,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신자를 포함해서 특별히 불신자들은, 신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고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할 것입니다.

 

9절에, 우리가 ‘혀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신자’들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 혀로, 그들을 욕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위 야고보서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신자가 아니라, 일반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니,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비록 그들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라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즉, 그들에겐 양심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들에겐 영혼도 있습니다.

제 말은, 사람은, 그 자체로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존귀하게 지음 받은 존재인 사람을, 함부로 욕하고 저주합니다.

예사롭지도 않게, 사람을 무례하게 대하고, 심지어 잔혹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만약 네 혀를 제어하지 못하면, 네 모든 경건은 헛것이라’고요!

 

약3:5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위 구절은, 혀는 ‘작은 불’이라고 비유합니다.

그 작은 불이 산림의 많은 나무를 다 태울 수도 있고,

또 우리 몸 전체도 다 불사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경건한 혀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 삶 전체를 불살라 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게 일평생 신앙을 쌓아왔다 하더라도..

불이 나서, 불살라지면.. 뭐가 남겠습니까?

자나 깨나 ‘불조심’하듯이, 자나 깨나 우리가 ‘혀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전존재가 다 불살라 지지 않으려면요!

 

야고보서1:26절도, 제가 지난 50년 동안 신앙생활 해 오면서,

많이 묵상하고, 제 삶에 늘 적용했던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1:26

 

여러분, 헛것이란 “제로”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제어하지 못하면,

그의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약3장의 말씀과, 특별히 약1:26절의 이 말씀을 늘 암송하면서,

제 혀를 제어하고자, 늘 성령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해 왔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아예 타고날 때부터 선하게 타고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대방을 존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나의 신앙과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시면,

‘혀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뭐가 큰 죄냐?,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것까지 제어하면서 산다면.. 너무 한 것이 아니냐?’

이런 안일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그걸 죄로 여기지 않고, 그걸 큰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는 성경말씀을 전달해 드리는 것입니다.

 

약1:26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경건, 다시 말해 여러분의 신앙 전체가

무효, 제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혀를 제어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할 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갖고서, 얼마나 오래 동안 섬겼다 하더라도

그게 낫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자기 혀를 함부로 사용해서, 결국 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의 파멸의 시초를 가만히 보면, ‘혀’였습니다. 그걸 제어하지 못했을 때,

나중에 그것이 큰 불길을 일으킨 것입니다.

 

◑2.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가족을 존중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아내나 자녀들이, 아버지께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이웃 사람들 대하듯이, 자기 가족들에게 대해 달라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웃집 손님들이 자기 집에 찾아오면,

아버지께서 너무 친절하고 정중하게 그들을 대우하시는데,

 

그들이 돌아가고, 평소에 아버지의 언행을 보면,

자기 아내나 자기 자녀들을 너무나 함부로 대해서,

가족들이, 아버지로부터 큰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집 사람들이나 낯선 사람들을 그렇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신다면,

(그들은 사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은, 더 얼마나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들조차도,

가족들에게 너무 무례하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이 경건하지 못하고, 성숙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기 경건의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말하는 언어생활을 보면, 우리의 경건성의 척도가 됩니다.

아무리 겉으로 신앙인처럼 보여도, 남이 안 보는 자기 집에서,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그의 경건은 가짜인 것입니다.

 

☞관련글/ 건강한 자기 사랑 (가족을 함부로 대하는 이유)

 

◑3. 사람 존중은 경건의 척도입니다.

 

레위기19:32절에, 하나님은 ‘흰 머리 앞에서,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규례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흰머리’는 나이 든 사람, 나보다 연장자를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세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2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언어생활로 나타나며, 또한 사회생활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노인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옛언약입니다.

 

그러면 이 옛언약이, 새언약, 즉 신약에 와서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벧전2:17절입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여기, 새언약에서는, ‘노인을 공경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노인만 존경했다면,

새언약, 신약에서는,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라고 말씀합니다. 벧전2:17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구절은, 구약 레위기 19:32절의 병행구절입니다.

하나는 옛언약이고, 하나는 새언약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교회에 다니시며, 세례를 받으셨고, 스스로 신자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누가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짜 신자입니까?

그것은 ‘누가 사람을 존중, respect 하는지..’ 그것을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존중 respect 합니다.

우리가 서두에, 야고보서 3:9절에서, 살펴보았지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교회 나와서 찬양을 뜨겁게 하고, 기도를 거창하게 하고..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그게 외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요?

약3:9절에서는, 입술로 사람을 저주하지 않고,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벧전2:17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존중 respect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속일 수 없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우리가 가족을 대하는 것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나의 경건성이, 가식 없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함부로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가 아무리 경건한 겉모양새를 갖추었어도,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가 또는 지도자가 아닌 것입니다.

 

욥기36:5절을 같이 보십시다.

제가 이 구절을 한 번 읽은 이후로, 결코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전능 almighty 하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좀 자기가 잘났고, 좀 잘 벌고, 좀 괜찮은 직종에 종사하면,

얼마나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가 쉽습니까, 하대하기가 쉽습니까.

 

여러분, 마귀는, 악의 화신이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경멸합니다. 마구 짓밟습니다.

 

이것을 스펙트럼(긴 띠)로 봅시다.

스펙트럼(즉, 가로로 긴 띠)의 오른쪽 끝에는 ‘모든 사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위치하시고,

스펙트럼의 왼쪽 끝, 극단에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마귀’가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나님 쪽으로 치우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한다면, 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경멸하는 쪽으로 치우쳐 위치한다면, 마귀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우리의 경건은 헛것이요,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으로 판명 나는 것입니다.

 

제가 스펙트럼에 비유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어떤 양면성을 둘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를 의지해서

하나님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그러고, 무조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만 중요시 여기지 마시고,

실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특히 인도 같은, 카스트 제도라는 전통이 내려오는 나라이든지,

다른 나라에도 비슷하게 귀족 계급과 평민, 그리고 하층 노비 계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다 그런 것이 폐지되었다 할지라도, 그게 아직 전통문화로 남아서, 계속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그런 계급 제도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에서 탈피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쪽으로, 경건한 신앙인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중책을 맡아 수고하더라도,

사회에서 아랫사람이나,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면,

(여러분, 아직도 이런 사회 문화적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신자는.. 결코 경건한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 반역적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신앙생활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문화는, 어떤 이유로든지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게

정말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태도를 죄로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돈을 못 버는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날씬한 사람이, 뚱뚱하고 비만한 사람을, 경멸 할 수도 있습니다.

명품으로 자기를 치장한 사람이, 싸구려 옷을 걸친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 동네에 사는 사람이,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을, 도매금으로 무시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우리는 서로 상대를 무시합니다.

어떤 동네나 마을 자체를, 거기 사는 사람들을 통째로 경멸하기도 합니다.

 

마을 단위로 부족사회를 이루어 사는 전통이 있는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나도 흔합니다.

또는 집시 마을, 한센인 마을, 이런 마을 단위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문화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인 우리도 쉽게 그런 흐름을 탈 수 있습니다.

사회의 문화라서, 아무도 그것을 죄요, 악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적 표준에 따라서

경건의 훈련을 계속 해 나가는 가운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불신앙이며, 얼마나 중대한 죄악인가..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둘러보니, 신자들이, 아무런 개념도 없이,

사회의 잘못된 전통 문화적 편견, 사람무시 문화, 이런 것들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경건한 사람의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더라도, 교리적 차이가 조금만 있어도, 서로 무시합니다.

서로 등을 돌립니다.

90%의 교리가 똑같고, 어떤 극단적 분야에 있어서 오직 10%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도,

우리는 쉽게, 서로를 판단하면서, 상대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내 경건의 척도인 것입니다.

 

 

◑4. 영적 교만은 안 됩니다.

 

벧전3: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는, 우리가 말하는 태도, 어떤 질문에 대답하는 태도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gentleness 와 reverence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확대 해석하면, 우리가 설교를 할 때나, 성경을 가르칠 때나, 전도할 때나

언제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너는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니면서도, 그것도 아직 모르느냐?’

  

이렇게 직접 말은 하지 않더라도,

그런 교만한 태도와 거만한 눈을 가질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gentleness 와 reverence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신자를 대하거나, 다른 신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나 내가 같은 죄인이다’ 이런 근본적 태도를 갖고서, 그를 존중해야 합니다.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다’는 식의 태도는, 경건한 크리스천이 가지는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욕을 먹는 것입니다. 거만한 눈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만이며, 위대하신 하나님도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대하시는데,

우리가 ‘나는 의인, 너는 죄인’이란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정말 한참 신앙이 어린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교만입니다.

 

특별히 일대일로 상담할 때,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영적 우위의 자세를 보이는 것은,

정말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차라리 상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똑같은 죄인으로, 원죄를 가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도, 똑같이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라도, 영적 우월성을 가지는 것은, 내 신앙상태가 좋지 못할 때,

즉, 마귀의 미혹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가 직접 그에게 대해 무례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제 삼자에게, 그에 대한 말을 전할 때,

무례하게 그를 비난하고, 비방하고, 욕하고, 경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태도는, 스펙트럼으로 치면, 마귀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비난하지 않더라도,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비난하는 비방을, 내가 원치 않게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 있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비방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도.. 그의 비방에 사실은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길에서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갑니다. 아니,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고 칩시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면, 비아냥거리며, 경멸하며 그를 피해 지나갑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그를 보면서, 즉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저기에 가 가고 있다.

나도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저는, 그런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성숙한 삶의 자세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도 그와 똑같이 불쌍한 죄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히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어떤 심각한 죄인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뉴스에 나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기본적 인간으로서, 그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언어 이전에, 근본 바탕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내성적이라서,

말로 그를 경멸하고 비하하는 말을 내뱉지 않더라도,

자기 마음과 눈빛으로써, 그를 경멸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서두에, 언어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언어의 문제이기 이전에, 근본 마음 바탕의 문제입니다.

 

자기 입술만 억지로 제어하는 것은, 불교식 수행이요, 요가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방식은, 우리 마음의 근본 바탕을 바꾸는 식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근본 바탕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일환으로써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의 언어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의 눈빛, 그의 대하는 태도가 모두.. 경건한 성도의 언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갑자기 말실수로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즉시로 돌아서서 회개할 것입니다. ‘주여, 제가 입술로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 말은, 그게 입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근본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근본 마음이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입술을 통해, 정제된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근본 마음의 경건훈련을 하지 않고, 입술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교나 요가의 방식이지, 기독교 신앙 방식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먼저는 마음으로

다음은 언어로

다음은 태도로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