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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떠난 말세의 교회에 대한 경고

LNCK 2013. 1. 9. 12:42

◈예수님이 떠난 말세의 교회에 대한 경고      계3:14~22       아래 설교 녹취


 


저는, 우리 교회가 사람이 많이 안 모여도 좋습니다.

주님은 ‘뜨겁던지, 차든지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우리 교회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라오디게아 지방의) 뜨거운 물이 되어서, 주님께 드려지기 원합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모르는 말세의 교회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 눈 먼 것과 /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우리가 ‘내가 말한다’는 식으로 운을 떼며 말을 하는 것은, 자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 상황인데, 오늘날도 그 교회처럼,

자기가 부자라고 자랑하는 교회나 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헌금을 내면, 물질 축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헌금을 장려해서

‘나는 부자(교회)라’ 하면서,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고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부자관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물질관은, 부자든지 가난하든지.. 그것에 대해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부요가 아니라,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도다’ 라면서

말세의 교회가, 혹시 자기의 부유함을 자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주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나는 somebody다’ 라는 식으로, 스스로 자랑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존재이므로,

‘내가 누구다’라는 식으로, 스스로 자고하거나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스스로 ‘자기가 부자다’ 라는 이야기는,

세상적으로 많은 것들을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자가 되면 좋지만,

본질적 크리스천의 삶을 살려면, 늘 자기 부를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부자다’라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가난한 사람이 될 때,

그 심령의 가난함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을 찾게 되고, 또한 기도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는, 자기 가난함을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나,

자기 부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1. ‘네 곤고한 것과’

예수님이 보시기에, 실상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실상은 네 곤고한 것과, 네 눈 먼 것과, 네 가련한 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곤고’란 말은, 사도바울이

롬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바로 그 곤고를 뜻합니다. 헬라어로 같은 말입니다.        *talaiporos

그런데 롬7장에 보면, ‘내가’라는 말이 계속적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성도가 ‘내가’라는 말을 쓸 때는,

‘내가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가 죄인이로다’라고 말할 때나,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나는 부요한 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할 때, ‘내가’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런 자랑, 교만이야말로.. 마귀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부유하다며 자고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반대로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부자라’ 하는 사람들도.. 실상 그 내면을 뜯어보면, 대단히 곤고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인간은, 물질로 만족을 얻으며 사는 존재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사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곤고한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생 물질을 의지하고, 건강을 자랑하며 살던 사람들은,

나중에 노인이 되면.. 폐인이 되고 맙니다.


목회자라도,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그저 세상 인기, 세상 명예를 좇아서 살았다면,

나중에 은퇴하고 난 후에, 그 삶이 비참해 집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현역으로 뛸 때처럼, 인기가 명예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네 가련한 것과’

스스로 부유하다고 자고하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실상은 가련한, 즉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은,

쉽게 넘어지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낙담합니다.


설교자도, 

자기 설교에 댓글 좋게 많이 달아주고,

‘목사님, 설교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기분이 우쭐해지고,


그러다가 조금만 비난과 멸시를 당하면,
분노하고 못 견뎌하는..

이게 바로 ‘가련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나를 어찌하던 간에, 원수가 나를 어찌하던 간에,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성도는, 요동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 안에 우리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 나의 주인, 생명, 구원자가 되시는 사람은,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가련한, 즉 미저러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성도의 삶이 됩니다.

여러분, ‘가련하다 미저러블하다’는 말이,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커져버린, 현대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서 있어서,

가련하지 않고, 곤고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성도와 교회가 됩시다.


▶3. 네 눈 먼 것과 ▶2. 네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알지 못하는도다’ .. 여러분, 우리는

자기 영적인 상태를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벌거벗고 돌아다니면서도,

자기가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계속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보면, 명품으로 자기를 과도하게 치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고급자동차에 지나치게 연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곤고하니까,

자꾸 명품이나 다른 세상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도다’하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자기 스스로가, 영적으로 가련한 상태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금은 보석, 좋은 차.. 이런 것들이.. 어떻게 천국의 부요함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드디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경고와 징계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19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 자녀들이 빗나갈 때, 그냥 계속적으로 지켜보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때가 차면, 징계하시고, 또한 징계하실 것을, 미리 경고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맞기 전에,

열심을 내고,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인내하시며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의 뜻을 어기고, 부모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면,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 자식이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말세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


▶계3장18절은, 징계를 선포하기 전에, 마지막 권고의 말씀입니다.

이후로 계시록에 마지막 22장까지, 주님의 권고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우리는 위 계3장18절의 권고를,  

우리 각자가, 또한 우리 교회가, 또한 한국 교회가 들어야 할

마지막 권고로 생각하며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이 본문의 권고는,

작게는 우리 교회를 향하여, 또한 세상의 모든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지막 권고라고 .. 저는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 권고란.. ‘내(즉, 예수님)에게서 금, 흰옷, 안약을 사라’

즉 세 가지를 사라는 것입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사라’고 말씀하니까,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던 <구원론>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아니, 구원은 그저 얻는 것인데.. ‘사라’는 말은, 뭔가 내 공로를 보태라는 말이 아닌가?

뭔가 내 대가를 지불하라는 말이 아닌가?


여러분,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저 (공짜로) 구원을 얻었는데,

사실 그 공짜처럼 보이는 구원도..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신 것입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권고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사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즉 믿음)을 사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정 속에서 남편과 아내의 갈등, 경제적 갈등과 어려움,

이런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나가는 가운데.. 정금 같은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금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3천도가 넘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 녹여서, 순수한 금만 추출해 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런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사려면’ .. 용광로의 불을 통과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어느 날 갑자기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돌팔매질을 수 천, 수 만번 했을 것입니다.


그가 사나운 사자와 이리 떼들과 싸우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쓴, 평소 삶의 돌팔매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돌팔매질을 연단한 결과, 마침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뚝딱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용광로 불과 같은 연단 가운데서, 정금처럼 생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는 사자굴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수없이 많은 경우에,

그와 비슷한 시험을 겪었고, 이미 승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사자굴만큼 위험하지는 않았겠지만, 비슷한 위험을 평소에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굴 시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사자굴에 던져졌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제 말은, 믿음은, 용광로 불에 연단하면서, 내가 점점 정금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면서 기도로 간구도 해야 하지만,

그렇게 ‘주시옵소서!’라고만 해서, 믿음이 다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엄청나게 마귀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나 자신의 죄성과 싸워서,

정금처럼 나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그래야 ‘믿음의 근육’이 내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라(즉, 대가를 치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어려움을 주십니까?

왜 나에게 행복한 가정을 주시지, 가정의 문제를 주시고, 어려움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가정의 환란을 통해서, 불로 연단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사야 되는 것입니다.

‘산다’는 말이 돈을 낸다는 뜻입니다. 대가와 값을 치러야 얻어진다는 뜻입니다.

믿음에 그런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시면서, ‘내게서, 즉 예수님께’ 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렵고 힘든 세상 세파를 헤쳐 나가실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2. 흰옷을 사라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18


여러분, 이것은 너무 중요한 신학을, 지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구약을 이해하는 핵심 키는, ‘자손과 땅’ 두 가지입니다.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이 예수님이 태어나실 조상이 되는 ‘여자의 후손’이

구약 내내 흐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으로,

이삭의 자손 야곱으로,

야곱의 자손 유다로,

이새의 뿌리이신 다윗을 통해서..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의 뿌리를 이해 못 하면,

우리는 구약을 헛 읽는 것이 됩니다.


두 번째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대해서, 얼마나 집착하시는지요.

왜냐하면 그 땅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실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2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여자의 후손’ 즉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순수 혈통을 통해서..

-또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래서 구약을 보면, 자손 싸움이고, 땅 싸움이었습니다.

마귀는 이 두 가지 영역을 공격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못 오시게 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앗수르를 통해서, 바벨론을 통해서, 메데-바사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땅을 삼키고, 그 자손을 멸절시키거나, 이방과 동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남은 자’를 통해서 

자손과 그 땅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이 유대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시자마자,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됩니다.


이제 메시야가 오시는 사명, 십자가를 지시는 사명을 다 감당하시고 나니까,

그 자손과 땅의 사명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그 땅과 자손을 이방에 빼앗겼는데, 2천년 동안 되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 땅이 필요했고, 그 자손이 필요했다..

이것이 구약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키입니다.


마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넘어지고, 원망하게 만들어서,

그 두 가지 유산을 가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훼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두 가지가 꼭 지켜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꼭 오셔야 했었으니까요.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을 들자면, 믿음과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나오고, 가장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구약의 메시야로 오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은혜로 죄인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회시대 내내 강조되다가,

말세가 되면서, 강조점이 약간 이동이 됩니다.

말세가 되면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못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말세에도,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성경의 강조점은 아닙니다.


초림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시지만, 재림 예수님은 심판자로 오십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초림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강조점입니다.


그런데 심판자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구원 받은 너희가 ‘깨어 있느냐, 아니면 잠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금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자’가 아닙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이,

이제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물결에 동화되어 잠자고 있거나,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주님이 뜻뜨미지근하여서, 그들을 토하여 내치고 계시는 데도

그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는다’ 라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는다’라고만 강조하는 것은,

초림 예수님을 맞이할 때, 강조된 내용이지,

지금처럼 재림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강조할 내용은 ‘회개하라. 깨어있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곧 장차 심판자로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데,

‘주인이 더디 오실 것으로 보고.. 누가 졸고 자면서 신앙생활 하느냐?’

아니면 ‘주인이 곧 오실 것으로 보고.. 깨어 있어서, 맡기운 종들에게

누가 성실하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청지기이냐?’ .. 주님은 지금 이것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계시록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행위를 보고 계십니다. 믿음과 은혜의 강조점이 아닙니다.


계2:2 내가 네 행위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것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2:19 내가 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시록에서 '행위'를 강조한 나머지 아홉 구절은, 주1)에 배치했습니다. 각자 읽어보십시다.

 

그러므로 말세에 계시록이 전하는 복음은,

믿음과 은혜보다는.. 그것도 맞습니다만, 그 동전의 반대편인

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값을 치르고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은,

거룩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결케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한편으로 역사하지만,

성결하기 위해서, 내가 다른 한 편으로,

내 스스로 세상 것들을 내려놓는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어느 한 편만 강조하면 극단적 신앙이 되는데,

거룩케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한 면만 강조하면.. 극단적 칼빈주의, 하이퍼 칼비니즘이 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한 인간의 노력만 강조하면.. 알미니안이 됩니다.

우리는 둘 다 균형있게 강조해야 합니다.


주님이 흰옷을 입혀주시는 은혜가 주어지면,

나도 흰옷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유지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반응response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후자(인간적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전자(주님의 은혜의 역사)가 진지하게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에 흰옷을 사라고 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각자가, 치를 대가가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기 스스로도 내어버리는

기도와, 결심과, 노력을 치르는 것이..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자기에게 손해도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흰옷을 ‘사기’ 위해서, 그것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은,

흰옷을 사서 입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흰옷 입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시나요?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흰옷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오늘 본문은, 내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야 하는 흰옷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내가 치를 대가와, 내가 얻게 될 구원의 값을

한 번 계산하고,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눅14:31~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를 머리와 지식으로 믿기만 하고,

정금 같은 믿음도 사지 않고,

흰옷도 사지 않고,

안약도 사서 바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받은 구원의 보증guarantee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정금 같은 믿음도 사고,

흰옷도 사게 되어 있습니다.


<토끼 ‘담비’ 예화는, 길어서 중략합니다.> 설교 녹음을 직접 들어보세요!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시119:105.


안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안을 밝히 떠서,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안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은 여러분이 듣는 것..이 말씀을 주신 주요 목적이 아닙니다.

읽는 것..이 말씀을 주신 주요 목적이 아닙니다.


말씀은..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행하려면, 먼저 우리가 말씀을 ‘사야’ 합니다.

말씀을 받기 위한.. 값을,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손해 보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조롱도 받게 될 것이고, 심지어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게, 말씀이 더 밝히 잘 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 까지 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는,

예수를 너무 쉽게 믿고 있습니다.

교회만 다니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 가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간단히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자기 마음속으로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 가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한 편 강도는, 간단히 예수를 믿고 낙원을 보장 받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는 다행스런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나머지 오래 수 십 년을 더 살게 되어서,

만약 자기 행위로 주님을 부인했다면, 그는 낙원의 은총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은, 그의 신앙고백이 진정한 것이었다면,

그는 남은 생애에서도, 분명히 신실하게 주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이 말세의 교회 시대에

주님은, 우리에게,

3가지를 값을 치르고 사라고.. 도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치를 대가가 만만치 않지만,

우리가 얻는 생명과 영생의 구원이 너무 놀랍고 고귀한 것이므로,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기꺼이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성도에게,

세상과 마귀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팔짱끼고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훼방하고 핍박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래 저래 성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명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하신 참 성도는,

그 핍박과 훼방을 능히 이기고, 계시록에 나타난 대로

‘이기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이끄시는 은혜, 즉 ‘성도의 견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떠난 교회가, 세상적으로는 부유해지면서,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곤고했다고, 가련했다고, 가난하고,눈멀고 벌거벗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권고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권고입니다.

이 마지막 권고를 듣지 않으면, 이제는 책망, 징계, 채찍이라고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환란과 핍박을 통과하고서,

불로 연단한 정금이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 나의 삶 가운데 어렵고 힘들고 역경이 있지만,

금보다 귀한 이 믿음을 사기 위해서,

그 어려운 길을 계속 인내하며 갈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소서.


또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세상의 유혹들, 세상 친구들, 세상 방법들을 다 내려놓게 하여주소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래서 흰옷으로 단장한 신부가 되며,

눈을 떠서 밝히 보며,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이기는 자들이 되도록,

저희를 도우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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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2: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행위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8 내가 네 행위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3:15 내가 네 행위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18: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ㅡ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2.12.27.에 <음성>만 게시 되었으나, 오늘 <녹취문>과 함께 다시 게시합니다. 

         녹취문은, 전체 대의와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