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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거룩한 비효율

LNCK 2013. 1. 6. 20:53

www.youtube.com/watch?v=oTXMSypKNTc

◈거룩한 비효율       요8:32, 엡4:13~15    김성수 목사 설교 녹취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와 기독교

 

예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엘리트 학생들을 가르치던 헨리 나우웬을 아시죠?

그가 캐나다 토론토 교외의 정신지체 공동체로 들어가서 여생을 보냅니다.

 

그런 헨리 나우웬의 모습에 의문을 느낀 사람이 있었는데, 필립 얀시입니다.

그 필립 얀시가 캐나다로 날아갔어요.

헨리 나우웬을 찾아가서 ‘왜 고지에서의 엄청난 가능성을 버려두고

굳이 낮은 곳에 가서 기회를 낭비하느냐?’ 라고 따졌어요.

 

그때 헨리 나우웬은 필립 얀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우웬은 얀시에게,

지난 2천년 기독교역사 내내, 복음의 위대함이 입증된 때와 사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에 관해서, 먼저 물었다고 해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것으로 대신한 것이죠.

 

기독교 복음의 위대함이 입증이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해지던 때는,

항상 기독교가 약자로서 핍박을 받을 때였고,

그 부흥에 선 사람들 또한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

높은 명예나 권세를 갖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깐 내가 하버드나 예일에서 많은 인재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독교 고지론'으로 항의를 하러 온 필립 얀시에게

오히려 기독교가 힘을 갖게 되고, 예수를 믿는다는 일들이 세상에 권세를 쥐게 되었을 때,

어김없이 기독교는 타락의 길을 갔다는 것을 반추시켜준 것입니다.

 

그때 필립 얀시는, 성도의 삶의 본질인 <거룩한 비효율>을   ←설교 제목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라고 자기 책에서 기록하고 있어요.

 

복음의 역설과 복음의 의외성을 그때 필립 얀시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필립 얀시는, 그 이전까지 자기의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었음을

위 내용이 담긴 그 책 제목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이미 암시하고 있어요.

읽어보신 분들 계시죠?

 

그러니깐 기독교의 힘은, 신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크게 성공하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 데서,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십자가의 도

헨리 나우웬은 필립 얀시에게, 자기 몸으로 보여준 거에요.

 

그렇게 십자가의 도는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권위를 세우며

죽음으로 사는 그런 역설적 삶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법칙이에요.

 

◑중세 크리슨덤 시대로 되돌아가 버린 듯한 오늘날의 개신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는 크리슨덤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아 보여요.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시대를 크리슨덤 시대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왕국 Christian Kingdom을 줄여서, Christendom 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독교 국가’가 되겠습니다.

 

AD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림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그때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그 기나긴 크리슨덤 시대가 이어집니다.

 

기독교의 위력이 로마의 힘과 결합하여, 온 세상에 엄청난 힘으로 군림을 하게 된 때에요.

그때 사람들은, 저마다 그 크리슨덤 시대를 가리켜서 <기독교의 부흥 시대>라고 칭송을 해 대죠.

 

그러나 메노나이트 신학교의 클라우드 교수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주요 패러다임의 전환을, 크리슨덤 시대의 도래로 보면서

그때를, 초대교회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전승한 그 복음이

완전히 왜곡된 시기라고 불렀어요.

 

맞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기독교가 힘을 소유하고 세상의 권세를 쥐었던

그 크리슨덤시대가 얼마나 타락을 하고 부패를 했었는지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패권주위가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를 여실히 폭로해 줬어요.

 

따라서 그 크리슨덤 시대의 막을 내리고자 한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은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크리슨덤 시대 이후, 즉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인들과

오늘날의 개혁교회가 감당해야할 책임은

그 크리슨덤 시대의 오류를 바로잡아서

초대교회에 진정한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의무인거에요.

그러나 오늘날 개혁 교회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되는지를

구별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1년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오늘 우리는,   *2012년 신년설교

오늘날 개혁교회가 버려야 할 것과 회복해야 할 것을 돌아봄으로써,

올바른 한해의 손익 계산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과 막강한 힘과 권력으로 군림을 하던 크리슨덤 시대는,

‘기독교 고지론’으로 나아갔어요.

 

그러니까 성도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굳이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의 힘과 권력을 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 고지론’은 최근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반복적이며 지속적이며 계속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주변에 머물던 심지어 카타콤이라는 지하에 은신하여 살던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세상 나라의 중심축으로 이동했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그렇게 주변인으로 머물던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중심축으로 이동을 했단 말입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영적흡입력과 영향력으로 승부하는 대신에,

권력과 출세와 명성을 얻는 기회를 제공하는 세력집단으로 부상을 했어요.

심지어는 교황이 왕을 세웠다 폐위시켰다 하는 그런 권력까지 소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인간의 제도와 조직과 영향력을 신뢰하고

복음에 의한 자발적 회심이 아니라,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압력집단으로 변했어요.

11~13세기의 십자군전쟁이 그런 거죠. 칼 들고 가서 '믿을래 or 죽을래?' 협박한 것입니다.

 

이 크리슨덤 시대는, 과거의 검소한 예배와 내적 영적 매력 대신에

호화로운 건물과 현란한 예배의식으로 세상의 관심을 끌게되었어요.

 

교회의 초점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에서 (이게 본질인데)

예배당 건축 및 몸집불리기로 변질되는 결과를 나았습니다.

그것이 크리슨덤시대의 특징이에요. 오늘날과 달라요? 똑같습니다.

 

16세기부터,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서,

그러한 고지론에 입각한 기독교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무기로 삼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그리며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그 대가로 피를 뿌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교회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 그들의 피로 이루어낸 종교개혁의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켜버리고

또다시 ‘고지론’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서

종교개혁 이전의 크리슨덤 시대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완벽하게 되돌아가 버렸어요.

면죄부만 안 판다 뿐이지, 완벽하게 되돌아가 버렸어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세상과 진검승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시설과, 유익한 프로그램과, 입에 발린 축복의 남발로

사람들을 무한정 끌어모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말씀의 능력을 상실하고, 엉뚱한 비본질적인 부산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에요.

 

교회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고

십자가의 도가 진정한 파워임을 변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들로 채울 수 없다고 착각을 하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여 다른 예배당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진검승부를 해야 합니다.

교회의 문을 낮추고, 연극이나 무용 멀티미디어 등을 예배에 동원하고

프로패셔널한 연주인들을 돈을 주고 고용해서, 쉬운 말로 용병들을 고용해서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서 사람들의 비위을 맞춰주고

 

때로는 적당하게 울려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전하겠다라고 하는 발상은, 기특한 발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권위를 교회 스스로가 땅에 던지고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와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우리의 방법으로 도와주겠다 라는 것이지요. 그건 진검승부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러한 것들은 제갈공명이나 조조의 삼국지식 임기응변이나 권모술수인거에요.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식의 사고는, 교회라는 단어의 정의조차 모르는 무식한 발상인거에요.

 

예수님은, 당신의 기적을 보고 모인 수많은 이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모아놓고 복음전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성도는 이 땅에서, 세상적 방법으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상적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성을 방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자기의 삶에 최우선순위에 올려놓는 일을

방해받을 수 없다.. 라는 그런 절박한 신앙고백을 굳게 지켜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거에요.

 

성도는 <거룩한 비효율>, 도저히 효율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거룩한 비효율이, 진짜 효율적인 거거든요.

 

그 <거룩한 비효율>의 파워와, 복음의 역설성과, 그 복음의 의외성을 올바르게 배우고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되어져가는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내 삶으로 경험하며 사는 신자여야 되는 거에요.

 

◑세상적 손익계산으로, 절망하고, 자살에 내몰리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연말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회계사에게 의뢰하게 되는 한해의 손익계산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올 한 해 동안,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루어내며

만족할만한 삶을 살았는가?

나는 연초와 비교하여 얼마의 이윤을 챙겼고, 얼마의 손해를 보았는가?

나는 작년과 비교하여 얼마나 더 부자가 되었는가?' 등등

그러한 것으로 손익계산을 하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의해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고 결정지어버려요.

 

그래서 혹자는 예상치 못한 이윤에 감격을 하기도하고 굉장히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혹자는, 올해 못 이룬 꿈을, 내년에는 이루리라고 몇 년을 기다리면서

혼자 파이팅을 외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 거리기도 해요.

심지어 그 절망감과 박탈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이 모든 반응들이 전부

이 세상에서의 소득과 성공과 번영의 획득과 성취에만 집중하고 있는

잘못된 세계관에서 기인한 거에요.

여러분은 그러한 것으로 이입되어서는 안 되는 성도입니다.

 

올 해 2012년 1월부터 9월까지 딱 9개월 동안

뉴욕에서만 339명이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했어요.

그중에 한국 사람이 36명이였습니다.

제가 신문에 난 사건 기사 몇 건을 스크랩 해 왔는데, 잠시 함께 보실까요?

 

“택시기사로 일하던 이O조씨. 36살.

이씨는 지난 9월 6일 퀸즈베이사이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사건을 보도한 신문은, 이씨가 당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겪었고 당시 해고상태였다고 전했다.”

 

“다음날 9월 7일에는 경비원으로 일하던 55세 이O노 씨가,

퀸즈 프레시메드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방화자살 했다.

그는 당시 동거인과 헤어진 상태였으며, 끊임없이 돈 문제로 고생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어서 9월 10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김O식씨가

뉴저지에 데마시스트에 있는 자기집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한 때 뉴저지에서 10곳의 옷가게를 소유한 사업가였던 김씨는

최근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세 아이를 남겨두고 떠났다.”

 

“뉴욕 타임즈는 뉴욕내 한인사회에서 김O호씨 부부의 자살만큼

커다란 충격을 남겨준 죽음은 없었다라고 전했다.

1960년 딸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온 이들 부부는, 편의점등에서 일하다가

몇 년 후 네일살롱(손톱 다듬어주는 가게)을 열었지만,

사업이 신통치 않았다고 말했다고 매부 박씨는 전했다.

 

그러다가 약 2년 전부터 부부는 채무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부부는 네일살롱과 아파트의 임대료가 밀려, 집주인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있었고

자가용마저 압류당하면서 깊은 시름에 빠져있었다.

 

사건당일 새벽, 부부는 스무살 난 딸에게 전하는 메모를 아파트 문 밖에 남겨둔 채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고 경찰은 밝혔다.

 

매부 박O건씨는 그들은 조용히 고통을 겪었다며

현재 한명으로부터 소규모 대출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부부는 가족 중 누구에게도 돈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는 김씨가,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

생을 마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 같다며

김씨가 좀처럼 남에게 자기 얘기를 안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살된 딸에게 편지한통과 40달러의 현금을 남겼다.

편지에는 ‘사랑해 우리 딸, 너 혼자 두어서 너무 미안해.

네가 부자아빠에게서 태어났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라고 쓰여져 있었다.”

 

너무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빠가 딸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사랑해 우리 딸, 네가 부자아빠에게서 태어났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왜 우리는 이 세상의 재물의 있고/없음에 의해서, 이렇게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는

안타까운 손익계산을 할까요?

 

누가, 세상의 힘을 얻어내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실패자이며 낙오자라는 정의를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놓은 걸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의 판단에 의해서 평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목숨까지도 그렇게 스스로 놓아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게 하나님을 떠난 저주받은 세상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고 있는

이 세상의 종국적 결말, 그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 속에 투영되어 있는 거에요.

 

하나님으로 행복해하고, 하나님이 없음으로 불행해야하는

‘하나님 절대적 의지적 존재’들이

하나님으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것들로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으니까,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으로

스스로 판단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손익계산이, 그들이 원하는 이 세상 힘의 획득과 손실로 결정지어 진다면

우리의 성도의 손익은 무엇을 근거하여 계산되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 연말이 되었으니까, 손익계산서를 한 번 맞춰보자 말이에요.

우리도 사업이 망했다 든지.. 병에 걸렸다 든지..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하게 되었다든지..

주머니에 40불 밖에 안남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냥 목매달아 죽어야합니까?

 

우리도 역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그 가치 기준으로 손익계산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복을 얻어냈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손을 성취해 냈는가..

이러한 것으로 한해의 손익을 계산해서

행복과 불행과, 감사와 원망을 내어 놓는 게.. 성도의 올바른 손익계산일까요?

 

◑이 설교의 주제

 

아닙니다. 여러분 성도는 성령과 함께하는 순간부터 손해보는 삶을 살수가 없어요.

크리스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 손해보는 삶을 살수가 없어요.

 

성도의 모든 현실은 전부 이익입니다.

성도의 삶은 플라스와 마이너스로 끊어서 봐서는 안 돼요.

 

성도는 하나님을 만난 그 때부터 끝까지 플러스에요.

자꾸 매일 손익계산서, 대차대조표.. 이렇게 짧게 끊어서 보지 마시고, 길게 보십시오.

 

성도의 인생은 기다란 플러스에요.

그런데 우리가 자꾸 그걸 잘라서 보니까, 짧게 보니까, 그걸 손해라고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이에요.

사고를 당하고, 질병을 얻고,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있는 사람이면

그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인 거에요.

 

쉬운 말로 성도는, 살아있는 그 자체가 전부 이길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입술로만 예수 믿으면서,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스스로 망하는 사람 말고요.

 

왜냐하면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자기부인의 성취와 거룩의 완성>이라는 그 목적지로,

결국은 <합력하여 선>으로 수렴이 되기 때문에.. 성도의 모든 인생은 이깁니다.

반드시 최후 승리합니다. 그러면 중간과정도 다 승리인 셈이죠.

 

따라서 우리의 삶은 우리를 지나가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시키는데 거름으로 쓰이는 거에요.

 

여러분의 올 한 해는 지나가는 게 아니라, 올 한 해가 여러분 안에 쌓여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데 거름으로 쓰이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도화지를 다 꾸겨서 날려버리고 새 도화지에다 새것을 써야지..’

그런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의 그 헌 도화지 그 자체가, 가치있는 거란 말입니다.

 

쫄딱 망했는데요?

그러나 그 쫄딱 망한 것이, 다시 새로운 그리스도의 제자로 재출발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은 대단히 성공한 것입니다.

그 망한 삶도, 가치 있는 삶이에요.

 

불치병이 걸렸어요? 그것도 가치 있는 삶입니다.

우리 자식새끼가 올 한 해 너무 속을 썩였는데요?

그것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잡혀있다면

그러니깐 우리는 한해를 보내면서

‘난 참 올 한 해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는 둥

‘나는 올 한 해 손해만 보았다’는 둥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해’라는 식의 넋두리를 놓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한해는 모두다 최고의 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끌고 간 삶이, 올 한 해 여러분의 삶이었어요.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쉬지도 않으시고,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일을 하세요.

여러분을 이끌고 계신단 말입니다.

 

근데 그러한 여러분의 한해를, 하나님이 최선을 다해 이끌어온 한해를,

여러분이 가치 없는 한해라고 폄하하시면 안 되는 거에요.

 

세상이 규정해 놓은 그러한 세속적 사고와 가치기준의 틀 안에서,

'하나님의 열심'(섭리, 주권)을 평가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에요.

 

여러분의 한해는, 외양으로 한해가 어떻게 나타났던 간에.. 최고의 한해인거에요.

여러분이 올 한 해도, 또 하나님께로 깊숙이 깊숙이 성숙되어진 한해니까요.

 

이 설교준비를 하면서 그러한 광고 카피가 생각나더라고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국 티비에 나온 그 광고, 딱 한 번 봤는데, 이게 아직도 생각이 나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여러분은 올 한 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에요.

하나님의 일이 뭐라고 그랬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로, 죽어라고 올 한 해 일하신 거에요.

여러분이 금년에,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갔다면, 그건 정말 성공한 최고의 한 해입니다.

 

그런데 그 현상은,

올해 사업이 망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반대로 사업이 성공한 걸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병이 걸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도 드러날 수도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합력하여, 예수님께로 나를 더욱 한발 더 가까이 끌고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신 거에요.

 

올 한 해 동안에 여러분의 모든 일상은

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잘 믿는 일에 사용된 것이므로

(비록 그것이 징계였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열심히 일을 한 것이며, 그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인 거에요.

 

성도는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서 자신을 자랑하고

인기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번영, 소유의 확대나 명성의 획득 등이

성도의 이익이 될 수 없는 거에요. 손익계산서에 이익 란에 기록될 수 없는 거에요.

 

그것은 성도에게 이익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 인해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죠?

그렇다면 그것들은, 오히려 그것은 손실 란에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러한 세상에 재물 획득을

성도의 대차대조표의 수입란에 기입을 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있어서 소유의 감소와 사업의 실패나 명성의 훼손 등이

손해가 될 수 없는 거에요.

 

성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러한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실제화, 십자가의 실제화.. 복음이 내 삶속에서 실제로 사라지는 거에요.

 

그러한 실제화가 몸으로 경험하면서 하나님 절대의존자로 지어지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올 한해 여러분의 삶에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많이 나타날수록.. 여러분이 유익을 본거에요.

여러분은 이익을 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보세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여러분의 범사, 모든 일, 그 일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요?

여러분의 자라남을 위해 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 범사를 가지고 예수님께 까지 자라는데 쓰라는 거에요.

 

근데 그 범사에만 집중하여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이 범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졌으면 좋겠다’ 이게 고지론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 범사는 여러분이 그 범사의 관심을 두어

그 범사가 잘되고/ 못되고를 갖고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라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그 범사를 사용하여 예수님까지 자라가라고

여러분에게 범사가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범사에는 성공도 포함이 되고, 실패도 포함이 되고

부유함도 포함이 되고, 가난함도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게 범사에요.    *범사 : 무릇 모두 凡,  일 事

 

실패한건 범사에서 빠져요?

사고당한 것은 범사에서 빠집니까? 아닙니다.

 

범사라는 단어 자체가 전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범사가 예수님에게 까지 자라는데 쓰이는 거라니깐요.

 

그러니깐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그런 거침없는 요구를 하는 거에요.

 

우리의 범사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는데

그 범사가 예수에게까지 다 자라는데 사용해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범사는 전부 감사하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의 범사는 모두 우리에게 성장(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현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전부 감사에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난다는 게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가요?

 

엄청난 능력을 갖게 하는 초인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난다는 게, 테레사수녀처럼 사랑의 화신이 되는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없습니다.

 

15절에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라는 말을 잘 보셔야 되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확 덮고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확 덮게 되면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게 되고,

그 착한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까지 자라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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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에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라는 말씀을 잘 보셔야 되요

누구의 사랑 안에서? 예수그리스도 사랑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그에게까지 자라게 한다는 거에요

 

그 예수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너희가 참된 일을 하여 그에게까지 자란다는 거에요

그럼 참된(착한) 일은 해야되는 거네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확 덮고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확 덮게되면

우리가 그 사랑안에서 참된 일을 하게 되고

그 참된(착한)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까지 자라는거에요

 

그 참된 일은 무엇일까요?

‘참된’에 쓰인 헬라어가 알렛듀오에요 ‘진리를 말하다’ 라는 뜻입니다.

알렛데이아가 명사로 ‘진리’입니다.

 

그러니깐 사랑안에서 예수의 사랑안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진리를 너희들이 먼저 이해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너희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뭐에요 진리가 뭡니까? 제가하는 질문의 99%는 예수에요. 답이 예수!

제가 드리는 모든 질문에 그냥 답을 ‘예수!’ 그러면 대충 맞아요.

 

진리 변하지 않는 모든게 진리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거짓이 아니고 참 그것이 진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진리의 정의는 도대체 뭐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예수다 그러는데

그 말뜻을 진짜 이해를 하세요 여러분? 진리가 예수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진리가 예수다라는 말이 이해가 갈거아니에요

 

사람들은요 사실과 진리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어요 예를들어 볼까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아요?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돕니까?

지구가 돌죠? 이것은 사실이에요 진리에요? 사실이에요

 

여러분 사실은 어떠한 객관적인 현상을 가리켜서 사실이라고 하구요

진리는 그것을 기준으로 선과 악이 구분이 되고 생명과 죽음이 설명되어져야 되고

또한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결정적인 힘이 되야되요 그게 진리에요 알렛데이어

 

진리는 그것을 기준으로해서 선과악이 구분이 되어야되고

생명과 죽음이 설명되어져야 되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결정적인 힘이 되는 것을 알렛데이어 진리라고 해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으로 선과악이 구분이 됩니까? 안되지요 사실입니까

지구가 태양을 도는곳으로 천국과 지옥이 갈라져요?

그것을 사실이라고 하는거에요. 근데 재밌는거는요

 

이 죄인들의 세상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객관적인 현상에 불과한 사실이

어떤 사람의 의해서 그러니깐 어떤 주관 어떤 사람의 주관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후에는

진리라는 잘못된 이름을 얻게 된다는 거에요

 

이 죄인들의 세상에서는요 한마디로 죄인들은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즐겨요

왜냐하면 내가 가진 진리는 나의 칼이되어서 다른일을 심판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기 때문에

죄인들은 진리를 조작하고 생산해내는 것을 아주 습관처럼 즐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실을 갖고 진리로 둔갑시켜서 자기들의 무기로 쓰고있는 이들이 많은거에요

죄인들이 진리를 조작해내고 생산해내는 과정이 이래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 상호간에는요 힘이 작용하게 되요

이 힘의 정도에 따라서 인간의 해석과 태도는 그 평가를 달리받게 되요

그 힘이 어떻게 조성이 되고 획득되어졌는지는 중요하지가 않고

실제 사실이 어떠하다는것도 큰 의미가 없어요

 

힘은 힘이면 되는거고 사실은 사실이면되요

예를 들어서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건 갈릴레오에게있어서는 사실이었죠?

다른 한편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는 것은 당시의 많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에게 사실이었어요 그렇죠?

 

실제현상은 갈릴레오의 사실과 일치를 했지만

당시 종교재판을 진행했던 지극히 지적였던 권력을 갖고 있었던 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수가 없는 비 진리였어요.

 

갈릴레오의 주장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천동설이 진리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가진 이들이 진리로 채택을 한것은

선악과 옳고그름의 판단기준이 되어서 사람을 심판하기도 했단 말이에요

 

왜 갈릴레오가 그 법정문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그러고 나왔지요?

안그러면 죽어요 왜 갈릴레오반대편이 있는 이들이게는 자신들이 힘으로

그 세상적인 힘으로 만들어내고 조작해낸 진리라는 칼이 들려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힘을 수여한 이들은 그 진리로 갈릴레오를 얼마든지 죽일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한 힘이 있기 때문에 죄인들은 진리를 조작해내고 생산해내는 것을

아주 즐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어떤 사람이 당시 권력에 의해 채택된 그 사실과 충돌하는

그런 다른 사실을 주장할 때 힘에의해 채택된 그 사실은

순간 진리가 되어서 옳고 그름에 기준이 되 행사하게 되고

심지어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자를 죽일 수 있는 힘까지 동시에 부여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인거에요.

 

요약하면 인간들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진 그 주관적인 사실을

진리라고 밀어붙이는 습성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신처럼 되고 싶은 아담적 욕망에서 기인한 죄성인거에요.

 

그래서 그 사실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맞던 맞지않던 그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나는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는 거에요

 

나는 옳다 지구가 태양을 돌던 태양이 지구를 돌던 그건 애초에 관심이 없어요

그걸 그 사실을 주장하는 내가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걸 진리로 조작하고 둔갑시켜버린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그리고 그것을 갖고 선사람을 난도질해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힘을 소유한 세상이 이 세상에서 진리라고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세상의 힘 돈 재와 가치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자가

성공한자고 그것을 많이 획득한 자가 훌륭한자다

그리고 그것을 많이 얻은삶을 성공한 삶이라하고

그것을 많이 얻어간삶을 번영이라고 한다 라고하는 이것을 진리의 칼로 쥐고있단 말입니다.

 

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자는 자기힘 스스로 도덕과 윤리를 만들어서

우리도 이렇게 깨끗하게 살아갈수있다고 우길수 있어야하고

우리가 하나님말고 힘으로 소유하고 있는 의지하고있는 그것들이

진짜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있고 가치있는것이다라는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하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꼭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진리로 삼아서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난도질해 버리는거에요

루저 실패한 사람 너는 죽어도 싼사람 그렇게 세상이 여러분에게 도장을 팍팍 찍어버린다는겁니다.

 

그런데 그 도장을 맞고 자기가 목매달아 죽어버리는거에요 그거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걸 누가 이름을 붙였다는겁니까

누가 그건 조작된 진리를 갖고 여러분들을 미혹하는 마귀의 속임수일 뿐이에요

 

여기에 참진리인 예수가 하늘로부터 뚫고 내려오는것입니다.

그래놓고 내가 진리다 라고 얘기하는거에요 내가 진리다 이세상에 진리가 어디있어

내가 진리야 내가 진리이기 때문에 나로서 너는 착하고 선하고 악하고

너희는 생명이 있고 없고 나로서만 너는 행복하고 불행한자로 나눠져야되

 

이세상의 힘이 있고 없고 병이 들고안들고 사고가 당하고 안당하고 돈이 많고 적고

이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너희는 그것으로 행복과 불행으로 나눠지면 안되

너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의 생과 살을 나누면 안되

내가 진리야 그게 바로 내가곧 진리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진이 그래요

 

여러분은 그 예수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냐 말입니다.

여러분에 연말 손익계산은 어떻게되야합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있어요

예수가 진리인 예수가 여러분안에 들어와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불행한 이가 될수 없어요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낙오자가 될수 없어요 진리가 여러분 편이거든요

 

그런데 왜 세상이 조작해놓은 그러한 가짜진리에 의해서 자신들을 평가하고

거기에대해서 실망하고 그것좀 얻어냈다고 좋아서 헬렐레 하고

연말을 왜 그렇게 보내십니까 왜그렇게 우울하셨어요

그동안에 왜그렇게 안해보기가 민망했죠 돈못벌어다줘서 그랬죠

 

여러분은 그러한 사실들로 그러한 사실에 불과한 현상으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면목없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도안하고 일년내내 집에서 탱자탱자 놀던 그러한 사람들은 반성해야죠

그런데 열심히 했는데도 못번걸 어떡해 열심히 했는데 망한걸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내게로 더 성숙해졌으면 여러분 이익본거라니깐요

예수라는 진리에 의해서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손익계산을 해야 되는거에요

 

여러분 그렇게 진리가 이땅에 내려오면요 비 진리가 공격을 당해요

여러분 예수님이 진리가 이땅에 내려오셔서 이 수많은 사실들을 완전히 기각해버린거 아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딱 달리자마자 하늘에 별이 떨어졌어요 태양이 빛을 잃었어요

무덤이 열리고 시체가 나왔어요

 

이건 사람들이 사실이며 진리라고 믿는 것 죽은사람은 무덤에서 못나와야되고

별은 떨어지면 안되요 태양이 빛을 잃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인간들이 조작해놓은 모든 진리라고 하는것들이

예수님이 오시자 비진리로 폭로가 되어버렸어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예수라는 진리가 여러분 삶속에 떨어지잖아요?

여러분들은 공격을 당해야되요 그럼 성경말씀은

모두가 예수라는 진리만을 설명하는 거에요

 

그래서 올바른 설교가 여기에 떨어지게되면 여러분은 공격을 당해야되요

여러분은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진리에 의해서 비진리를

여러분은 여전히 옛사람안에서 붙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우기고 싶은거에요

 

세상이 전부 그걸 좇고있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 진짜 진리가 떨어지면 공격을 당해야 되요 아파야되요

 

그래서 때로는 어떤분들이 우리목사는 매주 와서 야단만 쳐!

저는 야단을 치는게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에게 야단으로 들려졌다면 여러분은 잘 들으신것입니다.

진리는 항상 비진리를 공격하게 되있어요

 

그러니깐 설교를 왜 맨날 그렇게 표독스럽게하냐는 둥 그러한 소리 하지마세요

여러분이 공격당해야 낫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이세상의 진리는 크게 두 패로 가지고있어요

 

죄인쪽에서 조작한 진리와

스스로 진리라고 선언한 약속된 인물

이 세상이 어떤 한 인물이 진리였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자기들이 조작해놓은 진리가 너무 많아요

 

그것을 행 불행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가르고 있던 진리가 너무나 많은데

내가 진리야 라고 진짜 진리가 와버렸어요

 

그런데 자기들이 가지고있던 진리를 놓기가 싫어 그럼 어떡해야되죠?

그럼 진짜 진리를 죽여서 묻어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진짜 진리가 죽은거에요

그런데 진리는 생과 살을 넘나드는 생과 살을 결정하는 힘이 있어요

다시 살아나버렸어요

그러고는 그 진리를 죽인 비진리를 거짓으로 확 폭로해 버린 것입니다.

 

그 예수가 여러분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은 그 진리이신 예수 그 예수가 가득담긴 말씀으로

계속 공격을 당하면서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비진리를 하나하나 놓아가는 거에요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는게 예수가 아니란거에요.

그 앉아가지고 여러분이 원하는것들을 그 진리이신 예수에게 자꾸 땡깡부리며

요구하지말라는 말이에요

내 비진리를 더욱더 권고하게 해주세요 그거 아닙니까?

둘은 충돌하게 되있다니깐요.

 

여러분 상황이 어떠하든 현실이 어떻든 예수님믿는 여러분이 복있는 자들이고

여러분이 선한자들이고 여러분이 가치있는 분들이고

여러분들이 진짜 행복한 분들인거에요

 

예수없이 착하게 사는 사람들 그것을 선이라고 하지 않아요 악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야 가나안에들어가서 다 죽여버려 그러면 죽이는 것이 착한삶입니다.

예수없이 선악 우리가 판단을 해서는 안되요

 

그러니깐 여러분 다른 이들보고 함부로 저사람은 사람이 왜 저모양이야?

왜 저렇게 비 윤리적이야? 부도덕적이야? 이렇게 평가하시면 안되요

 

예수안에서 예수가 그를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시는 과정에서

그에게 시키는 일이 부도덕하게 보여질수 있지만

예수와 관계된 그 일이 선이라니깐요?

 

세상이 진리라고 결정해놓은 거기에 일일이 비교하시면 안되요

나는 왜이리 안착할까? 나는 왜이리 부도덕할까? 그러면 안되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 절망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예수믿고 죽는날까지 부도덕하게 살다갈수있는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마지막에가서 나는 이런존재밖에 안되는구나

그래서 나에게 예수님이 필요하구나 그러한 사람이 착한삶을 산거에요

 

그러니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한사람은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땅에서 그러한 세상에서 나는 착한사람이에요 나는 잘난 사람이에요

이런 인기를 끄는 것을 목적으로하지 않아요

 

내 삶의 나타나는 현상이 어떠하든 예수께로 자랑하는 삶에만 관심을 두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괜히 그냥 하나님한테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게 뭐있냐고 파출소에가면

술 취한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두 마디가 있대요

 

그것을 케이블 방송작가가 캐치해다가 개그코너를 만든게 있던데

‘국가가 나에게 해준게 뭐가있냐?’ 첫 번째가 그것이고

두 번째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걸 개그 작가가 실제로 파출소에가서 조사를 해가지고

술취한놈들이 제일 많이하는 말이 조사한 말이 그거 두 개래요

 

그것은 야 1등만 기억하는 그리고 1등만 우대하는 이세상은

정말 못되먹은 세상이다가 아니라 나도 1등이 되고싶은데

1등이 못되는 바람에 그런대우를 못받았다라고 하소연하는 거에요

 

국가가 여러분의 삶을 도와주면 더 나아질까요? 행복해질까요?

조금 안도와줘도 어때요 우리는 예수로 손익계산하는 사람인데

우리는 이땅에 재화로 손익계산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죽음 손해보는 삶 괜찮아요 그쪽은 불편한삶 괜찬습니다.

시기와 모함과 질투와 험담의 가슴아파하는 삶 괜찬아요

강하고 연약한 삶 괜찬습니다. 누가 그 삶의 이름을 지었습니까?

세상이 이름을 지은거에요

 

그것은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보면 절대로 불쌍한 삶 아니에요 실패한 삶 아니에요

망한 삶 아닙니다. 그러니깐 그런것에 주눅들지 마세요

성도는 <거룩한 비효율>속에서 내가 망한건 효율적인 삶이 아니자나요

그런데 그러한 거룩한 비효율속에서 참담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나라 백성임을 잊지마시고 예수로만 행복하시라는 말입니다.

 

거지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아시죠? 그 비유는 가난한자는 무조건 천국가고

부자인 사람은 무조건 지옥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것없이 살다 간다고해도

나중에 천국간 사람과 이세상에서 날마다 연락하며 자색옷입으며

그것은 굉장히 부자였다는거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지옥가면 둘중에 누가 가치있는 행복한삶을 산것이냐

이것을 비교한것이거든요 누구에요

 

휴 해 아무개처럼 84살에 27살짜리 모델하고 결혼하고 플레이보이지에 창관해가지고

죽는 날까지 아주 떵떵거리며 살면서 도덕과 윤리를 위해서 육적쾌락과

세상의 모든 편안함과 위세를 누리고간 사람, 아직 안 갔지만, 곧 갈거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 무슨 예수가 필요하겠어요 그 사람 그렇게 살다가 지옥가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보잘것없이 살다가 나중에 천국갔어요

자 어떤삶이 더욱더 가치있는 삶이라고 얘기하시겠나요? 휴 아무개요?

그런데 왜 전부 이렇게 되달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나 이세상에 쾌락누리고 가게해주세요 편안하게 살다가게 해주세요

그런데 지옥가면 도대체 그것이 뭐가 가치있는 삶이겠느냐가

거지나사로와 부자이야기에요

 

그러면 분명이 여러분이 지금 거지 나사로의 삶이 더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이였다라고

저에게 대답을 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적어도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 사람이 먹던 상해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먹는 처지는 아니잖아요

개가 핧는 그런 처지가 아니자나요

 

얼마나 몸이 부실했으면 개가와서 헌데를 핧는데 그것을 쫒아낼 힘이 없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삶이 가치있는 삶이라고 저에게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그지경까지는 안내려갔잖아요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면서요.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한 것 아닙니까?

 

도저히 동의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계신분이 꽤 있네요

여러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알아요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예수로 딛고 일어서야 되요

여러분이 아무리 지금 비효율적인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여러분은 수지맞은 삶, 행복한 삶, 복 받는 삶을 살고 계신 거에요

 

그러니까 행복하십시오

이제 새해까지 10분 남았는데, 10분 동안 찬양하고 10분후에 우리 해피뉴이어

진짜 행복을 지금까지 말씀드린 예수를 행복한 그 진짜 행복을 서로에게 빌어주고 기원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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