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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 그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

LNCK 2013. 1. 5. 15:02

 

야곱 - 그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             창30:37~31:3           출처

 

 

◑'하나님의 관점' 중심으로 창세기를 읽어보니..

 

오늘 아침에 창세기 12~30장을 읽을 때,

<하나님의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족장들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심은, 한 마디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하여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특별히 택하여 불러내신 이유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하여 복을 얻는 것>이었고, 창12:3.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에서 시험하신 이유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구원의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22:18.

 

이삭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창26:4~5.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나 그 사명을 맡기시는 것은 아니셨습니다.

구속사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택하시고, 또한 그를 시험하시고,

합당한 사람에게, 그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또한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가나안 여인이 아니라, 밧단아람에 가서 리브가를 얻어온 이유도,

그 구속사의 사명을 감당할, 믿음의 후손을 낳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나’가 아니란 뜻입니다.

모든 게 구속사 Redemptive History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은 후에, 그가 벧엘에서 돌베개로 잠을 자다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내용도, 그 <하나님의 관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28:13~14


야곱이 12아들을 낳은 것도, 그 구속사 때문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12아들들이 애굽에 내려가는 것도, 그 구속사,

즉, 그들 자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애굽에 내려간 것입니다.

 

2013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사 중심으로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구원의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택하시고, 그의 일생을 인도하시고,

그의 생사화복이 주님의 세상구원역사(구속사)를 따라서, 면밀하게 움직이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에게만, 그 구속사가 적용될 것입니다.


오늘 나의 인생과 삶의 여정을,

그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적용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사화복을, 그저 세상의 복과 저주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나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만.. 진정한 기독교인 입니다.

 

내가 크게 잘 나가고 성공하거나..

반대로 내가 크게 잘 안 풀리고 고생하거나.. 그 관점보다 더 중요한 관점이 있으며,

그 관점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야곱 - 그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관심은 성장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이

그 믿음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늘 성장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백성의 삶을 하나님은 그런 목적에 따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도들의 관심은, 성장이기보다는 성공에 있습니다.

그 관심이 믿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나 혹은 주님을 닮은 인격이기보다는

내 삶의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데 더 관심이 가 있습니다.


사실 먹고 사는 문제, 건강, 성공,.이런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나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에 충실하게 살면

알아서 다 공급해주시고, 보장해주실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내 손으로 만들고 붙잡지 않으면

세상에서 뒤처지고 실패한 인생이 될까봐 불안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신 것 보다는, 그런 것들을 얻는 일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요?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나 여러분안의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자라가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으십니까?


믿음이 자라지 않아서 안타깝고, 주님의 그 빛나는 인격을 그대로

쏙 빼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그런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시고 이끌어가고 계신데,

 

그 인도함을 받는 당사자인 우리는, 정작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풍요로운 생활에만 관심이 가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도 어려움이 오는가? 왜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가?,,

왜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는가?..” 하며 갈등합니다.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어떤 문제나 고난을 겪을 때 낙심하거나

이런 회의에 빠지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성장..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그 문제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고난이나 시련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런 문제를 우리가 겪으면서

우리의 믿음과 속사람이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시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 앞에서 “내가 어떻게 성장할까? 어떤 부분이 성장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잘 알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세월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 20년 세월동안 그의 관심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저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생존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복수의 칼을 피해서 도망을 온 처지에 무슨 거창한 꿈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처음 가보는 하란 땅에서 안전하게 무사하게 지내다가 고향땅 가나안으로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 그의 관심이었을 것입니다. (창28:20-21)


그러다가 좀 살만 해지니까 어디에 관심이 쏠렸나요?

연애...결혼...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나니까 관심은? 재산을 불리는 것...

그 다음 그의 관심은? 그 재산을 지키는 것... 등이었습니다. 31:1-2

 

야곱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처럼 그저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았습니다.

큰 욕심도 아니고 그저 안전하고, 먹고 살 걱정 없이,

가정을 잘 이루어 사는 것이 그의 관심이었고, 삶의 목표였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지난 20년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0년세월 동안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었나요?

그 하란땅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그 믿음과 인격이 성장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20년 세월은 징계이자, 야곱의 훈련기간이었었습니다.


야곱은 ‘왜 이렇게 내 인생에 고난이 많은가?

왜 라반 외삼촌은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하고

나를 속이고 고통을 주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고 계시나?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해놓고서는..’ 이런 불만과 원망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뒷바라지를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거는 기대가 뒷바라지에 있는가요, 아니면 훈련에 있는가요?

은근히 뒷바라지 해 주시는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가요?

‘하나님, 내가 하는 일 잘 되게 해 주세요. 제 소원을 이루어주세요.

제가 고난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등등이 아닌가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뒷바라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분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성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죄악의 습성에 깊이 빠져 있고, 자기 영광만 추구하는 모습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성장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성장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먹고 입고 살고,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돈을 많이 벌고..하는 이런 것들은

필요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주시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게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고,

또 그걸 애써서 가졌다고 해서.. 그게 인생의 궁극적 행복도 아닙니다.

잠시 즐겁게 할 뿐이지, 그걸 목표로 삼아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100평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그 기쁨이 100년을 갑니까? 1년도 못갑니다.

처음 입주할 때에는 가슴이 설레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석달도 못 되어서 다른 고민에 빠져서 잠을 못 이룹니다.


처음에는 이 집을 소유했다는 기쁨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조금 살아보면 금방 익숙해지고 또 당연하게 생각이 되어서

다른 감동, 다른 기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불과 며칠, 몇 주간 행복하게 할 것을 위해서

몇 십년을 거기에만 매달려서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게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잡기 위해서 영원한 가치를 얻을 기회를 포기하는 것,

이게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제한된 시간,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할 수 있으면 영원한 가치에 투자하고,

영원한 기쁨과 영속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참된 가치에

여러분의 삶을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가치를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먼저 믿음과 인격에 있어서 성장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장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짜시고,

여러 가지 이벤트와 사건을 통해서, 성장을 훈련해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20년 하란 생활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 이제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훈련을 마쳤으니, 하나님의 일을 하러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할 것 아닙니까?

공부하러 간다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면 이제 마치고 돌아와야지요.

그런데 그 공부하던 미국이 살기 좋다고, 그냥 거기 눌러 앉아 있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야곱이 아마 이 문제만 없었다면 그대로 하란에 눌러 살았을지 모릅니다.

가정도 꾸렸겠다, 자식도 낳았겠다, 생활 기반이 이제 하란에 생겼으니

거기 눌러 살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삼촌 라반이, 야곱을 불편하게 만든 사건이

야곱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자꾸 불편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좀 편안하게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자꾸 움직이고 뛰어다니도록 불편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기도 안하고 잠자고 있으면,

벌떡 일어나서 기도 안하면 안 될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시고,


예배를 건성으로 편안하게 드리고 있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을 집중해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할 상황을 주시고,


사명이고 헌신이고 다 잊어버리고 제 한 몸 즐길 궁리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그 사명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 사람의 삶을 사명으로 몰아가십니다.


서원이란 게 뭐예요?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헌신을 약속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서원은 언제 주로 합니까?


급할 때,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그 때 최후의 수단으로 서원을 하지 않습니까?


죽을 병에 걸렸는데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서원을 하고 살아났다든지,

부도 위기에 몰렸는데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제가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오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해서 하나님이 위기에서 건져 주셨다든지..

이런 간증들을 듣지 않습니까?

 

이런 게 사실은 다 뭡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엉뚱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불편하게 만들어서 원래 하나님이 목적하신 삶대로 살아가도록,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바로 잡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의 섭리인 것입니다.


야곱이 그동안 잘 지내던 라반의 아들들,

즉 외사촌들과 갈등이 생기고 다툼의 위기가 생긴 것은

야곱이 하란에 편안하게 눌러 살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명이 있는 가나안으로 빨리 돌아가게 하려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사명이 뭡니까? 이제 그동안 성장한 인격과 믿음으로

형 에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야곱 같았으면 이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20년 세월동안 자기의 죄도 깨달았고,

인격적 성장과,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했으니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형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와 화해를 해야

야곱이 가나안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언약을 이제 야곱이 계승해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하란에 눌러 앉아버리면, 그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곧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하란에 눌러 앉아버리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중단되게 됩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야곱을 불편하게 만드셔서라도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소홀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불편하게 만드셔서라도

그 구원의 역사에 다시 뛰어들게 만드십니다.


사명을 잊고 삶의 목적을 잃고 그저 제 살기에 바빠서

내 가정, 내 사업, 내 물질, 내 건강, 내 취미, 내 인생.. 여기에만 골몰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셔서

사명의 자리인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만들고야 맙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보십시오. 그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열매를 자기들만 먹고 나누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교회의 박해..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으로 흩어짐..

그로 인해 복음이 확산되어 수많은 생명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일치시키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이 여러분의 관심이 되게 하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즉, 우리의 성장, 우리의 사명에 헌신하는 삶 말입니다.


배가 항로를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암초에 부딪혀 파선합니다.

그 배의 항로를 알고 있는 항해사는 선원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라도

배의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가 안전하고 항구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조타수가 정신을 딴 데 팔거나 엉뚱한 놀이에 빠져서

그 배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선장은 그 조타수를 꾸짖거나 아니면 뺨을 때려서라도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서, 바로보고 바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시기전에. 즉 내가 징계를 당하기 전에

내가 똑바로 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혹 불편하게 하실 때에는 내 생의 방향과 목적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관심에 나의 관심을 일치시키는 괘도수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에 내 삶의 관심을 일치시키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삶을 불편하게 하실 그 때에는

내 삶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불편케 하시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일치시키시고,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시켜서

진정한 인생의 보람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평생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영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